[단편 소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오직 분노뿐이다 (14)

등록 2000.02.28 11:53수정 2003.10.22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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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밖의 세계는 모든 것이 달랐다. 농담은 먹혀 들어가지 않았다. 당연히 내 말을 협박이나 공갈로 새겨듣고 알아서 기는 놈이 없었으므로, 나는 더 이상 입만 놀리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 결과 나는 점차 말수가 줄고, 그대신 말보다 주먹이 앞서 나가는 인간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학교 밖에서의 생존 방식이라는 것은 결코 말로 이루어지는 아니었다. 그만큼 학교 밖에서는, 주먹을 앞세우는 인간들이 그저 더러운 본능에만 의존해 살아가고 있었다. 내 주먹에 때가 묻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나는 어느날 늦은 저녁, 밥상머리에 앉아 불과 십여분만에 리스트 작성을 끝냈다. 내가 한가할 때 손을 좀 봐야겠다고 지목한 교사들은 그 더러운 인상만큼이나 내 입맛을 쓰게 만드는 작자들이었다. 나는 그 리스트의 첫머리에 담임교사의 이름을 집어넣었다. 나는 그 이름을 들여다 보고 있으려니 웬지 울적해지는 심사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나는 리스트가 적힌 종이쪽지를 잘 접어서 상의의 안주머니에 넣어 두었다. 언젠가 때가 오면, 그 리스트 위에 하나씩 붉은 줄을 그어 나갈 작정이었다.


겨울이 다가올 무렵, 나는 집에 들어가 지내는 날보다 집에 들어가지 않는 날이 더 많았다. 나는 그때쯤 이미 집 밖으로 나돌아 다니는 일에 이골이 나 있었으며, 그러자니 자연히 돈이 필요했다. 이 놈의 건달 생활이라는 것이 돈푼 없이는 품위조차 유지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아직까지 내가 어떤 인간인지도 모르고 착실하게 학교를 다니고 있는 여동생도 걱정이었다. 구청에서 다달이 보내주는 생활보조금만으로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동생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지만, 나는 동생이 지금껏 아르바이트를 해서 나를 먹여 살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누이동생이 잔소리를 늘어놓을 일이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나는 가능하다면 어느 정도 돈이 마련될 때까지는 집에 들어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처음에 나는 여관방에 드러누워 소주병과 함께 뒹구느니 차라리 어디 멀리 나가 바람이나 며칠 쐬고 돌아와야겠다는, 그런 식의 단순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 이미 그 누구도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고 있었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물론 누이동생은 그렇게 해서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오빠가 인간쓰레기로 전락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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