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베트남 노동자의 죽음

이 죽음 앞에 우린 무얼 배워야 하나

등록 2000.10.02 19:20수정 2000.10.03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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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새벽 6시 10분경, 대구시 북구 산격2동 'C정밀' 2층에서 이 공장 노동자인 한 베트남 산업연수생이 목을 매 숨진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청소작업을 하던 용역업체 인부는 현장을 발견하고 관할 파출소에 신고했다. 하지만 이미 연수생은 사망한 이후였다.

베트남인 불법체류자, 벤씨의 자살?

산업연수생은 웬반 벤 씨(35)로 지난 96년 4월 4일 베트남에서 입국한 것으로 밝혀졌다. 벤씨는 산업연수생으로 국내에 입국한 이후 산격동에 위치한 모 섬유업체에서 일하다 연수 기한인 2년을 넘기고 98년 무렵부터는 불법 체류자로 C정밀에서 일해 왔다.

이번 사건을 수사 중인 경찰 한 관계자는 "특별한 외상이 발견되지 않았고, 평소 비관적인 말을 주변 사람에게 했다는 증언이 있어 자살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살로 확신할 만한 유서가 발견되지 않고 있어 오늘(2일) 오후 2시경 사체에 대한 부검을 실시했다. 부검 결과 특이한 사항이 확인되지 않아 경찰의 자살 추정에 무게가 더욱 실려가고 있다.

반면에 평소 벤씨를 지켜본 사람들은 갑작스런 그의 죽음에 대해 의아해 하는 모습이다.

양산대를 가공하는 C정밀에서 평소 벤씨는 주위 사람들에게 조용하고 착실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벤씨와 함께 이 공장에서 일했던 한 동료는 그에 대해 "한국말을 거의 하지 못해 함께 일했던 사람들과도 대화가 별로 없었다. 하지만 회식자리에서도 술을 거의 입에 대지 않았고, 월급을 받으면 고향으로 돈을 꼬박꼬박 부치는 등 착실하고 순박한 사람이었다"고 설명했다.


C정밀의 한 관계자는 "4개월 전에 작업 도중 남(함께 근무했던 사람들은 그를 '남'이라고 불렀다)이 화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해 3개월 정도 치료를 받고 있었다"고 말했다. 당시 벤씨는 양산대에 페인트를 입히는 작업을 하다 건조기에 상처를 입은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이 관계자는 "화상을 입은 상처가 그리 깊지 않았고 최근까지 상처가 거의 아물어 생활에는 불편이 없었다"고 덧붙였다.

그렇다고 해서 함께 근무했던 한국인 근로자들에게 받은 구타나 따돌림 등으로 인한 자살로 보기도 어렵다. C정밀은 영세한 업체로 벤씨를 제외하고 3,4명의 한국인 노동자들이 전부이고 이들 또한 40대 이상의 여성들이 대부분이다.


이 업체 인근의 가게주인도 "(C정밀은)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일하는 곳이고, 평소에도 업주가 공장에서 혼자 숙식하는 그를 위해 반찬 등을 마련해주었다"고 말했다.

또 경찰관계자들도 "화상을 입고 난 이후에도 화상을 입은 상처에 대해 치료비를 업체에서 부담했다"고 말해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대우 등 강압행위에 의한 자살로 보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왜 죽음을 선택했나?

벤씨의 사망에 대한 근거로 경찰이 추정하는 것은 베트남에 있는 '가족과의 불화'가 큰 작용을 했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고향인 베트남에 부인과 딸 하나, 아들 하나의 남매를 둔 가장이었다. 그가 산업연수생으로 고향을 등진 지 벌써 5년이 다 돼 가는 시점에서 부인과의 불화나 가족들간의 문제가 없지 않을 수 있겠냐는 것이다.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도 부인과의 통화에서 언성을 높이는 등 가족과의 불화가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 눈에 띈다.

또 그가 사망하기 하루 전인 지난 달 30일 C정밀 업주에게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C정밀 관계자는 "남이 토요일에 갑자기 베트남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했다. 자신이 모아놓은 돈을 건네주면서 비행기편을 예약해 달라고 했다. 그렇지만 어떻게 그 돈을 우리가 받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돈은 우리가 대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때는 (벤이) 불법체류자 신분이었기 때문에 여권도 없어 출입국관리소에 허가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토요일인 관계로, 그리고 화상 입은 상처를 더 치료하고, 약도 더 타서 고향으로 가라고 권유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벤씨는 돌연 다음날 새벽을 죽음을 선택했다.

'가정불화'와 귀국의 어려움

외국인근로자센터 김경태 목사는 이번 벤씨 사건과 관련해 "수사과정을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외국인 노동자의 경우에는 장기간 외국에 나와서 생활하기 때문에 가정적인 불화가 생길 경우도 높다"고 말하고 벤씨의 경우에도 '가정불화'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짐작했다.

하지만 김목사는 "현실법상 외국인 불법체류자가 고국으로 돌아갈 의지가 있다 하더라도 현실적인 여건은 어렵다. 벤씨의 경우에는 2년 이상의 불법체류기간이 있기 때문에 절차가 까다로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불법체류자는 '도주한 날로부터(관리 업체에서 이탈한 순간) 불법체류기간을 설정해 행적조사, 범칙금 부과 후 출국명령'이 내려져야 본국으로 귀국할 수 있다. 출입국관리소 한 관계자는 벤씨의 경우 "올해 초 자진신고기간을 놓쳤기 때문에 도주 날짜를 98년으로 기산하면 부과금은 500만원 선에 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사건은 가정불화로 인한 심적 충격과 함께 현실적으로 고향으로 귀국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한 것이 벤씨가 결국 죽음을 선택하게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벤씨의 죽음이 우리에게 남긴 것

최근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고용허가제' 입법화와 관련한 논란이 뜨겁다. 일선 업체에서는 고용허가제가 입법화된다면 중소기업이 부담할 인건비 등이 가중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에 외국인 노동자 인권관련 단체의 경우에는 노동자 인권의 향상을 위해서라도 고용입법화에 대한 추진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날 취재 중 만난 한 주민은 '외국인 한 사람 죽은 것이 무슨 가치가 있냐'며 말했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무디어진 우리 사회의 한 일면이다.

하지만 가정불화든, 불법체류자의 신분에 따른 죽음이든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을 찾았을 벤씨와 15만명에 달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우리는 아무 책임이 없는지 스스로에게 반문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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