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간의 학살, 산내로 끌려간 갈전리 사람들

오마이뉴스 심층취재-대전 산내학살, 이제는 말한다

등록 2000.05.22 23:26수정 2000.05.24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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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밭마을 주민, 산내에서 무더기 학살
" 처형된 날 7월 4-5일/ 3천명 학살설 뒷받침 "

< (특별취재를 시작하며) 2000년, 한국전쟁 발발 50년째를 맞으면서 전국 대구,산청 등 전국 각지에서 군.경에 의한 양민학살 사례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그중 년초 세상에 알려진 1950년 7월, 당시 대덕군 산내면 낭월리(현재 대전시 동구 낭월동)에서 있은 수 천여명에 대한 집단 학살 사건의 진상은 듣는 이들로 하여금 순간 숨을 멎게 한다. 2급 비밀문서로 분류됐다 해제된 미국의 자료와 사진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대전형무소에 수감중이던 정치범 1천8백명이 3일간에 걸쳐 군인과 경찰에 의해 잔혹하게 희생됐다.

그러나 이 사건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총살 명령을 내린 장본인이 누군지, 현장 사진을 찍었던 미국의 개입여부와 역할, 정확한 희생자 수와 학살기간, 정치범외에 민간인 학살여부 등....
특히 미국 자료와는 달리 학살이 열흘이상 이루어졌고 희생자수도 민간인을 포함, 최소 3천여명에 이른다는 제기된 의혹은 학살의 성격과 규모를 달리하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그 어떤 문서도 국내에서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앞으로 특별취재팀은 제기된 의혹을 하나하나 헤집어 나갈 것이다. 취재팀은 가능한 조각난 이 사건의 파편들을 맞춰내 진정한 '상처 보듬기'에 일익하고 자 한다. >


(특별취재반/심규상.이기동기자) 1950년 7월, 한국전쟁 발발직후 군인과 경찰에 의한 대전형무소 집단학살 사건과 관련 한 마을에서만 일가족 등 주민 수 십여명이 무더기로 산내 골령골로 끌려가 처형당한 사실이 오마이 특별취재팀에 의해 처음으로 확인됐다. 또 이 마을 주민들에 의해 당시 학살이 7월 4-5일에도 있었음을 뒷받침하는 증언이 나왔다. 이에 따라 최근 '대전형무소 산내학살 진상규명위원회'가 제기한 학살기간이 알려진 '사흘(1천800명)이 아닌 최소한 열흘 이상(3천여명 이상)'이라는 주장에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대전시 대덕구 갈전동(옛 이름 갈밭리) 마을 주민들과 유가족들은 50년 6.25 직전인 이달 초순경 이 마을로 군인과 경찰들이 좌익사범들을 색출한다며 수 십여명의 마을 주민들을 끌고가 대전 형무소에 수감했고, 7월 초 산내 골령골에서 집단 총살됐다고 밝혔다. 이들은 또 " 당시 잘 알던 경찰로부터 시체를 찾아가라는 연락을 받고 산내로 달려갔지만 이미 시체가 심하게 부패됐고 너무 많은 시체가 널려 있어 찾지 못하고 울고만 왔다"고 밝혔다.

취재팀이 확인한 김종현씨, 성보경씨 등 마을 유가족들도 처형지가 의심할 여지없이 '산내 골령골'이라고 밝혔고 연락을 받은 시점을 적용, 내내 음력 5월 19,20일(양력 7월5-6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이같은 마을 주민들과 유가족들의 증언은 산내학살이 당시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 관련자 등 기결 정치범에 국한되지 않고 미결수에 이르기까지 이루어졌으며 7월 4-5일에도 처형이 자행됐음을 뒷받침하는 것이여서 주목된다. 특히 7월 4-5일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증언은 '대전형무소산내학살 진상규명위원회'가 제기한 7월1일부터 7월 중순에 걸쳐 열흘이상 학살이 있었다는 주장의 신빙성을 높여주는 것이다.

이 마을로 시집와 당시 상황을 목격한 이용우(77, 여.대전 대덕구 갈전리) 씨는 " 전쟁이 터지기 바로 직전, 한창 늦모를 심고 있던(6월 초경) 어느 날 저녁, 군인과 경찰이 새까맣게 몰려와 동네 주민 수 십여명을 무더기로 끌고 갔다"고 말했다.


