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밖 한국인들의 삶을 조명한다

사진작가 레이몬드 한이 이야기하는 '정체성'

등록 2000.07.05 14:42수정 2000.07.05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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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들은 대부분 그들이 원하는 어떤 것에 관해서도 발언(표현)할 수 있다.' 정말 그럴까?


예술적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늘 무언가 자신이 표현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 불만이다. 그것은 그러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단지 '언어'라는 도구만을 이용해 자신의 생각을 타인에게 전하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술가들, 그들은 아티스트(Artist)라는 이름 안에서 자유로운 표현을 시도한다. 구속되지 않고, 길들여지지 않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것들과 대화한다. 그 대화들은 사회의 여과지에 걸러지기도 하고 찌꺼기로 남기도 하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변해간다.

아티스트 레이몬드 한(Raymond Hahn)

그는 사진과 디지털이미지를 통해 세상과 교류한다. 그런데도
세상(좁게는 한국)은 그가 재미교포 2세라는 꼬리표를 떼어내고, 한국인이면 한국인, 미국인이면 미국인, 흑백논리에 맞추어 무언가 뚜렷한 정체성을 갖기를 요구해 왔다.

그러나 사진작가로서의 그는 그러한 요구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지가 않다. 그는 정체성을 즐겁게 극복한 아티스트라는 느낌을 준다. 한국문화와 미국문화, 그 두 문화의 서로 다른 문화적 차이에서도 그는 별다른 갈등을 느끼지 않는다. 그는 생각한다. 즉, 그는 100% 한국인도 될 수 있으며, 100% 미국인도 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은 배타적인 부분을 많이 강조하는 나라지요. 즉 한국이 아니면 모두 다른 어떤 것이어야 하고, 한국인이 아니면, 모두 다른 어떤 나라 사람이어야 하죠. 미국인이면서 한국인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 주지 않죠. 미국에 있는 유럽의 예술가들은 정체성이란 것에 대해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들은 미국인이며 유럽인이죠. 복합적이고 다양한 문화가 바로 일률적인 정체성을 극복할 수 있는 근거가 되요."

그는 오하이오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님은 그에게 한국에 관해서 많은 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부모님은 1959년 미국에 이민을 오셨죠. 북한이 고향이세요. 무언가 가슴이 아픈 일이 있으셨는지, 한국에 관해서는 별로 말씀이 없으셨어요." 그는 10살 때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고 했고, 부모님은 반대를 하셨다. 그런 까닭에 한국말이 서툴다는 그는 연세어학당에서 한글을 꾸준히 배우고 있다.


1986년 한국을 처음 방문한 이래, 몇 번 더 한국을 찾아왔고, 1997년 이후로는 계속 한국에 머물며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97년, 분당의 서현초등학교에서 1년 동안 사진작업을 했다. 이때의 작품들은 94년에 작업한 미국 LA의 한국초등학교에서의 작품들과 비교가 된다.

"저는 다른 나라에서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한국인들을 읽어내는 작업을 좋아합니다. 꼭 한국에 살고 있는 사람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들, 즉 Koreans Outside Korea - 한국 밖의 한국인들의 삶을 조명해보는 것, 그리고 부담스런 정체성이란 것을 떠나 함께 어우러져 살고 있는 다양성을 분석하지요. 한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인종, 민족이라는 갇혀진 배경 안에서 정체성을 갖게 하는 요인, 정체성을 꼭 갖추어야 한다고 호소하는 외면(外面)의 목소리, 혹은 그것의 형성을 방해하는 내면의 목소리 등을 사진과 디지털 이미지로 만들어내지요."

그의 작품은 지리적 위치와 문화 사이의 관계를 아시안-아메리칸의 맥락에서 살펴보는 것이다. 그는 문화라는 것은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문화와, 글로 쓰고 말로 하는 언어와의 관계이다. 보통사람들의 의사소통 방법인 바로 그 언어말이다.

영어는 그 하나의 예이다. 이 언어는 금세기에 들어 전 세계에서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언어가 되었다. 하지만 문화를 주제로 소통하고자 한다면 어떨까? 만약 인종과 같은 변수가 개입된다면, 그것은 더욱 복잡한 문제가 될 것이다. 세계가 점점 더 국제화되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특정 문화, 특이한 문화, 아마도 궁극적으로는 고유문화를 정의하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다 결국에는 고유문화의 정체성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관광과 무역 등, 상업적인 요인들로 인해, 이국적인 문화대상들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해졌다. 이러한 사실은 특히, 21세기에 부와 경제적 번영을 극적으로 증가시키는데 총력을 기울인 몇몇 아시아 국가들에 해당된다. 이러한 역설 - 세계가 문화적으로 다양하다고 하지만 동시에 국제적으로는 특이할 것이 없다는 사실 - 은 그의 작업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또 하나의 주제이다.

이러한 국제적으로 특이할 것이 없는 지구촌 문화의 한 결과는 '아노미 Anomie', 즉 어떠한 사회집단에도 속하지 않는 느낌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흥미롭게도 이 개념은 이민가정 자녀들로부터 항공 승무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 지시하는데 사용되었다. 그는 이 용어를 주류 미국인의 생활방식의 어떤 측면에까지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만약 이것이 사회 진화의 한 단계라면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될까? 그는 사진과 디지털이미지의 합성작품을 통해서 이러한 유목의 사회적 느낌을 강조함으로써, 그것이 문화 안에서 개인에 미치는 장기적, 단기적 효과를 평가하려고 한다.

그의 이번 작품전시회는 '아메리사지(Amerrissage : A Landing On Water)'라는 제목으로 7월 5일부터 23일까지 관훈동 인사미술공간에서 개최된다. '아메리사지'는 불어로 물 위에 착륙한다는 뜻이다.

그는 아시안-아메리칸이 된다는 것은 두 대륙 사이의 태평양을 항해하는 것이라 한다. 바다 위에서의 당신은 어떤 영토의 의무나 관습에도 얽매이지 않는다면서...

어디를 제일 가보고 싶으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서슴없이 대답한다.
"평양"이라고. 그에게 있어 부모님의 고향인 북한을 대표하는 평양은 어릴 적부터 너무도 신비한 곳이었다. 언제나 베일에 가려져 왔던 부모님의 흔적을 느껴보는 것, 그것이 어쩜 그에게 한국을 떠날 수 없게 하는 또 다른 이유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정체성'에 얽매인다. 자아보다는 타아에게 더. 실제로 자기 자신을 정의내리기란 힘이 든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자란 사람의 정체성이 그저 '한국인'이라는 단어 한마디로 요약될 수는 없다. 오히려 지금처럼 국제적이고 다변화된 사회 속에서 중요한 것은 "창의와 변화"에 적응하는 자세일지도 모른다. '정체성'이 적어도 밀폐된 공간 속의 자기실패를 의미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덧붙이는 글 | 레이몬드 한 '아메리사지' 전시회 일정
일시 : 2000년 7월 5일 ~ 7월 23일
장소 : 한국문예진흥원 인사미술공간 3층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시간 : 오전 11시 ~ 오후 8시

덧붙이는 글 레이몬드 한 '아메리사지' 전시회 일정
일시 : 2000년 7월 5일 ~ 7월 23일
장소 : 한국문예진흥원 인사미술공간 3층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시간 : 오전 11시 ~ 오후 8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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