탤리가 중요하다고 말한 것

오마이 <미국 사는 이야기> 15

등록 2000.05.02 11:13수정 2000.05.02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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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란 것은 衣나 食처럼 삶의 기반이다. 기반인 동시에 가장 얻기 힘들다."


누가 한 명언이냐고?
오마이뉴스 윤세경 기자.(아직도 모르는 사람은 윤세경 기자 기사 목록에 가서 국제면 필리핀 사랑의 집짓기, 그 마지막 날 이야기 (2)를 읽어볼 것)

그런데 얼마 전에 이보다 더 좋은 명언을 들었다.
어떤 때는 집보다 더 튼튼한 삶의 기반이 되는 것이 있다더라.
그게 뭐냐구?
"인격"

여기는 한국처럼 아파트를 사서 입주하거나 전세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월 페이먼트(Monthly Payment, 말하자면 사글세라고 하겠다)로 살기 때문에 아파트에 살면서 다달이 큰 돈을 내버리느니 웬만하면 융자를 해서 집을 사고 융자금액을 다달이 갚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도 할 수 있지.

여기 신문을 보다보면 집. 집. 집. 제일 많은 부동산 광고들이 '얘, 너도 빨리 집사라' 유혹을 한다.

아닌게 아니라 결혼과 더불어 집사는 일은 내 인생에 없다고 접어두었는데 그 결심이 근래 들어서 자꾸만 펴지려고 그래. 사실 결심을 바꾸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 중학교 가기 전에 집을 사야겠다고.

왜?
왜긴 왜겠니, 우리 딸 때문이지.


아파트에 사는 것보다 집을 사는 것이 더 지혜로울 수 있다는데 동의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이들이 없이 부부끼리만 산다면 굳이 집을 욕심 내지는 않았을 것 같애.

몇 년 전에 한국 엄마들이 모여 앉아 아이들이 중학교 가면 꼭 집이 있어야 된다면서 한숨 쉬는 소리를 들었어. 아파트에 사니까 자녀들이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오지 않으려 한다며. 집 있는 엄마들은 집 있는 엄마들끼리 모이게 되니 아이들도 자연 편이 갈리게 되나봐.


초등학교 때야 애들이 아직 어리니 집 규모에 상관없이 이리저리 잘 어울리다가도 중학교에 가고 애들 머리가 커지면 사정이 달라진다는 얘기지.

글쎄, 다 그럴 리야 없겠고 대부분 그렇다는 얘기겠지만 나도 얼마 전 경험으로 그게 그럴 만도 하겠다 이해가 가더라구.

그 경험은 바로 탤리로부터 시작되었지.(탤리는 미국 사는 이야기 "이런 선생님을 원합니다 2"에 등장했던 인물이지)

내가 탤리, 탤리 한다고 그이를 나 정도의 나이로 보면 안돼. 그이는 지금 43살이다. 한국 사정으로는 미세스 네블이라고 불러야 옳겠지만 나는 그냥 탤리라고 부르겠다. 엊그제도 "하이, 탤리!"하고 불렀으니까.

그이를 보면 왠지 '빨강머리 앤'이 생각나는 탤리는(그렇다고 그녀가 빨강머리는 아니다) 인테리어 디자이너라는 직함으로 집에서 자유롭게 일을 하면서도 하루가 멀다하고 치마 바람을 펄펄 날리며 학교 드나들기를 제집 드나들 듯 하지.

조그만 여자가 기력도 좋아. 3학년 짜리 아들과 2학년 짜리 딸의 룸마더(Room Mother, 그 학급의 학부모 대표라고 할 수 있다. 담임선생을 도와서 학급의 대소사를 도맡아 처리한다)를 동시에 하면서 커뮤니티 행사에도 앞장서 일하는 그야말로 수퍼우먼이다.

그런데 그 탤리가 학기초부터 우리 딸한테 관심을 보였거든. 이를테면 자주 우리 딸을 자기 집으로 초대한다던가, 필드 트립(Field Trip)을 가면 자기 딸 뿐 아니라 내 딸에게도 기념품을 사준다거나, 자기 딸 생일초대에 같은 반 급우 중에는 내 딸만 초대를 한다거나(나는 급우를 모두 초대했었다),

나는 괜찮다고 하는데도 브라우니(Brownie, 3학년 때부터 걸스카우트라고 부르고 그 이전에는 브라우니라고 부른다)를 같이 시키자고 일부러 들어가기 어려운 자리를 맡아준다거나, 축구팀 가입 사인을 대신해 준다거나 지나가는 길인 양 우리 집에 찾아와서 은근히 집안을 살펴보고 간다던가 등등.

