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양민학살, 물줄기인가 물방울인가 2

지만원씨에 대한 한 독자의 공개반론

등록 2000.09.04 10:06수정 2000.09.04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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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씨에게 드리는 공개서한

91년에 방위산업체인 제 직장에 처음 근무하면서 당시 제 상사가 제게 내민 책 한권이 있었습니다. "한국군 어디로 가야하나".

직장생활을 하기 전 학사장교로 근무하면서 우리 군의 운영체계, 특히 행정체계의 불합리성에 넌더리를 쳤던 저에게 지만원 씨의 합리화 주장은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몇 년 후 율곡비리가 언론에서 크게 불거졌을 때에도 한 TV와의 인터뷰에서 "우리군의 부조리라는 작은 병폐보다는 불합리라는 큰 병을 먼저 치료해야 된다"고 강조하던 지만원씨에게 박수를 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얼마전 국방일보에 실렸던 월남 양민학살에 대한 지만원 씨의 칼럼을 보면서 지만원 씨의 인식의 한계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지만원 씨의 개인의 한계가 아니라, 군의 엘리트 코스를 모두 거치고도 시스템 개선을 지적할 만큼의 총기를 가진 지만원 씨의 사고를 경직시켜 버린 육사와 우리 군 문화의 한계일수도 있겠거니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지만원 씨의 글을 읽고는 터져나오는 답답함과 울분을 참을 수 없어서 몇자 적게 되었습니다.

지만원씨는 국방일보에 칼럼을 기재하면서 당신 자신 월남에서 초급장교로 4년을 근무했지만 양민학살은 있을 수도 없고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과연 양민학살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한겨레가 거짓을 하는 것인지, 없었다고 하는 지만원 씨가 거짓말을 하는지, 당시 월남에 있지 않았던 제가 판단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진실이라는 하늘은 어떤 큰 지붕으로도 가릴 수 없음을 왜 모르십니까?

지만원 씨야 당시 육사를 나온 초 엘리트 장교로서 월남에 있었더라도 얼마나 많은 교전상황을 접했을까 하는 의심도 들지만, 90년도에 해병대에서 근무했던 저 자신조차 수도없이 들었던 월남에서의 귀신잡는 해병대의 악명높은 전공(?)과 무용담이 유독 지만원씨의 귀만 피해갔다는 사실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남자들 군대얘기는 120%가 거짓말이라는 속설대로 제 군생활 당시까지 현역생활을 하시던 고참상사분들의 무용담을 다 믿을 수는 없겠지만, 그분들의 무용담·사진·기념품(?) 등을 종합해 보면, 무기도 시원찮고 군수지원도 제대로 못받는 한국군이 그만한 위명을 얻기 위해서는 '악'과 '깡' 말고 무엇으로 가능하겠습니까? 더구나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까지만 하더라도 공수부대나 해병대는 휴가 때 술집 몇 개 뒤집어엎어도 경찰들이 속수무책이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 옛날 월남에서 악과 깡밖에 가진 것 없던 우리 군인들이 '양민 보호'라는 상부 명령을 냉철하게 따를 수 있는 환경이 되었을까요?


서슬이 퍼런 육사출신 소대장님 앞에서는 무조건 벌벌 기어야 했기에 사병들이 말한마디 하기 어려웠던 것인지 아니면 세월이 너무 흘러 지만원 씨가 그때 일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일 듣도 보도 못했다는 지만원 씨의 주장을 접하면 80년대 후반 광주사태 진상규명 요구에 대하여 민정당이 자주쓰던 답변이 생각 나더군요. "그런일은 있을수 없고, 있어서도 안되고, 사실 있지도 않은…."

그리고 국방일보 칼럼에서 왜 노근리를 들먹이십니까? 이미 미 국방성에서도 사실을 인정하고 보상을 언급하는 단계인 지금 한국의 군사문제 전문가라는 분이 "당시 노근리 참전 미군은 대부분 18세 이하의 흑인 빈민 이었으며…한국 아낙네가 아기를 없고 간첩활동을 했다는 보고까지 접수된 바에야…" 운운하는 상식이하의 문장으로 양민학살한 미군의 입장을 변호하고 노근리에서 죽은 우리 양민을 죽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로 만드는 저의는 과연 무엇인가요? 우리는 노근리 사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보상을 바라지만, 당시 우리 국민을 향해 기관총을 발포한 미군 병사의 처벌을 바라지 않습니다. 만약 그 병사가 노근리를 찾아와 머리 숙인다면 노근리의 유족들은 그를 따뜻하게 맞아줄 준비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월남 양민학살에 대한 한겨레의 진상 조사도 같은 맥락에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까?


지만원 씨는 오마이뉴스 기사의견에 장문의 질문을 적었습니다. 그 질문에 제가 대답할 필요는 없지만 나름대로 답변을 정리합니다.

1) 도대체 무엇이 왜곡된 역사인지 분명하게 해 주십시오. 한국군은 월남에서 양민학살에 관련된 바 없다는 우리 군과 채명신 장군의 주장이 왜곡된 역사입니까? 아니면 지금 <한겨레21>이 왜곡된 역사를 창조하고 있는 것입니까? 지만원 씨의 첫번째 질문은 지금 한겨레21이 하고있는 작업은 그 경중을 묻기에 앞서 우린 군과 채명신 장군에 의하여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눈물겨운 작업이란 것을 인정하시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제 한겨레21을 그만 비난하시기 바랍니다.

