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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여자 선생님입니다.
오늘은 돌아오는 길에 인간답게 좀 살아보자고 대형 할인매장에 들렀습니다. 외식이 아니면 먹지 못할 모듬 야채도 담아보고, 오랜만에 바지락으로 된장찌개도 끓여 보자고 재료도 골랐습니다.
그렇게 모처럼 마련한 저녁 성찬을 낑낑거리며 들고 가는데 돌연 앞에서 꾀죄죄한 어린 사내 녀석 하나가 내 앞을 막아서며
"이, 씨팔놈. 개새끼야" 하고 욕을 퍼붓습니다.
나는 황당한 나머지 대꾸도 못하고 입만 벌리고 있자니까 이번에는 요녀석이 연방 욕과 함께 궁시렁거리면서 내 물건들을 발로 퍽퍽 찹니다.
나는 난데없이 당하는 일이라 정신이 없고 어찌할 바를 몰라,
"얘, 너 왜 그러니. 얘가 아픈가.... 저리 가라."
하며 쇼핑한 물건을 이리 저리 피해 봅니다.
나이는 초등학교 3·4학년 되었을까요. 어느 도장에 다니는지 때가 절은 운동복을 하나 입고 무엇 때문에 그리 화가 났는지 눈에는 온갖 적개심을 담고 저를 대하는 데 미칠 노릇입니다.
먼저 드는 생각이 제 정신이 아닌 아이같다는 생각뿐입니다. 그러니까 더 무섭습니다. 아이보다 제가 나이를 먹어도 곱절은 훨씬 넘었는데 조그만 녀석 하나를 밀어내지 못하고 쩔쩔매는 내 꼴이 내가 보아도 한심합니다.
생각같아서야 소리를 쳐 크게 혼내고 아이 멱살을 쥐어 보거나, 아이보다 훨씬 굵은, 내 다리 힘으로 한 방 먹이면 깽하고 도망갈 것도 같습니다만,
길거리에서 모르는 아이를 그렇게 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아이와 싸우자니 쪽팔리는 일 아닙니까. 게다가 죽기살기로 아이가 달겨들면 이보다 험한 꼴을 보게 될까 우려도 되구요.
몇 번을 당하다가 아이를 힘주어 밀쳐내고 "이상한 놈일세"하고 가려는데, 이 녀석이 또 쫓아와 이번에는 쇼핑한 물건이 아니라 나를 공격하려고 합니다. 섬뜩합니다. 그렇게 녀석에게 발길질을 열 너덧 번은 당했나요.
아이의 집요함에 정신을 못차리는데 저 쪽에서 구원병이 왔습니다. 길거리에서 물건 파는 아저씨입니다. "너 이 녀석. 왜 길가는 누나한테 못된 짓이냐. 너 아까도 저기 아저씨에게 개새끼라고 하고 도망갔지." 하며 큰소리로 꾸짖습니다.
그러자 나한테는 그렇게 패악질을 해대던 녀석이 아저씨 앞에서는 잠잠합니다. 그걸 보니 기가 막힙니다. 이 녀석이 젊은 여자라고 날 깔본겁니다.
녀석이 내가 학교 선생이라는 걸 알면, 아니면 학교에서의 내 위엄(?)있는 음성을 들었다면 저를 조금은 어려워했을까요? 우리 아이들은 내가 언성을 조금만 수위를 높여 해도 내 의도를 알아차리는데 이 녀석은 나를 오늘 완전히 깔아뭉갰습니다.
우리 학교 녀석들이 아마 저보다 이 녀석과 더 잘 싸울 거예요. 녀석이 쌍욕을 해도 남자욕을 하고, 발길질도 신체 부위는 맞지 않은 터라 아이를 완력으로 다루지 않을 수 있었나 봅니다.
저한테 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드니까요. 이 아이는 부모나 친구들, 주변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심하게 받으면서 생채기를 만들어가는 불쌍한 녀석 아니겠어요.
