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판 보리 문둥이를 만나다 '에르주름 다다쉬'

<이색 터미 문화이야기5>

등록 2000.10.25 01:41수정 2000.10.25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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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 터키 문화이야기 다섯번째 이야기이자 마지막 이야기로 이번에는 터키판 보리 문둥이 ‘에르주름 다다쉬’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기자가 터키 에르주름에 머무른 것은 고작 6일 동안이었다. 6일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농사를 짓는 거무튀튀한 얼굴을 가진 사람에서 부자까지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가 있어서 '에르주름 다다쉬-에르주름 사람'이라는 특별한 이미지, 어떻게 보면 이해하기 힘든 개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부터 기자가 나름대로 이해한 터키판 보리 문둥이 ‘에르주름 다다쉬’를 설명해 보려 한다.

에르주름은 우리들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터키 동부 최대의 도시이자 최고의 도시다. 터키가 자리잡고 있는 아나톨리아 반도는 달걀을 눕혀 놓은 길죽한 모양이라고 한다면 수직으로 나누어 절반의 서쪽에는 우리가 익히 아는 수많은 유적지들과 온천들이 있다.

카파도키아니 이즈미르니 연중 전세계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는 유명한 곳들이다. 그러나 나머지 절반 동쪽에는 이름을 내놓을 만한 유명한 곳이 없다. 터키 관광청에서 운영하는 관광홍보 인터넷 사이트에도 보면 동쪽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다. 그러나 그곳에는 서쪽의 어느 도시보다 터키인들에게는 유서가 깊은 도시가 있는데 그곳이 바로 에르주름인 것이다.

정확하게 북동부에 자리한 에르주름은 인구 80만의 대도시다. 적어도 동부에 있어서는 각종 산업 및 교육의 중심지이다. 터키 근국의 아버지 케말파샤의 칭호 아타튀르크(터키의 아버지라는 의미)를 딴 아타튀르크대학이라는 종합대학도 있을 정도다.

그러나 중심도시라고 하더라도 이란 근접 국경 도시들이 다 그러하듯이 유럽에 가까운 서부에 비해 도시화, 즉 개발이 덜된 도시에 속한다. 에르주름은 1966년 대지진 이전까지는 원시상태로 방치된 도시였다고 한다. 1980년 이후 약간씩 개발이 이루어져 지금은 수도 앙카라와 항공노선이 생길 정도로 큰 도시를 이루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까지 밀, 사탕무우, 감자, 알파맥, 그리고 각종 야채를 키우는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거주인의 60%이상이 농업을 하고 있다고 하니 아직도 도시화 초기단계라고 할 수 있다.

에르주름의 역사는 바로 터키인 즉 투르크 민족의 역사와 같이한다. 우리의 역사책에 등장해서 익히 알고 있는 민족이기도 하다. B.C 3세기 중국의 북방에서 건국되어 한나라에 위협적 존재로 여겨졌던 흉노제국이나, 흉노에 이어 스텝지역을 통일하고 투르크계 종족들을 통합한 6세기의 돌궐(이때 투르크라는 정식명칭을 사용하게 시작함)이나 돌궐 제국의 멸망으로 이 지역에서 새롭게 투르크인의 종족적, 문화적 전통을 계승한 위구르 제국이 모두 터키인들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투르크 족은 중국의 북방에서 중국 왕조와, 몽골족과 끊임없이 대립하였는데 13세기 결국 몽골족에게 자신들이 살던 땅을 내어 줄 수 밖에 없었다. 이들은 이때부터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아나톨리아 반도로 들어가면서 제일 처음 정착한 도시가 바로 이곳 에르주름이었던 것이다. 투르키스탄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고 투르크족이 이슬람세계로 재통일 되었던 시기인 대 셀주크 제국의 역사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이슬람의 창시자 마흐멧의 탄신일인 칸딜(10.22)에 기자는 이슬람의 특별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당시 기자가 방문했던 울루사원(Ulu Camill)도 AD1180년 즉 당시에 지어진 건물이었다. 촌구석에 이런 거대한 석조양식의 고건축물이 있다는 것은 놀라왔지만 에르주름의 역사를 대충 알고 나니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가장 먼저 정착한 곳이라고 하지만 투르크인들은 서진을 계속했고 결국 비잔틴의 수도 이스탄불을 점령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정복전쟁과 유럽과의 교역을 추진했기 때문에 이후 에르주름이 쇠퇴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라는 짐작도 된다.

