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들

오마이 <미국 사는 이야기> 25

등록 2000.09.26 19:59수정 2000.09.28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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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다섯시"
TV 가이드북을 들여다 보던 남편이 말했다. 우리 집하고 전혀 친하지 않은 TV가이드북을 이리 저리 들여다 보는 것은 올림픽 때문이었다.


화요일 오전 열 시부터 오후 다섯 시까지 MSNBC에서 여자 양궁 경기를 방송하니까 아이들 학교 갔다 오면 그걸 꼭 보여 주었으면 한다는 거였다. 한국의 여자 양궁은 메달 획득이 유력한 종목이니까 아이들에게 그걸 보여주고 싶었던 게다.

포카혼타스나 포케몬에 빠지는 아이들에게 롤 모델이 될 만한 한국인들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은 것은 당연한 심사겠지. 한국 기대대로 여자 양궁선수들은 메달을 휩쓸었다.

그러나, 선수들이 인터뷰하는 기본 매너가 부족하고 한국의 취재진들의 무질서한 취재 모습 등 뒤에 남는 이야기들은 얼마 전 내 낯빛을 바꾸어 놓았던 한 순간과 겹쳐져 우리 아이들이 볼까 얼른 신문을 덮어 버렸다.

그건 두 주일 전 큰 아이가 가는 어느 합창반 교실에서였다. 20여명이 모인 그 반에 한국인은 우리 딸 하나였다. 오랜 동안의 공백을 지나 다시 모인 아이들에게 선생님이 물었다.

긴 여름 방학 동안 여행을 다녀 온 사람 있으면 새로운 경험을 함께 나누자면서. 아이들은 앞다투어 손을 들었다.

"플로리다요" "텍사스요" "자메이카요"...


드디어 우리 딸 차례가 왔다.
"한국이요"
"너 한국에 갔다 왔니? 거기까지는 몇 시간이나 걸리니?"
"열 여덟 시간요."
"와-, 제일 멀리 갔다 왔네? 그래, 뭐가 제일 인상적이었니?'
"음-, 쓰레기요."
"!?!"

순간, 피아노를 치며 그 반의 학습을 돕던 나는 얼굴이 노래지지 않았나 싶다. 왜냐면, 나는 딸아이가 또 '에버랜드'라고 말할 거라고 짐작하고 아예 맘놓고 앉아 있었거든.


지난 여름, 딸아이는 한국에 다녀온 이후 이제껏 만난 사람들에게 '에버랜드'에 갔던 것이 제일 재미있었다고 말했으니까. 근데, 하필이면 우리 둘만 빼고는 모두가 타민족 사람들인 자리에서 "쓰레기"가 뭐람.

그렇지만 아이에게 "왜 하필이면 쓰레기니?"하고 나무랄 수는 없었다. 그래, 내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고 해서 아이가 안 볼 수는 없었을 테니까.


내가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아이가 보아버린 것들


<관악산에서>

떡장사와 단속반 :
떡이며 김밥이며 붉은 고무그릇에 이고 나온 아주머니들이 입구 언덕에 늘어서 있다. 단속차가 지나가고 미처 숨지 못한 한 아주머니가 그걸 통째로 빼앗겼다. 한동안 욕설과 밀고 밀치는 실랑이가 벌어지고.

"엄마, 왜 그래요?"
"..."

노점상:
칸칸이 상점을 벌이도록 지어 놓은 건물이 뒤에 분명히 있는데 모두들 그 앞 인도로 나와 번데기며 아이스크림이며, 은행 구운 것들을 판다.

단속 차가 오더니 모두들 안으로 다 들어가라고, 한 번만 더 이러면 장사 다한 거라고 큰 소리를 치고 아주머니들은 주섬주섬 안으로 들여놓는 '척'을 한다.

"엄마, 저기 빌딩이 있는데 왜 여기서 장사해요?"
"제자리에서 하면 장사가 안 되거든."
"?"

쓰레기:
밖으로 나와 버스 정류장에 섰는데 거기 한 구석에 쓰레기가 수북하다.
"엄마, 여기가 쓰레기통이에요?"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난 쓰레기를 거기다 버려도 되는지 묻는다.
"아니. 이리 줘."


<횡단보도에서>

첫째날:
분명 빨간 불인데 사람들이 건넌다.
"엄마, 빨간 불인데 왜 건너가?"
"그래, 빨간 불엔 건너가면 안 되는 거지? 우리, 조금 기다려 보자."
파란 불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건넜다.

둘째날:
파란 불이 켜졌다.
안심하고 막 건너려는데 차가 휙 지나간다.
규칙을 지켰는데 돌아오는 이 배신감이란...
"엄마, 파란 불인데 왜 차가 지나가요?"
"글쎄, 그럼 안 되는 거지?"
"Everybody looks crazy!"

셋째날;
빨간 불이다.
사람들이 건넌다.
우리만 그대로 서 있다.
"엄마, 우리도 그냥 건너가요."
"빨간 불은 무슨 사인이지?"
"스탑 사인. 근데, 다 그냥 가는데..."


<시장에서>

붐비는 사람들 사이를 그야말로 뚫고 지나간다.
누군가 나를 밀치며 내 어깨를 심하게 쳤다.
아파서 어깨를 만지며 찡그리는 내게 묻는다.
"엄마, 많이 아파요? 근데 저 사람은 왜 미안하다는 말을 안하고 가요?"
"아휴, 아퍼라. 글쎄나 말이다."


<전철안에서>

노약자석이 비었다.
아이들을 앉혔다.
"엄마, 여기 앉아." 둘째 녀석이 말한다.
"여기는 할아버지들하고 핸디캡하고 애들만 앉는 거야." 우리 딸이 아주 점잖게 가르치며 묻는다.
"엄마, 근데 저 사람들은 할아버지 아닌데 왜 앉았어요?"
나는 우리 아이들이 앉아 있던 바로 그 노약자 석 바로 위에 노약자 석을 양보하자는 무슨 광고를 읽고 있었다.


<안방에서>

TV 광고시간이다.

세계 인터넷의 중심
e-korea
이제 COMPAQ가 이끌어가겠습니다

"엄마, COMPAQ는 CompuU.S.A.에 있는 거, 그거지요?"
(CompuU.S.A는 애틀랜타에 있는 컴퓨터 전문 매장)
"... 응."


<부엌에서>

할머니가 사다놓으신 ** 강원도 평창 샘물.
아이에게 물을 따라주는데 거기 써있는 광고문안이 눈 안에 들어온다.
"미국 FDA 수질검사 기준 합격"
"일본후생성 수질검사기준 합격"
근데, "한국수질검사기준 합격"이란 내용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휴, 다행이야. 우리 딸이 이걸 안 읽은 게. 다음에 한국에서 이 물을 마실 때는 "한국수질검사기준 합격"으로 충분하길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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