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호텔 웨이츄리스다!

직업에 귀천은 없다고 들었다. 여러 가지 일들을 하다보면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을까?

등록 2000.06.30 14:32수정 2000.06.30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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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부츠에선 모든 일들이 공동생산이다. 예를 들자면, 모두들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고, 일한 만큼, 키부츠에 기여한 만큼, 제공을 받는 것이다. 가족 대대로, 키부츠 설립멤버였다면, 키부츠에서 꽤 존경을 받고 조금 더 높은 보수를 받는다. 아이들이 많으면 큰 집을 제공받는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키부츠 외부의 직장에 다니고 있다면, 번 돈은 개인에게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고스란히 키부츠에 들어오고, 그 사람은 많이 번 만큼, 키부츠와 관련이 된 만큼 더 많은 배당을 받는다. 키부츠 안에서는 일종의 사회주의가 많은 것들을 제재한다.

그 만큼 키부츠 사람들은 바깥 사람들이 사는 물건들을 택스 프리(Tax Free)로 더 싼 값에 구입한다. 빨래와 다림질, 정해진 날짜에 정해진 빨래주머니에 넣어서 '프레스'라는 곳에 맡긴 후, 하루 후에 찾아가면 되고(그래서인지, 키부츠인들이 쓰는 물건에는 고유의 번호와 이름이 적혀져 있다), 식사도 다이닝룸에서 모두 함께 먹는다.

본인이 원한다면, 빨래와 다림질 정도는 그냥 집에서 해도 되고, 밥도 집에서 해 먹어도 된다. 빨래같은 경우, 없어질 가능성도 있고 해서인지 꼼꼼한 어머니나 아주머니들은 집에서 세탁기를 돌리는 것 같다. 하지만 먹는 일은, 개인적인 일이 아닌 이상 보통 다이닝룸에서 해결한다. 다이닝룸의 음식을 싸 가지고 가서 집에서 먹는 사람도 있다. 함께 하는 일이 많다고 하는 사회주의 마을이지만 모든 것은 각자의 자유다.

도착한 지 얼만 안된 티 좀 내느라고 키부츠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다이닝룸에서 저녁을 먹었다. 키부츠 사람들은 점심을 잘 먹고, 저녁은 점심때 남은 음식으로 대강 때우기 때문에, 맛있는 식사를 기대하던 나에게 남겨진 건, 말라 비틀어진 피자와 생야채, 양파, 실파, 당근, 오이, 요거트와 치즈 등이었다.

먼저 어떻게 먹어야 할지 난감했다. 식당의 시스템은 뷔페식이기 때문에, 쟁반을 들고 커다란 접시와 나이프, 포크, 스푼을 집었다. 트롤리(trolley : 바퀴가 달린 일종의 수레로 음식을 담고 따뜻하게 보관도 한다)에서 오이와 당근을 두 개씩, 접시에 피자 한 쪽, 크림치즈, 요거트를 담고 어떤 자리에 앉을까 고민했다.


발룬티어들은 지정된 테이블에 모여 식사를 한다. 노란 머리에 파란 눈인 발룬티어들이 "새로 왔다는 애들이야?"하는 눈초리로 식사를 하면서 슬금슬금 쳐다보고 있었다. 셰이프린과 캐더린과 함께 자리에 앉으니, 승희와 윤경이는 다른 한국사람 3명과 함께 앉아 있다.

셰이프린은 한쪽 눈에 문제가 있다. 말하자면 '사시'다. 그러면 어떠하리? 섹시한 얼굴과 아름다운 갈색머리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히 아름다웠다. 셰리프린은 '카멜'이라는 담배를 핀다.

하루에 반 갑 정도 피운다는 그녀는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피운단다. 안 혼나냐고 물으니, "엄마, 아빠, 모두 애연가이고, 나도 성인인데 피우라 피우지 말라 말하실 수 없겠지." 그녀는 23살이다.


캐더린은 정말로 너무 너무 하얀 피부에 원조 금발(너무나 금발이라 은발같아 보이는...)에 호수처럼 파아란 눈을 가졌다. 21살의 캐더린은 미술학도, 가끔 마라톤이 열리는 네덜란드의 로틀담에서 대학교를 다닌단다.

