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진 이상으로 폭탄을 투하한 것이 아니다"

매향리 주민들 "일상적 훈련...늘상 이렇게 당했다"

등록 2000.05.12 22:42수정 2000.05.22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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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2일 정오 12시.
오늘도 경기도 화성군 매향리에 위치한 '쿠니사격장' 철책 안에는 사격 연습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주황색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그때 바로 머리 위로 미공군 소속 A-10 기가 요란한 굉음을 내면서 지나가고 있다.

"저 깃발은 날씨가 좋지 않거나 휴일이 아니면 언제나 걸립니다. 애꿎은 저 깃발이 우리 주민들 분노의 상징이 되어버렸지요. 어제는 한 분이 위험을 무릅쓰고 사격장 철조망 밑을 파고 들어가 깃발을 찢기도 했어요. 그런다고 아무 것도 달라지진 않죠."

'미 공군 폭격연습 주민피해 대책위원회' 전만규(44) 위원장은 담담하게 말을 털어놓는다.

"이런 경우는 한두 번 있었던 일도 아닙니다. 오히려 지난 8일에 있었던 오폭사고도 그동안 주민들이 당해온 일상적인 폭격 피해와 크게 다르지 않아요."

오히려 지난 8일 사건이 발생할 때 잠잠했던 국방부나 언론이 이제 와서 호들갑을 떨면서 보도하는 것에 여러모로 미심쩍은 부분이 많다고 말한다.

"이번 폭격은 미공군 측의 고도의 전략의 일환이라고 생각해요. 지난 98년 2월 매향리 주민 200여명이 1인당 1000만원씩 모두 280억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서울지법에 내었지요. 이번 달 말에 심리가 끝나지요. 미군은 그걸 노린 겁니다. 8일 사고처럼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어쩌다 한번뿐이라고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떨어뜨린 거죠."

그리고 그는 "사건이 발생한 후 미군 쪽은 전투기 엔진고장으로 자체 무게를 줄이기 위해 폭탄을 투여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이는 폭격피해 사실을 단순사고로 축소·은폐하려는 수작"이라고 주장했다.


그 증거로 그는 지난 8일 아침에 목도했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지난 8일 오전 8시 25분 경, 평소처럼 미공군 소속 A-10 지상공격기 1대가 12kg 짜리 연습용 폭탄을 '농섬'에 투하했어요. 그리고 곧 8시 45분경 미 공군기 3대로 이루어진 1개 편대가 날아오더니 225kg짜리 폭탄 6개를 한꺼번에 투하했어요. 만조로 불어있던 바닷물이 거대한 물기둥을 만들어내고, 귀를 찢는 굉음이 마을을 뒤흔들었죠."

그의 말에 따르면 폭탄을 투여하기 위해 예행연습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에 대해 미군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고 있지 않다.

"벌써 4일째 미군 사격장 앞에서 책임자 면담을 요구하고 있지만, 미군은 만나주려 하지 않아요." 대책위원 이정원(40) 씨는 이장 등 주민 50여명과 함께 오늘도(5월 13일) 사격장 앞에서 시위를 했지만 미군은 얼굴도 내밀지 않았다고 말한다.


미군 쪽은 문을 걸어 잠근 채 미군소속 통역관을 통해 "이렇게 힘들게 시위하지 말고 한국 국방부나 한미배상위원회를 통해서 배상을 요구하라"고 '충고'를 하기만 했단다.

매향리에 사격장이 들어선 것은 1951년 8월이다. 그리고 67년 한미주둔군지위협정이 체결된 이듬해엔 50만평짜리 육상사격장도 생겼다. 민가에서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쿠니사격장'은 토·일요일을 빼고 40여대의 폭격기와 전투기 등이 매일 400여 차례 폭탄 투하 연습과 육상기총소사 훈련을 해왔다.

"사격장 안엔 농토가 있어요. 약 300여가구가 미군의 허가를 받고, 국방부에 임대료까지 내면서 농사를 짓지만 이것이 주민들을 옥죄는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오폭사고가 있고 난 후 집회라도 한번 열면 미군쪽은 사격장 안의 농토로 들어갈 수 있는 철문을 닫아 버리는 거죠." 전위원장은 그의 사무실 옥상에서 철책 안의 농토를 가르키며 허탈해했다.

"최근 주민들은 사격장 안의 농토 안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요즘 집회를 한다고......원래 저 땅은 조상 대대로 우리 땅이었는데 헐값에 강제로 뺏긴 거지요. 이제는 미군의 농노가 된 거지요. 여기가 한국땅 맞습니까?" 전 위원장은 분통을 터트렸다.

그동안 매향리 주민들은 각종 폭격 연습과 오폭으로 어린이와 임산부 등 13명이 죽었고, 22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지붕이 내려 안고 벽에 금이 가고, 젖소가 유산을 하는 등 재산피해도 엄청난 것으로 알려졌다.

주민들은 88년 대책위를 만든 뒤 사격장을 점거하는 등 국방부와 미공군을 상대로 사격장 이전과 주민보상 등 근본 대책을 요구하는 투쟁을 계속해 왔다.

그렇다면 왜 미군은 굳이 이 장소(매향리)를 사격장으로 고집하는 걸까?

지난 95년 방영되었던 MBC 다큐멘타리 '오늘'에 출연한 주한 미공군 사령부 김영규 공보관은 이렇게 말했다.

"국방부에서 주민들과 사격장 이전 협의(89년 4월 28일)에 들어갔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이후 국방부와 미공군 측은 이전을 대비한 후보지 선정 작업에 들어갔으나 지금까지 이전 후보지 선정이 쉽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매향리 사격장 자체가 아시아에서는 제일의 요건을 갖춘 사격장이기 때문에 대체 장소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전 위원장은 "오산에서 이륙해 2~3분만에 사격이 가능하고, 육상과 해상훈련을 동시에 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입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며 충격적인 이야기를 주장했다. "사격장 반경 700여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는 점입니다. 조종사들한테는 실제 상황처럼 긴장감을 준다는 거죠."

현재 쿠니사격장은 민간군수회사인 록히드 마틴사가 관리를 하고 있다. 전 위원장은 "사격장 사용은 미공군이 하지만 그 관리는 민간회사가 하기 때문에 사고가 발생했을 때 책임소재를 가리기가 어렵습니다."

한편 12일 오후 국방부와 주한미군은 진상조사를 거쳐 배상하고 주민 이주대책을 마련하기로 했다.

한미행정협정에 따르면 미군 임무수행 중에 발생한 피해에 대해서는 주민들이 해당지역의 정부배상심의위원회에 신청할 경우 미군 단독 또는 한미 합동 피해조사를 거쳐 배상여부가 결정된다.

그러나 전 위원장은 "주민들은 50여 년 동안 1500데시벨이나 되는 포격 소음에 만성적으로 노출되어 있었다며 미군은 이번 한번으로 사건을 축소하려 하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면서 "하루빨리 미군은 매향리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이번 8일 오폭에 의한 직접적인 피해는 미미한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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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같은 남자. 산소같은 미소가 아름답다. 공희정기자는 오마이뉴스 대학기자단 단장을 맡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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