그래도 나는 별로 마음을 안 주었는데 이유는 학부모 중에는 그이가 치마 바람을 일으키면서 학급의 무슨 일에든지 제 아이를 앞으로 내세운다고 헐뜯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야.

학급행사가 있을 때마다 가서 보니까 처음에는 나도 그 말이 맞는 것 같았어. 크리스마스 파티나 음악 발표회 등 학급행사가 있거나 하면 꼭 탤리를 비롯해 두 세 명의 보조 룸마더들과 부자집 아이들이 더 중요한 역할을 맡고 학급을 대신해서 선생님들에게 꽃이나 선물을 전달하는 모습을 보면서 머리를 끄덕였지.

그런데 일년의 절반쯤을 지나오면서부터는 그 생각이 바뀌었다.

가만히 보니까 룸마더라는 것이 정말 여간한 헌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더라구. 특히 탤리를 보면.

개강파티와 종강파티, 발렌타인 파티, 크리스마스 파티. 스프링 파티, 할로윈 파티, 때마다 절기마다 학급의 각종 파티와 거기에 필요한 소모품들을 챙기고 학부모들에게 연락하는 일.

그것만 하나? 소풍 가면 아이스박스 들고 따라나서야지 필드 데이에는 심판 보아야지 선생님 생일과 선생님 주간도 챙겨야지. 특별 학습이 있을 경우에는 학습 자료 만드는 것도 도와야지. 각종 펀드레이징(Fund Raising) 신경 써야지. 학교 전체 행사에도 참여해야지. 보통 능력 가지고는 정말 하기 힘든 것이 룸마더라는 사실을 알게되었지.

나도 우리 아이들 초등학교 다니는 동안에 한 번씩 룸마더 해줘야 되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참이어서 더욱 유심히 보았더니 돈도 돈이지만 시간과 열정이 엄청 많이 들어가는 일이라 지금은 거의 포기한 상태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학교 성적에 영향을 미친다면 모를까 선생님에게 학급대표로 선물 전달하는 정도의 특혜(?)도 안 받는다면 그게 오히려 불공평 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때서야 그이를 헐뜯는 다른 학부모들의 말이 시기에서 나온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렇게 여러 번 개인적으로 탤리를 대했지만 그이는 한번도 다른 엄마들에 대해서 내게 이러쿵저러쿵 얘기했던 일이 없었다는 거야. 학급 룸마더를 맡고 있으면 아이들과 학부모들 사정을 두루 꿰고 있을 터인데 말야.

그래서 슬슬 탤리에게 마음을 열어 볼까 하는데 어느 날 그이가 또 이렇게 말을 걸어왔어.

"우리 딸이 집으로 놀러 가고 싶어하는데... "라면서.
그렇게 관심을 보이는데도 내가 영 자기 딸을 집으로 초대를 안 하니까 직접 얘기를 하더라고.

"아휴, 그래요? 물론 아무 때나 와도 되지요."
"당신 딸이 정식으로 초대할 때까지 기다리겠어요."
"미안합니다. 한국아이들끼리는 초대 없이도 왔다갔다 잘 놀아서요 거기까지 신경을 못 썼어요.우리 딸보고 정식으로 초대하라고 할께요."

여기서 정식으로 초대한다는 것은 뭐 대단한 게 아니라 내가 너를 초대하고 싶은데 몇 날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우리 집에 와서 놀 수 있겠니? 라고 미리 말하는 것이야. 그리고 그 말끝에 나는 기어이 내 속을 보이는 말을 붙이고야 말았다.

"근데 우리 집이 너무 작고 동생하고 같이 쓰는 아이 방이 좁아서요. 애들이 어디 마음대로 놀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라고.

탤리는 미국의 전형적인 중상류 층으로 최소한 40만 달러 이상 되는 집에서 살고 있고 나는 작은 아파트에 살고 있거든.

근사한 집에 그 중에서도 가장 넓고 전망이 좋은 방을 혼자 쓰는 브룩과 시원한 뒷뜰에 놀이터를 따로 설치해 놓은 그 집을 생각하면 소파도 짐스러워서 안 두고 사는 우리 집 어디서 얘네 들이 자리잡고 앉아서 놀 수 있을까 참 쓸데없는 걱정을 했었나봐 내가.

같은 아파트 사는 아이들이 놀러 올 때는 그런 생각 별로 안 했는데 말이야. 하여간 그러고 돌아왔는데 그날 저녁에 탤리가 일부러 전화를 했어.

"성희씨, 집이라면 신경 쓰지 마세요.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랍니다. 집보다 중요한 것은 인격(personality)이잖아요."

그때서야 탤리에게 믿음이 많이 가면서도 나는 그날 왜 그렇게 부끄러웠나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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