저녁을 대강 먹고 한국사람들이 모여 있는 테이블로 갔다. 원은 27살, 회사를 그만두고 이스라엘에 왔고, 신 역시 27살, 사랑에 실연을 당한 후 더 망가지기 전에 부모님이 이스라엘로 보내버렸단다. 제리는 18살, 대학을 갓 입학한, 영어도 배우고 여행도 할 겸해서 왔단다.

적당히 자기 소개를 하고 펍(PUB:영국의 펍과 같이 자신이 원하는 술을 사서 테이블에 앉거나 서서 마시고, 이야기도 하고, 포켓볼도 치는 곳)에 가서 한 잔 하자며 모두 일어섰다.

키부츠를 한바퀴 더 둘러본다면서 나왔다가 이런, 길을 잃었다. 7월 2일의 바람은 왜 이리도 센지, 가로등 하나 없는 좁은 오솔길을 걷자니, 정말이지 너무 무서웠다.

가까스로 룸에 돌아온 나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고, 펍에 가서 맥주 한 잔을 하고, 정확히 자정에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우리 블락 바로 뒤가 펍이다. 음악소리와 해석도 안되는 다국적어, 영어, 불어, 더치, 스패니쉬, 히브루... 이런 것들이 내 귀에 쏟아져 들어왔다. 잠을 자려고 이리 저리 뒤척여 보지만, '잠'은 이미 구름 속으로 숨어버렸나?

'이... 저것들이... 잠도 안 자고...' 누군지도 모르지만, 속으로는 욕을 하면서, 손으로는 이불을 끌어올리면서 어떻게서든 꿈나라에 빠지려고 노력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잔 것 같지도, 깨어있었던 것 같지도 않은데, 음악소리는 멎어 있고, 벌레 우는 소리만 들려온다. 그리고 몰려오는 추위, 왜 이렇게 추운 걸까? 지금 여름 맞아?

아침식사가 저녁식사와 다른 점은 말라빠진 피자 대신 달걀이 종류별로 나왔다는 것. 써니 사이드 업(일명 달걀 후라이)과 완숙이와 반숙이로 나뉘는 삶은 달걀.

각 키부츠마다 키부츠의 경영과 재정을 위하여 기본적으로 농업을 자급하고 있으며, 특정사업 등을 하고 있다. 크파길라디 사과는 우리나라의 대구 경산사과처럼 유명하며, 선글라스 사업과 호텔사업을 하고 있다. 내가 처음 일한 곳도 호텔이다. 호텔 웨이츄리스...

함께 일하게 된 영국친구 폴라(그녀의 영어액센트에 적응하느라 10분은 헤맸을 거다), 나, 승희, 윤경은 뒷문을 통해 들어간 호텔 레스토랑 주방에서 초록색 앞치마를 두르고, 매니저의 설명을 들었다. "다 먹은 사람의 접시만 치우면 되요" 레스토랑에 들어가자마자, 특유의 향료냄새일까? 갑자기 코로 숨을 들이쉬는 게 너무도 힘이 들었다.

레스토랑에는 굉장히 종교적인 유대교(Jewish) 사람들로 가득했다. 모두들 전통 유대의상인 검정색 옷에 챙이 넓은 검정 모자, 혹은 손바닥만한 모자인 키파(머리위에 삔으로 고정시켜 쓰는 빵떡모양의 모자)를 쓰고 맛있게 점심식사 중이었다.

단체로 몇백명이 낯선 검정 옷을 입고 있는 것도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도대체 이 냄새는 어디서 나는 걸까? 사람냄새 같기도 하고, 이스라엘 음식에 들어간 독특한 향료의 냄새같기도 하고, 정말 처음에는 '토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일하느라 바뻐서 그 기분을 잠시 잊었을 뿐...

호텔일은 3시에 일단 끝나고 오후 6시까지 다시 와서 일하게 되어 있다.

