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러온 호박을 발로 차지 마세요

오마이 <미국 사는 이야기> 20

등록 2000.05.19 22:05수정 2000.05.20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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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부터 태양을 사모하던 오월은 여름을 이만큼 가까이 가져다 놓았다.


얼마나 가깝게 왔는가하면 오후로 달려가기 전인데도 자외선 차단제를 발라 아이들을 밖에 내보내야 할 정도로. 아직 오픈파티를 하지 않은 아파트 풀장으로 아이들이 옷을 입은 채 첨벙 뛰어들 정도로. 수퍼마켓에 나온 수박을 아무 생각 없이 덜렁 집어들 정도로.

그렇게 바짝 다가온 여름은 겨울에 더욱 씩씩한 팬지꽃들의 기운을 나날이 떨어뜨리고 있다. 나는 벌써 여름을 타는지 식욕을 잃어가던 초여름의 한낮.

그런 날, 나는 의외의 생기를 만나 오랜만에 시원한 웃음을 웃었다.

"엄마, 제발 굴러온 호박을 발로 차지 마세요."

미국 지도를 펴놓고 하와이로 갈까? 하와이는 물가도 비싸고 그렇다니 이왕이면 본토로 들어가자. 그래서 그러면 본토 어디? 시카고로 갈까? 돈도 없는데 추운데서 살면 더 살이 시릴 테고 아틀란타가 따듯하다니 우리 남쪽으로 가자. 그래서 이쪽 지역에서는 괜찮은 학교로 꼽히는 대학에 유학 신청을 해 아는 이 하나 없는 아틀란타 땅에 무작정 떨어진지 이제 1주일 지난 한 가정을 태우고 아파트 사무실과 학교를 들러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시간 많이 안 뺏을 테니 좀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부탁하는 한 분의 청이 있었어.
시간 많이 안 뺏겠다고 하지만 얘기를 들으면서 앞으로 시간 뺏길 일이 많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어. 그래도 그 분의 마음 씀씀이가 고맙게 들려 쾌히 그러마 했다.

내가 집에 있는 시간이 다른 엄마들에 비해 많아도 집에 있어서 더 일거리가 많고 바쁘다는 것을 아는 분의 미안함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재택 근무한다니까 아주 편안하게 집에서 노는 사람인 줄 아는지 이것저것 생각 없이 말하고 부탁해서 난처할 때가 많았거든.


"알았어요. 근데 아시죠? 오늘 시간 많이는 못 빼구요. 이 근방 아파트 몇 군데 소개해 드리고 학교는 가까우니까 같이 가 드릴께요."

그 분은 5학년이라는 여학생 현아와 그 애의 엄마를 모시고 들어왔다.
커피와 녹차와 애플주스를 취향대로 만들어 드리고는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이 동네얘기와 학교얘기를 했다.

"조금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소위 말하는 더 좋은 학군들이 있지만 저는 여기가 더 좋은 것 같아요. 버클리레이크 초등학교는 백인과 흑인, 동양계와 라틴계 등이 골고루 섞여 있는 편이라서요. 특히 한국에서 처음 온 아이들은 백인들만 많은 학교보다는 오히려 그게 더 적응하기 편할 것 같습니다. 한국 아이들도 여럿 다니고 있어요. 그런데 아이만 데리고 혼자 미국에 오셨어요?"

몇 년 사이 아빠는 한국에서 돈을 벌어 생활비를 부치고 소위 조기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엄마가 아이들만 데리고 와서 이산가족이 되어 사는 가정들을 여럿 보았거든.

"아니예요. 아빠도 같이 왔어요. 사실 애 아빠의 오래된 꿈을 이루기 위해서 온 거나 마찬가집니다. 대학 졸업 후에 곧장 유학을 가고싶어 했는데 제가 그 뒷바라지 감당 못한다고 해서 못 왔거든요. 지금 학교에 있습니다."

