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의 인간적 고뇌를 읽는다

<악마> 생전에 발표하지 않은 소설 속의 진실

등록 2000.10.24 09:28수정 2000.10.24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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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부활' 등의 소설로 낯익은 톨스토이는 소설가 이전에 사상가, 종교예술가, 도덕가, 교육자라는 수식어를 갖고 있다. 오죽하면 톨스토이즘이라는 고유명사가 생겨났겠는가.

톨스토이즘은 금욕주의와 비폭력 무저항주의, 그리고 인도주의와 무정부주의라는 용어로 설명될 수 있겠다. 우리가 톨스토이를 기억하는 것도 이러한 톨스토이즘의 영향 아래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번에 작가정신에서 나온 '악마'를 접하면서, 이 소설이 자전적 소설이라는 데서 우선 놀라게 된다. 자전적 소설이라서 놀라는 게 아니라, 소설을 통해 드러나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한 남자 예브게니가 톨스토이라는 데서 놀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소설의 기구한 '운명'은 또 한번 한 인간(톨스토이)의 흥미를 자아낸다. 톨스토이가 61세가 되던 1889년 씌어진 '악마'는 의도적으로 발표하지 않은 채 자신이 즐겨 앉아 있던 등받이 의자에 감춰져 있었다고 한다.

생전에 발표하지 못하고 감춰놓은 소설

왜 감춰 놓았을까. 이유는 충분히 인간적으로 짐작할 수 있겠다. 아내 소피아에게 자신의 불륜 사실을 숨기고 싶었겠고, 또 결코 공개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비밀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는 왜 자신의 비밀을 굳이 소설화함으로써, 증거를 만들어 놓았을까. 공개될 줄 뻔히 알면서. 톨스토이의 '참회록'을 한 번 들여다보자.


"나는 그 시절을 돌아볼 때면 두려움과 혐오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곤 한다. 그 시절 나는 도박을 벌였고, 간통을 했으며, 사기꾼이었고, 난잡한 성행위, 거짓말, 도둑질, 알코올 중독, 폭력, 살인 등 손대지 않은 범죄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칭송을 받았다. 동료들은 나를 상대적으로 도덕적인 사람으로 여겼고, 또 지금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톨스토이, '참회록' 중에서)

사실, 그는 '참회록'을 통해 자신의 비밀을 공개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칭송을 받았다"라는 말에서는 대 사상가의 복잡한 심경을 읽을 수 있다. 감추려고 했지만, 결국 감추지 않았던 톨스토이. 자신의 '위선' 또는 '가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용기 앞에서 대 사상가라는 수식어가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악마'는 한 남자(예브게니)의 아내 아닌 다른 여자에 대한 갈망 속에서 자신의 도덕적 고민을 탁월하게 그려낸다.

육체적 욕망으로 인한 한 남자의 갈등

개략적인 소설의 줄거리는 이렇다. 예브게니는 결혼 전 젊은 청년으로서 육체적 욕망을 추스리지 못하고, 한 동네의 유부녀인 스체파니다와 육체적 관계를 지속한다. 그러나 그는 유부녀와의 관계이기에 불편을 느끼고, 아내 리자와 결혼하게 되면서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1년 후 우연히 스체파니다와 마주치게 되면서 그는 그녀에 대한 욕망이 되살아나게 된다. 이로부터 예브게니는 아내에 대한 도덕적 죄책감과 주체할 수 없는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그리고 결말은 비극으로 끝을 맺는데, 특이한 것은 결말이 두 개라는 것이다. 하나는 자신을 정신착란을 가장해 권총으로 자살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욕망의 대상이었던 스체파니다를 권총으로 살해하고 자신은 정신착란에 걸려 파멸하는 것이다.

두 개의 결말 말미에는 똑같이 이런 말을 적어 놓았다.
"만일 예브게니 이르체네프가 죄를 범했을 당시 정신병 증세를 보였다면, 다른 모든 사람들 역시 정신병자인 셈이다. 진짜 정신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은 - 의심할 여지없이, 다른 사람에게서 발견하는 광기의 징후를 자신에게서는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악마'를 읽으면서 이 소설은 우선 이 시대의 남성을 위한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브게니의 내면과 심리가 이 시대의 남성들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톨스토이의 인간적 고민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이 이 소설의 또 다른 매력이 아닐까 한다. 고전이 달리 고전이 아니라는 것, 톨스토이가 괜히 톨스토이가 아니라는 것, 이 모두를 '악마'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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