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웅씨 실종 직전 신학 공부

오마이뉴스 공개추적-두 서울대생 실종 10여년, 노진수 안치웅씨 어디에 있습니까 ②

등록 2000.05.08 09:43수정 2008.05.02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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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년 5월 26일 오전 9시30분. 암사동에서 식당을 하던 안영규(68세)씨는 아침식사를 먹고 나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았다. 한번 뒤돌아 보던 안치웅(서울대 무역 82학번)씨.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날 이후 12년간 안치웅 씨는 아무런 소식이 없다. 14년 전, 어버이날군부독재권력의 서슬이 퍼렇던 86년 5월 8일. 김해교도소장으로부터 백옥심(62세)씨에게 한 장의 전보가 날아들었다. 큰아들 안치웅 씨가 몇일째 단식농성중이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안씨는 '한국전쟁이후 최초의 연대파업'이라는 구로공단 대우어패럴 파업사건으로 김해교도소에 수감된 상태였다.백씨는 곧바로 내려가 아들을 면회했다. '책 반입 허용' 등 몇가지 요구조건을 내건 채 단식중인 안씨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어찌 어머니의 얼굴이 반갑지 않으랴. 하지만 안씨는 교도소측에 격렬히 항의했다. 무슨 의도로 오늘 전보를 쳤냐는 것이다. 단식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왜 하필 어버이날…. 서울로 올라온 어머니 백씨는 다음날 민가협 어머니 몇몇 분과 함께 다시 김해교도소로 내려갔다. 백씨를 비롯한 어머니들은 교도소장에게 안씨의 요구를 들어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때 한 어머니가 한 말을 백씨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우리 아들들이 0.75평에 가만히 앉아있으려고 여기에 들어온 줄 아느냐. 소리 지를 수도 있고 정당하게 투쟁할 수도 있지 않느냐?"지금부터 14년전 어버이날 즈음, 아들과 어머니는 그렇게 싸우고 있었다. "신학대 교수가 되겠다"전남 광주 조대부속중학교와 숭일고등학교를 졸업한 안치웅 씨는 82년 서울대 무역학과에 입학한다. '80년 광주'를 고등학교 2학년 때 겪었던 안씨는 대학에 들어와 '운동권' 학생이 되었다. 동생 안○○(34)씨는 "형의 책장에는 (당시의) 금서가 많았고, 말은 별로 없었지만 이론적인 학습을 많이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안씨는 졸업을 한 학기 남겨놓고 85년 7월 1일부터 86년 7월 4일까지 대우어패럴사건으로 구속됐다. 이후 87년 6월항쟁으로 복권되어 7월에 복학을 했고, 이듬해인 88년 2월에 졸업했다. 그리고 5월 26일 실종된다.가족들의 증언에 의하면 일년간의 수감생활이후 안씨는 앞으로의 진로와 삶에 대한 고민을 한 것으로 보인다. 냉전이데올로기가 강하게 지배하던 80년대 중반. 구속경력까지 있는 소위 '빨갱이' 학생이 번듯한 곳에 취직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또한 안씨는 그렇게 살고 싶지도 않았던 것 같다. 안씨의 어머니는 고시공부를 바랬다. 하지만 안씨는 '신학대학 교수'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의 뜻에 따라 고시를 권유하던 동생에게 안씨는 "그렇게 나 혼자 잘사는 길은 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 안씨가 어머니는 영 못마땅했다. 실종될 즈음 고시냐 신학대학이냐를 놓고 어머니와 안씨는 조금 갈등을 했다.안씨를 찾기 위한 노력88년 5월 26일, 안치웅 씨가 집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어머니 백씨는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전에도 종종 말을 하지 않고 외박하곤 했었고, 대우어패럴사건 때도 신문을 보고서야 알았었기 때문이다. '곧 들어오겠지, 곧 들어오겠지….'실종 3일째가 되자 걱정이 된 백씨는 당시 안씨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던 새암교회 이광복 목사를 찾아갔다. 안씨가 신학대학을 희망하고 있던 참이라, 어디 기도원이나 갔나 싶었기 때문이다. 목사와 교회 사람들이 새암교회에 관련된 기도원 몇 군데를 찾아봤지만 헛수고였다.수첩에 적힌 친구들에게 전화를 해봐도 다 모른다는 말 뿐이었다. 소식을 들은 대학 친구들이 집에 찾아와 무슨 메모라도 있나 책들을 뒤졌지만 소득이 없었다. 친구들은 모두 "몇 개월간 안씨를 만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실종되기 몇 개월 전부터 안씨는 매일 밖에 나갔었다. 불길해진 백씨는 민가협 어머니들과 함께 치안본부에 찾아갔다. "내 아들도 박종철이처럼 몰래 죽여버린 것 아니냐"고 따졌지만 경찰은 "죽인 일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경찰은 안씨에 대해 실종자 전국 수배를 내렸다. 수배가 내려진 이후 백씨는 전화기 옆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기다리던 아들의 소식은 오지 않았다. "안치웅씨 들어왔냐"고 묻는 경찰의 전화만 올 뿐이었다. '어디 위장취업을 했겠지. 곧 연락이 오겠지….' 그렇게 2년이 갔다. 90년 7월10일 아버지 안영규 씨가 입에서 피를 토했다. 위출혈이었다. 병원에 입원을 했고 한겨레신문에 광고를 냈다. '아버지가 위독하다. 죽기 전에 얼굴이나 한번 보자'는 내용. 그러나 그뿐이었다. 안영규 씨는 건강이 회복되었지만 안치웅 씨는 연락이 없었다. 세 가지 가능성그렇게 또 10년이 흘렀다. 위장취업이라고 생각했던 가족들은 이제 더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 자발적인 가출일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자발적으로 집을 나갔다면, 위장취업이나 종교적인 문제일 수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이든 가족들에게 12년간 전화 한 통화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거의 모든 위장취업자들이나 수배자들도 당사자들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핫라인'은 존재한다. 생사여부는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그렇다면 사고를 당한 것은 아닐까. 가능성은 적지만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동생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안씨는 검문이 많았던 관계로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고 한다. 사고를 당했을 당시 신분을 증명할 만한 것이 없었을 수가 있는 것이다.하지만 가족들은 정치적인 실종에 가장 큰 무게를 둔다. 안치웅 씨의 동생은 형의 실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처음에는 종교적인 일 때문에 자의적인 가출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났어요. 만 12년 다 됐는데…. 만약 자의적인 가출이었다면 12년 동안 연락을 하지 않을 사람이 세상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는 1차적으로는 그것을 배제하고 싶고…. 이런 생각이 듭니다. 당시 형이 매일 집에서 밖으로 나갔었는데 만났다는 사람은 없어요. 당시 형이 누구를 만났는지는 모르지만 혹시 다른 일에 연루돼서 잡혀가지 않았나, 조사를 받다가 사고가 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 당시에도 수배상태에 있던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까. 그런 사람들 때문에 연루돼서 잡혀가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안치웅씨에 대한 기사는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노진수씨, 안치웅씨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그대들을 찾아 나섭니다.
오마이뉴스는 민가협(의장 임기란, 총무 남규선)과 공동으로 그대들이 이 하늘 어디에 있는지 앞으로 3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노진수씨(대구 남구 대명동 출생).
사람들은 당신이 서울대 법대 2학년에 휴학중이던 1982년 5월 '실종'되었다고 합니다. 서울대 앞 지하독서실에서 기거하던 중 한밤중에 방문한 세 남자와 함께 떠났다고들 합니다.