아이의 아빠는 한국에서 최고로 치는 명문대학을 나와 대기업에서 여태 일하다 오신 40대였다.
두 마디로 '자유'와 '교육'을 찾아 여기까지 왔다는데 글쎄 그걸 쉽게 여기서 찾을 수 있을지 은근히 걱정부터 되는 것은 또 웬일인지.

그런 얘기들을 나누며 아파트를 둘러보고 학교의 도서관과 카페테리아, 컴퓨터실과 음악실, 미술실, 교실들을 둘러보았다. 아이 교육을 위해 왔다는 이들을 몇 대해 보았지만 이렇게 아이가 다닐 학교에 신경을 쓰며 꼼꼼히 돌아보는 분은 처음이었다.

다른 지역도 몇 군데 이미 보시고 오셨다는데 이 쪽 지역이 마음에 드셨는지 여기로 정해야 되겠다며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길이었어.
이미 점심시간이 훨씬 지나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들 배가 고프다는 걸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저희 집으로 다시 가셔서 간단히 점심을 함께 드시지요. 갑작스러워서 집에 뭐 준비된 것은 없고 떡국을 끓일 수 있을 것 같네요."

사실 이미 점심시간이 가까웠을 때에 우리 집을 찾으셨던 터라 무엇을 준비해 드려야 하나 처음부터 머리 속에는 그 생각이 떠나질 않았었다. 아는 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여태 호텔에서 묶고 계시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점심은 내가 준비해 드려야 할 상황인데 고만고만 남아있는 반찬들로 점심을 차리기에는 좀 부족했고 할 수 없이 냉동실에 있는 비상식량 떡국떡을 생각해냈다.

현아 엄마도 그들을 모시고 온 분도 신세지는 것이 미안해서 얼른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며 어색한 시간이 똑딱똑딱 흐르는데 갑자기 차 뒷자리에 얌전히 앉아 있던 현아가 큰소리로 말하는 거였어.

"엄마! 제발 굴러 들어온 호박을 발로 차지 마세요."
순간, 어색했던 긴장이 저만치 물러나 버렸다.

"아이구 참, 얘는. 얘 버릇을 어떻게 고쳐야 할지 모르겠어요."
현아 엄마는 잠시 당황스러워 했지만 우리는 모두 커다란 웃음소리와 함께 조금 더 친해져서 집으로 돌아왔어.

부산스럽게 떡국을 끓이고 김치와 콩나물과 무채. 있는 반찬 몇 가지를 냈다.

"그런데, 떡국떡도 여기서 파나요?"
"이 김치는 담그셨어요?
"어머, 한국 반찬도 다 만들어서 먹네요."
"저는 여기 오면 샐러드에 드레싱이나 뿌려서 먹어야 할 줄 알았어요."

한국에 미국 간 친구나 친척 한 둘 없는 사람 없고 유학과 이민 정보 센터도 많다더니 어디서 그렇게 잘못된 정보를 듣고 오셨는지 유학생으로 오면 차도 못사는 줄로 알고 오셨단다.

모차르트 풀룻 사중주 곡을 틀어놓고 우리는 떡국을 먹었다.
워낙 배가 고팠던 터라 맛없이 대충 끓여낸 떡국 한 그릇씩 깨끗이 비우고 수박을 한 입씩 베어먹고 일어서는데 말없이 열심히 먹기만 하던 현아가 갑작스레 한마디를 식탁 위에 던져놓았다.

"호박이 참 맛있었습니다!"
어? 호박이라니!
우리는 모두, 수박? 하고 말했다.

"아니요, 호박이요. 제가 엄마한테 그랬잖아요. 굴러 들어온 호박을 발로 차지 말라구요. 그러니까 호박이죠."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재기 넘치는 한국말 구사였다.
식당에서 아무리 후한 팁을 받는 웨이트리스도 이렇게 기분 좋지는 못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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