다행히 아저씨가 도와주어 그 자리를 모면해 돌아오면서 별별 생각이 다 듭니다. 상식적으로는 나이 서른 먹은 여자가 초등학생 하나 다루지 못해서 맞고만 있었다는 자괴감이구요(사실 이건 별로 부끄럽지도 화나지도 않습니다),
두 번째는 이 세상을 내가 잘 살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입니다. 일상에서 벌어진 아주 작은 폭력에도 저는 체면과 위신이라는 것에 싸여서 속수무책으로 굳어버린 겁니다.
무엇보다 녀석을 때리지 않고, 저도 상한 것 없이 일이 순조롭게(?) 끝나서 다행이라고 비죽이 웃어봅니다만 생각해보니 녀석은 어쩌면 똑똑한 녀석인지도 모르겠어요. 자신한테 위해를 가하지 못할 겁장이를 용케 골라냈으니 말입니다. 잘못 골랐다가는 뼈나 추리겠어요?
그러나 아직도 저를 난타하고 있는 생각은 학교라는 공간이 참 무섭다는 생각입니다. 학교, 교사라는 권위가 만들어주는 이 정연한 질서 말입니다.
제가 여기에 많이 절어 있었나 봅니다. 교양, 위신, 체면, 정도(正導), 순종, 관용 이런 것들. 이 모든 것들이 소용없는 학교 밖의 공간에서는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한 어린 녀석에게 별난 꼴을 당한 한심한 여자일 뿐입니다.
반대로 저는 교사라서 아이들의 반항이나 버릇 없는 행동에 더 오래, 더 냉철하게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교사라서 화나는 면도 있지만, 교사라서 익숙한 면도 많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오늘 생각해 보니 학교 밖에서는 참 교육에 무능하고 무심한 사람입니다. 이 녀석 말고도, 전 다른 학교 녀석들의 꼴사나운 면을 어른이라고, 교육자라고 용기내어 혼내본 적이 없습니다.
한 마디로 교육자로서 일관성이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저 학교 안에서, 나를 아는 아이들이 있는 교실 안에서만 폼잡고 일장연설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단 저만 그런 건 절대 아니겠지만요.
고등학교 다니는 기집애 하나가 엄마뻘 되는 노점상 아줌마에서 '재수없다. 시끄럽다. 집에 가서 당신 애나 교육시켜라'를 버스 정류장 앞에서 다 들으라는 듯 소리지를 때 전 짐짓 외면하고 있는 사람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래도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중에는 그나마 제가 한 소리하기 좋은 입장이었을테지만요.
제가 더 나이가 들고, 세상 때가 묻고, 사람 사는 처세를 조금 더 익히면 나아질 문제일까요. 어쨌든 그 녀석 덕분에 토요일 학교에서 편집부 아이들이랑 끓여 먹으려던 라면은 박살이 났습니다.
(끓는 물에 면을 쪼개 넣는 녀석들은) 힘들여 쪼개지 않아도 될테니 수고로움을 덜어주는 면도 있긴 하네요.후후.
싸움에는 몸집도 나이도 다 소용없나 봅니다. 전 왈왈대는 조그만 치와와의 사나움에 꼬리를 착 내리고 입만 굳게 다문 삽살개 꼴이었습니다. 삽살개가 왕하고 한 번 짖으면 깨갱하고 도망갔겠지만 저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세상은 요지경입니다. 그 녀석을 그렇게 보내도 되는거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디에서 오랜 기간을 사랑받아야 할 것 같은 녀석이었거든요. 그 녀석이 자라 힘이 생기면 끔찍한 짓 말고 건강하게 자랐으면 좋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연재기사로 교육일기를 올리고 싶어요. 이어지는 내용이라기보다는 교단에서, 혹은 교사로 살면서, 혹은 그냥 아무개로 살면서 느끼는 일들을 쓰고 싶은데요. 기사라기 보다는 교단일기니까 수필의 성격이 강할는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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