이 씨는 " 경찰이 그 뒤 몇일 동안을 마을 사람들을 동네 나무밑에 모두 모아 놓고 빨갱이를 찾는다며 집 구석구석을 뒤졌으며 수 십여명을 끌고 갔다"면서 끌려간 사람들의 이름을 한명 한명 기억해 냈다. 이씨는 " 아버지, 아들 등 일가족이 끌려 간 집, 두 형제, 세 형제가 끌려 간 집이 많다"고 말했다.

이씨는 " 경찰이 몰려오기 전 신탄진 지서가 습격당했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지서를 습격한 사람들로 이 마을 사람들을 지목하고 경찰이 몰려온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마을 주민들의 증언에 의해 거명된 사람만도 당시 끌려간 사람들은 민호철,민노철씨등 세형제, 고준택,고상수씨등 두 형제, 김성기,김만수,김연택,김삼택,변병화,변문수,성낙신,성대길,성도경,전천복 씨등 15명에 이른다.

송기숙(92,여. 같은 마을)씨는 " 당시 경찰이 마을 남정네들을 동네 둥구나무밑으로 모아놓고 빨갱이라는 걸 시인하라고 몽둥이를 휘두르며 심하게 매질했고 내 아들도 그때 지서까지 끌려가 고초를 당했다"고 증언하며 눈물을 흘렸다.

당시 아버지(김명기)가 끌려갔다는 김종현씨(62)는 " 그 후 아버지가 대전 형무소에 수감됐고 전쟁이 나자마자 재판도 받지 못한 채 산내로 끌려가 총살됐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이용우(위 증언자)씨는 " 당시 유가족들에게 시체를 찾아가라는 연락을 받고 산내로 달려갔지만 이미 시체가 심하게 부패됐고 하두 많은 시체가 널려 있어 찾지 못하고 울고만 왔다"는 얘기를 마을 친척에게 직접 들었다"고 밝혔다.

학살기간과 관련 그동안 당시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안병남(경기도 군포 거주)씨 등에 의해 7월1일부터 학살이 있었으며 기간도 "열흘이상"이라는 주장이 제기됐으나 당시 대전형무소 근무 교도관들의 7월 8일-10일까지 3일이라는 증언을 계속해 논란이 돼 왔었다.

한편 갈밭리로 불리던 이마을은 당시 변씨,김씨,성씨등이 모여 1백여호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으나 80년초 대청댐 공사로 대부분 수몰돼 현재 10여호만이 남아 있으며 유가족들도 전국 각지로 흩어져 살고 있다.

덧붙이는 글 | 대전교도소 산내학살은 1950년 6.25직후 7월 초부터 약 열흘간 군경에의해 벌어진 정치범 집단 학살 사건입니다. 현재 대전지역에서는 대전지역 사회단체와 유가족들이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산내학살에 대한 진상규명을 위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 갔습니다. 
대전교도소 산내학살 특별취재반은 산내학살 진상조사위원회의 진상조사 활동의 일환으로 제안되었으며 앞으로 산내학살 관련 유가족 및 증언자의 증언채록과 진상조사위원회의 활동을 심층취재 해 진상규명활동을 기록에 남기고자 합니다. 
현재 특별취재반은 대전에서 활동하고 있는 심규상, 이기동 기자회원이 활동하고 있으며 관심있는 기자회원의 참여를 바랍니다.

덧붙이는 글 대전교도소 산내학살은 1950년 6.25직후 7월 초부터 약 열흘간 군경에의해 벌어진 정치범 집단 학살 사건입니다. 현재 대전지역에서는 대전지역 사회단체와 유가족들이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산내학살에 대한 진상규명을 위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 갔습니다. 
대전교도소 산내학살 특별취재반은 산내학살 진상조사위원회의 진상조사 활동의 일환으로 제안되었으며 앞으로 산내학살 관련 유가족 및 증언자의 증언채록과 진상조사위원회의 활동을 심층취재 해 진상규명활동을 기록에 남기고자 합니다. 
현재 특별취재반은 대전에서 활동하고 있는 심규상, 이기동 기자회원이 활동하고 있으며 관심있는 기자회원의 참여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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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충남 민언련 매체감시 팀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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