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3일 평양 순안공항의 남북 양 정상,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굳은 악수는 세계사를 향해 새롭게 우뚝 서려는 우리 민족의 위상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그것은 기존의 냉전체제에 대한 파격적인 도전이자, 민족내부의 응집력이 가질 가능성을 고스란히 드러낸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외세도 민족분열의 현실을 극복하려는 우리의 의지에 파고 들어올 여지가 없음을 매우 상징적으로 확인시켜 준 현장이었다고 하겠다.
이 과정에서 특히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어떤 면모의 인물인지 알지 못하고 의문을 가졌던 세계는 그의 거침없는 행동과 격의 없는 자세와 마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북한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힘의 정체에 대하여 새롭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하지 않는 한 한반도의 미래를 제대로 가늠할 수 없으며, 동북아시아 정세재편의 흐름을 예상할 수 없는 현실이 다가 온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양 정상간의 만남은 한반도를 뒤덮고 있던 우울한 냉전의 기류를 일거에 반전시키는 놀라운 효력을 나타내고 있다.
양 정상이 만나는 장면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고 한반도는 흥분과 기대로 한껏 들뜨게 되었다. 아무리 오래 갈라져 있었다 하더라도 우리민족은 결국 하나라는 것, 그리고 그 틈새를 누구도 개입해 들어올 수 없다는 것, 민족내부의 대화와 만남은 다른 국제적인 회합과는 전혀 그 성격이 달라 복잡한 격식과 절차를 뛰어넘는 차원을 지니고 있음을 과시한 셈이다.
이러한 정상회담의 분위기는 그간 정상회담의 결과에 대하여 그리 큰 기대를 하는 것은 좀 문제가 있으며, 감상적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고 윽박지르다 시피 한 보수언론의 논조와는 달리, 예상외로 기대를 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겠는가라는 관측을 낳게 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한반도 주변 열강들은 한반도 내부에 열정적인 민족주의의 기류와 정서가 흐르는 것을 가장 경계하고 있는데, 바로 이들이 우려하는 바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우려는 우리에게는 기원이라는 점에서 열강들의 패권전략과 우리의 민족전략은 대립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 정상이 만들어내고 있는 화해의 기운은 열강들의 패권전략적 구도에 우리민족이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남과 북 양측의 근본자세가 형성되어간다는 점에서 기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이번 정상회담의 과정을 통해 남과 북은 서로 상대를 아, 그렇게 나쁘게 볼 일이 아니었구나, 이런 좋은 면모도 상대에게 있구나, 이와 같은 것은 실로 이해할 만한 일이었구나 하는 식으로 그간 오해와 편견, 증오와 대결, 의혹과 적의로 대했던 바에 대하여 깊은 인내와 이해를 가지고 대응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지니는 계기가 주어진 것이다.
바로 이 마음가짐이 그 어떤 성명이나 선언, 그리고 합의보다 더 귀중한 결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마음이 빠진 성명과 선언, 합의의 생명은 얼마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 마음이 존재하는 한, 때로 서로간에 오해할 만한 일이 생겨나도 그 오해가 끼칠 파장과 문제를 쉽게 극복해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 마음은 서로에 대한 이해와 신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실로, 이번 정상회담의 분위기는 한반도 정세를 남과 북이 잘하면 충분히 주도할 수 있는 역량이 있겠구나하는 기대를 가지게 했다. 시작이 좋았던 것이다. 아무리 열강들이 서로 진영을 짜고 한반도를 전략적으로 요리하려고 들어도 남과 북이 자주와 평화, 그리고 민족 대단결의 원칙 위에서 민족사의 운명을 책임있게 감당하려한다면 못할 일이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이런 민족적 결단과 단결이 존재하는 한 통일 이후의 한반도 미군주둔이란 얼마나 우스운 일이 될 것인가가 명확하다. 이런 상황아래에서는 미국이 자신의 세계전략상의 이해로 통일이후에도 한반도에 주둔하기 위해서 도리어 우리민족에게 머리를 숙이고 간청하다 시피하지 않으면 안될 만한 조건이 생겨날 수도 있는 것이다.
미국만이 아니라, 주변 열강들이 우리민족의 눈치를 보면서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동북아 정세의 역학변화에 영향력을 유지하려고 애를 써야 하는 상황이 도래할 수 있다.
내부적으로는 한국의 경우, 국가보안법의 존폐는 이제 매우 새로운 단계에 처했다고 하겠다. 북한을 적대적인 체제로 전제하고 북한과의 교류나 접촉 등을 처벌하는 법은 남북 관계의 정책적 입지에 있어서나, 대중적 정서의 차원에서도 더 이상 지지를 받지 못하는 조건이 마련되어가고 있다.
이는 실정법적 논리의 한계를 뛰어넘는 민족사적 차원의 시각으로 정리되어야 하는 문제가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일부 보수세력은 가치관의 혼란과 이념적 경계심의 해이 등을 거론하면서 반격에 나서려 하겠지만, 일단 방향이 바뀌고 그 차원이 달라지기 시작한 남북관계의 현실을 어쩌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제 통일로 가는 길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기정사실로 되어 가고 있다. 실로 남북 정상회담은 우리민족의 자주적 입지를 보다 확고히 하는 일에 매우 중대한 역사적 기여를 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우리의 정치는 <대(對) 노동당 정치>라는 매우 큰 규모의 사고와 자세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내부의 야비하고 유치한 파당적 정쟁은 더 이상 민족사적 정당성을 갖지 못한다. 통일을 향한 정치적 준비를 위해 모든 민족적 열정을 쏟아야 하는 상황이 막 바로 온 것이다.
이를 위해 심혈을 기울인 김대중 대통령에게 깊은 격려와 박수를 뜨겁게 보내는 마음이다. 부디 김대중 정부를 비롯하여 한국의 정치권이 앞으로 감당해야 할 법적, 제도적, 경제적, 문화적, 이념적 과제를 올바르게 해결하기 위한 민족적 자세를 한층 가다듬어 나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우리의 정치는 이제 그야말로, <대정치(大政治)의 획>을 그어나가는 역사적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모두의 각오와 결단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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