그로부터 17년, 가족과 학우들은 청와대에 탄원서까지 냈지만 그 누구도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안치웅씨(광주 동구 산수동 출생).
사람들은 당신이 서울대 무역학과를 1988년 2월 졸업한 후인 1988년 5월 26일 '실종'되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12년, 가족과 선후배들은 일간지에 '사람을 찾습니다' 광고를 내봤지만 당신은 연락해오지 않았습니다.

노진수씨, 안치웅씨 어디에 있습니까.

세월은 흘러 동시대를 살았던 당신의 친구들은 국회의원이 되고, 벤처기업 사장이 되고, 시민운동가가 되었습니다. 또한 아이 한둘에게 아빠 소리를 듣는 가장이 되었습니다. 그대들은 정말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어디로 떠난 것입니까? 

오마이뉴스는 3명의 특별취재팀, 그리고 1800여 기자회원들과 함께 당신을 찾아나섭니다.  
 
 
(노진수, 안치웅씨의 행방과 관련해 도움을 주실 분은 오마이뉴스 1면 우측에 있는 '기사제보'란을 이용해 주십시오.)

2000.05.08 09:43ⓒ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노진수씨, 안치웅씨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그대들을 찾아 나섭니다.
오마이뉴스는 민가협(의장 임기란, 총무 남규선)과 공동으로 그대들이 이 하늘 어디에 있는지 앞으로 3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노진수씨(대구 남구 대명동 출생).
사람들은 당신이 서울대 법대 2학년에 휴학중이던 1982년 5월 '실종'되었다고 합니다. 서울대 앞 지하독서실에서 기거하던 중 한밤중에 방문한 세 남자와 함께 떠났다고들 합니다.

그로부터 17년, 가족과 학우들은 청와대에 탄원서까지 냈지만 그 누구도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안치웅씨(광주 동구 산수동 출생).
사람들은 당신이 서울대 무역학과를 1988년 2월 졸업한 후인 1988년 5월 26일 '실종'되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12년, 가족과 선후배들은 일간지에 '사람을 찾습니다' 광고를 내봤지만 당신은 연락해오지 않았습니다.

노진수씨, 안치웅씨 어디에 있습니까.

세월은 흘러 동시대를 살았던 당신의 친구들은 국회의원이 되고, 벤처기업 사장이 되고, 시민운동가가 되었습니다. 또한 아이 한둘에게 아빠 소리를 듣는 가장이 되었습니다. 그대들은 정말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어디로 떠난 것입니까? 

오마이뉴스는 3명의 특별취재팀, 그리고 1800여 기자회원들과 함께 당신을 찾아나섭니다.  
 
 
(노진수, 안치웅씨의 행방과 관련해 도움을 주실 분은 오마이뉴스 1면 우측에 있는 '기사제보'란을 이용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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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선임기자. 정신차리고 보니 기자 생활 20년이 훌쩍 넘었다. 언제쯤 세상이 좀 수월해질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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