위에서 마흐멧의 탄신일 이야기를 했지만 대부분의 터키인들이 그러하듯 이곳 에르주름 사람들도 90% 이상 모슬렘(이슬람 신도)이다. 하루에 다섯번씩 사원에서 나오는 에잔(코란 독경)소리에 맞춰 무엇을 하고 있는 중이든 자신이 있는 위치에서 가장 가깝고도 깨끗하고 조용한 장소로 가서 기도를 꼭 올린다.

또한 자기가 임의로 날짜를 잡아 단식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때 단식을 하는 사람은 해가 있는 동안은 물도 아무 것도 먹지 않는다. 해가 넘어가야지 비로서 음식을 먹게 된다. 분명 이들도 이슬람의 대축제 라마단(이슬람력으로 9번째 달-양력으로 보면 해마다 날이 바뀜)을 지내고 모든 은총, 자신의 모든 일을 알라의 뜻으로 돌린다. 그러나 중동 다른 국가의 모슬렘들과는 많이 다르다. 즉 이슬람이라는 종교에 의해 지워지는 제약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고 한다.

에르주름 다다쉬란 에르주름 사람들을 일컫는 아주 오래된 애칭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우리의 경우 경상도 사람을 '보리문둥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경우다. 다다쉬라는 말의 정확한 뜻은 본 기자를 안내했던 한국 교포도 잘 모르는 말이라고 했지만 좌우지간 에르주름 다다쉬의 특징은 이렇다.

순진하고, 의리있고 에르주름을 사랑하는 사람, 또는 에르주름 촌사람. 처음에는 현지인들이 우리에게 설명한 말이라 그 말의 뜻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뜻이 와닿지 않았지만) 6일 동안 같이 지내보면서 똑같은 느낌을 받을 수가 있었다. 언제난 손님접대가 깍듯했고, 경제적인 이해관계를 밝히지 않는 의리있는 남자들, 예절 바른 여자들이었다.

우리가 예상했던 이슬람의 사람들과는 분명 많이 달랐다. 남녀관계도 그렇고, 상인들의 모습도 그러했고 많이 달랐다.
보통 이슬람에서 여성은 너무나도 불평등한 지위를 감수하고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최근엔 변화를 보이고 있지만 일부다처제에, 정치에는 전혀 참여할 수 없고, 가사에만 열중해야 하고, 집안에서도 남편에게 우월적인 위치를 내주어야 하고, 외출할 때는 차도르로 얼굴을 가려야만 하고 외간남자와의 접촉이 금지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목격한 일들은 그렇지 않았다. 아주 일찍이 1934년 부터 터키 여인들에게 참정권이 주어졌다. 그리고 어떤 여인들도 강제로 '차도르'를 하지 않아도 된다. 대신에 많은 여인들이 예전 우리네 엄마들이 외출할 때 머리에 스카프를 쓰던 그런 식의 '히잡'이라는 것을 쓴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강제는 아니다. 다만 관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정에서는 남자도 요리를 한다. 잔칫날 맷돌을 갈고 있는 남성을 보기도 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이곳의 남자들이 자기의 아내를 각별히 아끼고, 공공장소에서는 여성에 대한 예의가 아주 정중함을 목격할 수가 있었다. 외식을 나온 한 가족을 보았을 때 남자의 행동이 유럽 사람 같았다. 적어도 내 상식으로는 이런 여성에 대한 지위는 다른 중동의 이슬람 국가에서는 아직 꿈꿀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놀라울 수 밖에 없었다.

터키 여성들의 이런 지위는 바로 터키 근국의 아버지 아타튀르크의 업적이라고 한다. 터키에서 아타튀르크(터키의 아버지)로 불리는 무스타파 케말파샤는 재임시절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그 중에 하나가 '만약 어떤 사회가 남녀 가운데 한쪽만으로 움직인다면 그 사회의 힘은 절반 밖에 발휘될 수 없다. 그러므로 여성들로 하여금 그들의 밝은 눈으로 세상을 보게 하라'라는 주장하에 얼굴과 눈을 모두 가리도록 되어있는 여성들의 차도르를 벗도록 한 일이다.

