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하탄, 집값도 역시 세계 최고?

<이효성 칼럼 3> 원룸 한 달 월세가 170만원

등록 2000.09.18 14:55수정 2000.10.17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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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하탄은 대서양 연안의 작은 섬이다. 맨하탄은 허드슨 강과 그 지류인 할렘 강에 의해 미대륙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

그렇지만, 롱 아일랜드와 스태튼 아일랜드라는 두 개의 큰 섬에 의해 대서양의 파고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되고 있는 데다 대서양의 깊은 수심이 섬의 서남쪽으로 이어져 항공모함도 정박하는 천혜의 항구 도시다. 그러니 커다란 무역선들이 오갈 수 있고 따라서 국제무역이 성행하고 상업이 발달해 있다.

우리가 흔히 뉴욕으로 부르는 도시는 뉴욕 시 전체가 아니라 뉴욕 시의 일부인 맨하탄 구를 말한다. 뉴욕 시에는 다섯 개의 구(borough)가 있는데 그 다섯 개 구 가운데 하나가 맨하탄이다.

뉴욕은 때로 넓게 뉴욕 시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좁게 맨하탄 구만을 지칭한다는 것을 이곳에서 알게 되었다. 주소에 도시명이 뉴욕(New York)으로 표기되는 곳은 맨하탄 구뿐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도 뉴욕은 좁은 의미의 뉴욕 즉, 맨하탄을 지칭하기로 한다.

뉴욕은 세계의 수도라고 할 만한 도시다. 국제연합의 본부가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뉴욕은 세계 금융과 상업의 중심지이고, 세계 인종과 종교와 언어의 전시장이고, 세계 예술의 선도자이기도 하다. 과거 미국의 이민자들은 대개 뉴욕을 거쳐 미국에 들어 왔다.

맨하탄은 마천루의 규모와 수로 세계 최고다. 그리고 그 거대하고 무수한 마천루로 상징되는 경제적 규모에서도 세계 최고다. 맨하탄은 다종다양한 박물관의 규모와 수에서도 세계 최고다. 맨하탄은 또 거의 연중 무휴로 잇달아 열리는 문화 예술 공연이나 행사의 질과 규모와 수에서도 세계 최고다.

그런 뉴욕이기에 맨하탄에 거처를 마련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특히 지금과 같이 미국의 경기가 대단히 좋은 경우 금융과 상업과 문화 예술의 중심지인 뉴욕에 일손이 더 필요하게 되고 자연 사람들이 더 몰려들게 된다.


이 때문에 그 무수한 마천루와 아파트와 연립주택에도 불구하고 뉴욕은 거주 공간이 부족하다. 그래서 맨하탄의 부동산 값과 아파트의 임대료가 폭등하고 맨하탄에 거주하려면 엄청난 주거비를 감당해야 한다.

맨하탄에 있는 콜롬비아 대학의 방문교수로 연구년을 보내기로 하고 뉴욕에 방을 구하던 필자도 맨하탄의 아파트 임대료가 비싸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독지가가 기부한 돈으로 짓고 뉴욕시에서 운영하기 때문에 저렴한, 게다가 콜롬비아 대학 근처에 위치해서 더욱 편리한, 인터내셔널 하우스라는 외국 학생이나 학자를 위한 공공 주택건물의 원 베드룸 아파트를 신청했다.

싸다고 하지만 1400여 달러로 우리 돈으로는 150만원이 넘는 돈이다. 그나마 워낙 경쟁이 치열해서 얻지도 못했다. 별 수 없이 맨하탄에 살고 있는 지인을 통해 다운타운에 위치한 그리니치 빌리지라는 곳에 원 베드룸 아파트를 1550 달러에 섭리스(sub-lease)로 한 달 동안 임대했다. 일 개월 동안 맨하탄에 살면서 사정을 살펴본 후 11개월 동안의 거처를 정하기 위해서였다.

뉴욕 소개책자에 따르면, 그리니치 빌리지는 한때 유명한 작가와 화가들이 몰려들어 예술가의 거리로 이름을 떨쳤던 곳이다. 그리니치는 유행가 가사에도 나오는 유명한 워싱턴 광장이 있는 동네다.

게다가 170만원이 넘는 월 임대료를 지급했기 때문에 아무리 임대료가 비싼 맨하탄이지만 상당히 괜찮은 아파트일 것으로 생각해서 세계의 수도 맨하탄에서 멋진 삶에 대한 기대로 부풀었다. 그 기대에 부합하게 아파트의 입구에서 본 외관은 근사했다. 주변도 괜찮았다.

가까이에 한국인이 경영하는 청과상을 겸한 작은 상점도 보이고, 인도인이 하는 뉴스스탠드도 있었다. (뉴욕의 청과상은 십중팔구 한국 사람들이 운영하고, 뉴스 스탠드는 거의 전부 인도인들이 장악하고 있다.) 식당과 이런 저런 가게들도 많고 지하철역도 가까워 생활하기에 매우 편리할 것 같았다.

그러나 아파트의 내부에 들어서는 순간 저으기 실망하고 말았다. 건물이 너무 낡았을 뿐만 아니라 아파트 내부도 아주 비좁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같으면 부수고 다시 지어도 여러 번을 했을 그런 낡은 건물에다가 명색이 원 베드룸이라는 아파트가 화장실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문이 달린 방(bedroom)은 하나도 없고 좁게 일자로 이어진 세 개의 공간(room) - 그나마 비좁은 공간 - 을 구분할 수 있게 되어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마루바닥은 밟히는 대로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냈고, 벽과 천장은 새로 임대할 때마다 다시 칠한 듯 흰 페인트가 덕지덕지 두껍게 여러 번 칠해진 모습을 확연히 드러냈다.

대학생이 된 딸까지 데리고 온 필자로서는 난감했다. 이 때 내게는 적은 돈으로 너무 좋은 집을 기대했었다는 생각보다는 재수가 없어 잘못 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적으로 집을 얻어준 사람의 수고에 감사하기보다는 이런 아파트 밖에 구하지 못했나 해서 그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적어도 임대료에 관한 한 재수없게 잘못 걸린 것은 결코 아니었다.

고급 상점들이 즐비한 그래서 맨하탄의 맨하탄으로도 불리는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내가 지불한 임대료로는 그런 정도의 아파트밖에는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뉴욕 타임즈>에서 아파트 임대 광고를 보고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니치 빌리지와 같은 곳에서 괜찮은 원 베드룸 아파트를 얻으려면 내가 지불했던 돈의 두 배는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맨하탄의 아파트 임대료 사정을 몰라도 너무나 몰랐던 것이다.

맨하탄은 서울이나 동경이 아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대로, 맨하탄은 세계의 수도로 불릴 만큼 세계 최고가 많은 곳이다. 그리고 그 세계 최고는 집세에서는 더 확고한 듯하다. 불행히도 높은 범죄율만큼이나 자랑할 만한 최고는 아니지만. 맨하탄에는 어두운 세계의 최고도 많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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