2) 다시한번 우리 군의 '양민학살 절대 불가론'이 왜곡된 역사라는 것을 인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왜 30년이 지난 지금인가"라고 반문하기 전에 지난 30년동안 아무도 하지못한 어려운 일을 하고 있는 한겨레21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 주십시오. 만약 30년이 지난 지금이 너무 이른 시기라고 생각하신다면, 이런 생각을 해 보십시오. 지금부터 300년 쯤 지난 다음에 역사를 좀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식견과 도량을 지니게 된 우리 후손들이 한겨레21의 기사와 지만원 씨의 국방일보 칼럼을 같이 읽고는 무어라 생각하겠습니까?

3) 60년대에 육사를 다녔고 70∼80년대에 장교생활을 하셨던 지만원 씨가 국민만큼 훌륭하다고 하는 군은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군의 내란을 감시해야할 보안사령관 위치에서 내란을 주도해 대통령이 된 사람입니까? 최전방 9사단 병력을 서울로 빼돌려 내란을 도운 사람입니까? 그토록 훌륭한 군이 광주에서 헬기 기총소사 까지 하면서 우리 시민을 도륙했습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나라는 징병제를 하고있기 때문에 돈없고 빽없는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군대를 가야만 하지만 이렇게 선량한 젊은이들이 청춘을 조국에 바치는 동안 군의 수장이란 사람이 무기 로비스트와 '부적절한 관계'나 맺고 있는데 누가 군을 국민의 얼굴이라 생각한단 말입니까?

김종수 소위 사건이나 월남 양민학살을 백번 양보해서 돌연변이라 칩시다. 돌연변이는 지금 제 몸속에서도 생길 수 있습니다. 사람몸에 생겨서 생리학적 명령체계를 따르지 않는 돌연변이를 무어라 하는지 아십니까? 바로 암세포올시다. 아무리 작은 암세포 하나라 하더라도 배를 가르는 수술을 해서 들어내지 않으면 종국의 그 돌연변이는 온 몸에 퍼지고 생명을 잃게 할 것입니다. 진정 군이 국민의 얼굴로 존경받고 싶다면 사소한 돌연변이 하나라도 내버려둬서는 안될 것입니다.

4) 지만원 씨의 논리 비약에 치를 떨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줄곧 월남전 양민학살은 '없다'라고 주장하시던 지만원 씨가 돌연 김종수 소위의 양민학살을 '있었던' 일로 주장하고 계십니다. '한국군'을 칭찬하기 위해서 입니다. '한국군'이 칭찬받기 위해서는 평생 살인자의 굴레를 뒤집어쓰고 괴로워해야하는 김종수 소위, 아니 김종수 목사의 인생은 마땅히 희생되어도 무방하다는 것입니까? 도대체 김종수 목사의 보상받지 못할 인생을 이용하는 것은 동아일보 기자입니까, 아니면 지만원씨 자신인가요? 차라리 월남전 양민학살은 "없다"라고 주장하시고 김종수 소위에 대한 군사법원의 판결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십시오. 그편이 덜 추악해 보일 것 같습니다.

5) 한겨레21의 월남전 진상조사 노력에 대한 우리 군이나 정부의 태도를 보면 과연 무엇이 물방울이고 무엇이 물줄기인지 실감할 것 같습니다. 과연 아직도 우리 군은 한겨레 21 같은 작은 잡지사가 어떻게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물줄기 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 옆에 튀어있는 물방울이나 치울 수 밖에요.

저 개인적으로 한겨레21의 구수정 통신원이 월남에서 하고있는 작업과 또 그러한 사죄의 노력을 용서와 이해의 아량으로 감싸려고 하는 월남 국민들의 태도에 눈물을 머금은 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정작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우리군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피해자가 용서할 준비가 되어있고 가해자가 미안합니다 한마디만 하면 되는 상황에서 "있을수 없고, 있어서도 안되고, 사실 있지도 않은…" 식의 답변만 반복하고 있습니다. 설령 그것이 돌연변이적 사건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이상황에서 사죄하고 용서를 비는 것이 우리 국민과 우리 군의 명예에 무슨 누가 되는지요? 아우슈비츠의 원형을 보전해서 역사를 망각하지 않으려는 독일 국민의 노력과 아직도 "종군위안부는 없다"라고 되뇌이는 일본 정부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지적하신 대로 우리군은 거대한 물줄기와 같은 시스템 입니다. 그 시스템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을 때에는 옳은 주장과 바른 목소리는 사소한 물방울로 튀고 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군이 사과를 하지 못하는 진정한 이유는 우리 군에 월남전 양민학살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용서를 빌고자하는 양심있는 군인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설령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상부의 명령이 있기 전까지는 절대로 책임 인정을 하지 않는 우리군의 시스템 적인 모순 때문일 것입니다. 지만원 씨 또한 이러한 우리군의 잘못된 전통과 모순된 시스템을 수정하고자 많은 노력을 하신 분이 아닙니까? 이제 어떤 태도를 취하시렵니까?

지만원씨가 '한국군 어디로 가야하나'에서 부터 줄곧 주장해 오신 시스템의 합리화는 저역시 전적으로 공감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합리화의 가장 기본 조건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정직' 입니다.

다시한번 합리적인 지만원씨로 돌아와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한광희, 2000년 9월 2일 오전 4: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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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선임기자. 정신차리고 보니 기자 생활 20년이 훌쩍 넘었다. 언제쯤 세상이 좀 수월해질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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