케말파샤 재직시 여성들을 억압하던 많은 남녀 불평등들이 개선되었으며 그런 과정에서 마침내 1934년에 여성들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주어졌던 것이다. 이것은 신기하게도 그 잘난 유럽의 여성해방운동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무스타파 케말파샤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얘기하기로 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터키의 남녀관계는 이슬람의 그것과는 다르다고 말 할 수 있다.

하지만 여성의 지위를 억압하는 것이 남아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좀더 엄격하게 말하면 전통적 사회의 공통된 모습이지만 에르주름과 같은 시골에서는 자유연애를 할 수 없다. 결혼은 부모가 정해준 사람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하기에 부모의 뜻을 거역하면 자식은 낭패를 당할 수도 있다.

예전에는 심지어 자식이 부모가 정해준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과 사귀거나 정분을 통하면 죽이기도 했다고 한다. 최근에도 그런 사건들이 있었고 뉴스에 나오기도 했다는 것이다. 물론 법적으로 자식을 죽인 부모는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에 교도소에 가지만 교도소에 가더라도 그들은 올바른 일을 했다고 생각하고 감방에 가게 된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고 한다.

여성의 지위가 불안정하다 보니 이런 경우 남자는 대개 문제가 되지 않지만 여자들이 특히 피해를 많이 본다. 물론 남자도 여자의 아버지나 가족들로부터 복수를 당하는 경우가 있지만 여자처럼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다른 대도시나 조금 더 개발된 도시에도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시골의 경우는 아직 이 부분에 있어서는 완강하다.

자유연애가 금지되어 있다 보니 야밤도주 하는 남녀가 당연히 많을 수 밖에 없다. 그러다 잡히기라도 하면 여자는 큰일을 치뤄야만 한다. 기자가 에르주름을 방문한 기간에도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에르주름 방문 첫날 이르판이라는 사람의 집을 방문해 식사를 했다. 이르판 씨의 부인이 식사준비를 하고 상을 차릴 때 옆에서 도와 주던 여동생, 그러니까 이르판 씨의 처제가 있었는데, 기자 일행이 식사를 한 다음 날 그 동네 한 청년과 함께 야밤에 도망을 쳤다.

그 청년은 식사한 날 기자일행이 숙소로 돌아갈 때 마을에서 시내까지 태워준 청년이었다. 한 시간에 한 대의 버스가 마을로 들어오기 때문에 기자일행은 여러 사람을 태우고 다녔는데 우연히도 우리가 정확하게 기억하는 청년이었다.

할아버지, 아저씨만 태우고 다니다가 혈기왕성한 같은 또래의 청년이 타서 요모 조모 자세하게 보아서인지 얼굴을 또렷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이르판 씨의 친구인 렌트카 기사 라흐민 씨가 이 사건에 대해 귀띔해 주었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이번에 도망간 남녀도 그렇고 대부분의 도망 남녀들이 대도시로 가지만, 도망간 남녀 중 일부는 부모나, 심지어 부모의 신고를 받은 경찰에 의해 잡혀온다고 한다.

그때는 둘 다 인생의 험난한 한 고개를 넘게 되는 것이다. 신기하기도 했지만 참 서글픈 일이라고 생각을 했다. 우리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지만 요즘은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말이 보편화되었는데 터키의 청춘 남녀들은 아직도 조선시대에 살고 있었다.

상인들에 대해 받은 인상도 그렇다. 96년 아프리카 이디오피아를 간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한 재래시장을 방문해 한 이슬람 상인의 난전을 구경하다 큰 난리를 치른 적이 있었다.

그때는 KBS 도전지구탐험대라는 프로그램을 촬영하고 있었는데 출연자(개그맨 백재현)가 여러 좌판을 돌아다니며 친해진 원주민 꼬마에게 선물을 사주려고 하고 있었다. 이슬람 상인이 펼쳐 놓은 재생타이어로 만든 샌들을 구경하다, 구경만 하고 사지도 않는다고 싸움이 붙을뻔 했던 것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샌들 한 켤레를 거의 3켤레 값으로 불렀으니 싸움이 나는 것은 당연했다. 그때 느낀 것이지만 이슬람 상인들은 외지인들을 잘 속였고, 무척이나 시끄럽고 말이 안통하는 사람이었다.

다른 여행자들의 말에 의하면 어디 가나 이슬람 상인들은 그렇다고 했다. 하지만 에르주름의 상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식당에서도 그랬고 잡화점에서도 그랬고, 무척 친절했다. 특히 친절한 음식점 종업원들과 주인들 때문에 식사하러 가는 것이 즐거울 정도였다.