룸에 들어가서는 잠만 잤다. 쿨쿨, 일어나서 6시까지 호텔에 도착, 이번에는 이스라엘을 관광 온 미국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내가 그릇을 치워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 곳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다른 웨이터와 웨이츄리스와도 이야기를 했다. 세상은 어딜 가나 비슷하다. 이름 묻고, 나이 묻고, 자연스레 몇 마디 나누다 보면, 남자친구 있나? 여자친구 있나?하고 물어본다. 소개시켜준다는 부록(appendix)의 말도 함께...

밤 12시, 일이 끝났다. 모두들 6시 이후에 다이닝룸 게시판에서 내일 어느 곳에서 일하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돌아가는 길에 다이닝룸에 들렸다. 또 호텔 웨이츄리스.... 폴라는 같이 일했던 이스라엘 남자애가 마음에 든다고 말한다. 로맨스... 그것은 어디에나 있다. 아무나 찾지 못할 뿐...

그랬다. 키부츠에서의 첫일은 힘들고 정신없고, 하지만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웨이츄리스 배을선'으로 나는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Can I take this?(이 그릇 가져가도 돼요?)"
"Are you finished?(다 드셨나요?)"
오늘 하루 이 말을 얼마나 많이 했을까?

아버지는 "왜 그 먼 곳까지 가서 고생을 하냐"며 가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제야 알 것 같다. 나 스스로를 찾기 위해 이렇게 멀리 왔나보다. 이름 석 자 말고, 날 설명할 수 있는, 나의 지위와 부를 설명해 줄 또 다른 이름을 만들어 내기 위해 이 곳에 왔나보다.

그것이 무엇일까? 왜 내 이름 하나만으로 날 설명할 순 없는 걸까? 도대체 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뭘 해야 굶어 죽지 않을까? 정체성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들을 던져 놓고, 그 대답을 피하기 위해 이 곳에 와 있나보다.

여기에서는 내가 과거에 무엇을 했든, 뭘 하는 사람이든, 오직 '써니'라는 닉네임만으로 날 반겨준다. 난 며칠동안 웨이츄리스다. 열심히 하면 된다.

직업에 귀천은 없다고 들었다. 이 곳에서 얼마나 다양한 종류의 일들을 해 볼 수 있을까? 여러 가지 일들을 하다보면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을까? 그게 무엇이든.

아버지가 그리운 밤, 숫컷인지 암컷인지 모를 고양이 한 마리가 오솔길 저편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쓰면서 생각한 것들......>
의사들은 며칠만의 폐업으로 그들이 원하는 것을 대부분 얻었습니다. 
노동운동은 앞으로 얼마나 진행되어야 할까요? 얼마나 투쟁해야 진정한 노동의 의미를 살릴 수 있을까요?

롯데호텔 노조의 파업은 20일만에 공권력의 투입으로 인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라는 그들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끝이 날 듯 위태롭습니다.

그들이 떨어뜨린 의자와 물건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의사와 호텔 웨이츄리스...
어떤 파업은 성공을 하고, 어떤 파업은 실패를 하고..

진짜 직업에 귀천이 없는 걸까요?
아니면 제가 너무 세상을 모르는 걸까요?

깨어진 호텔 유리창처럼 슬픔이 깨어지는 비오는 오후, 마음에도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쓰면서 생각한 것들......>
의사들은 며칠만의 폐업으로 그들이 원하는 것을 대부분 얻었습니다. 
노동운동은 앞으로 얼마나 진행되어야 할까요? 얼마나 투쟁해야 진정한 노동의 의미를 살릴 수 있을까요?

롯데호텔 노조의 파업은 20일만에 공권력의 투입으로 인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라는 그들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끝이 날 듯 위태롭습니다.

그들이 떨어뜨린 의자와 물건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의사와 호텔 웨이츄리스...
어떤 파업은 성공을 하고, 어떤 파업은 실패를 하고..

진짜 직업에 귀천이 없는 걸까요?
아니면 제가 너무 세상을 모르는 걸까요?

깨어진 호텔 유리창처럼 슬픔이 깨어지는 비오는 오후, 마음에도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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