식사를 하러 식당에 들어가거나 식사를 마치고 나올 때 종업원들이 콜로냐를 손에 부어준다. 꼴로냐는 값싼 향수의 일종인데 알코올이 잔뜩 들어 있어 손에 닿는 순간 피부가 시원해진다. 터키인들이 가장 즐겨 먹는 음식이 양고기나 쇠고기를 양념을 발라 구운 '케밥'이어서 고기를 자주 먹었는데, 고기를 먹고 나면 몸에서, 입에서 냄새가 계속 남았다. 그때 마다 꼴로냐 덕을 많이 봤다. 좌우지간 내가 가지고 있던 이슬람 장사꾼들에 대한 생각이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에르주름 다다쉬들의 모습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은 술 먹는 것이다. 차를 타고 시 외곽의 도로를 달리다가 길 한 쪽에 차를 세워놓고 그 뒤에 쪼그려 앉아 있는 사람들을 자주 보았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광경이었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그런 광경을 보았기에 더욱 그랬다. 도대체 뭘 하길래 길가에 차를 세워두고 모여있는 것일까? 나중에는 너무 궁금해 현지인 차량 기사에게 물어보았더니 술을 먹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슬람에서는 술을 금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슬렘인 이곳에서 술을 먹을 수 있는 공식적인 장소가 없다. 시내의 관광 호텔 같은 곳이 있지만 현지인들은 잘 이용하지 않고 관광객이나 이용한다. 법적으로는 자유롭게 술을 먹을 수 있기에 의식면에서 많이 변한 도시인들은 술을 즐기지만 아무래도 시골에서는 여전히 종교적인 제약을 더 중시한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에르주름도 현지인들은 시내에서 술을 먹지 못한다. 그러나 동양사람이든 서양사람이든, 어떤 종교를 가진 사람이든 술 맛을 안 사람은 열에 아홉은 다시 술을 먹게 되나 보다. 세계 어느 문화, 어느 소수민족에게도 독특한 술을 만드는 방식이 있고 이를 즐기기에, 그리고 현대는 국가간, 지역간 교류가 활발하기에, 에르주름에도 당연히 술을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들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에르주름의 선조들, 크게 보면 투르크인들의 먼 선조들도 술을 분명 먹었을 것이고 투르크인들도 자신들의 사회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 아니기에 당대의 에르주름 사람이 술로 부터 차단되어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시내에서 자유롭게 음주를 할 수 없으니까 한적한 들판이나 시외곽을 찾는 것이었다.

이들이 즐기는 술도 다양하다. 유럽의 위스키나, 터키와 가장 친한 나라인 독일에서 대표적인 술로 꼽는 맥주, 카자흐스탄과 같은 구 소련 연방과 지리적으로 가까와 많이 들어오는 럼주, 터키판 소주 '락키'등 등. 그 중 터키인들에게 가장 대중적인 술은 '락키'다.

30-40도 되는 락키는 마시면 목이 따가울 정도여서 대개는 절반 이상 물을 타서 마신다. 신기한 것은 이 술은 처음에는 소주처럼 맑은 물 같지만 물이 들어가면 순식간에 우유빛으로 변한다. 물을 타지 않으면 너무 독해 탁 쏘는 것 이외에는 술의 맛을 느끼기 힘들다. 그러나 물이 들어가면 술 맛이 달라진다. 처음 그 술을 먹었을 때 바로 떠오르는 게 있었다. 다들 비슷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고 그대로 표현해보자면 그 맛은 바로 물약 맛이었다. 어릴 때 감기에 걸리면 어머니가 약국에서 사들고 오시던 달지도 쓰지도 않고 이상했던 그런 약들의 맛.

락키는 터키판 소주라고 표현했듯이 바로 터키에서 가장 싸고 대중적인 술이다. 다른 문화에서 유입된 술인지 전통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술이 있다는 것은 이들도 그만큼 술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에르주름 다다쉬란 느낌으로만 알 수 있는 말이었다. 나름대로 이해했다고 하는 지금도 다소 애매한 개념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에르주름 사람들을 옆에서 지켜 보면서 있었던 일들을 자세하게 얘기한 것은 그래야만 과거의 에르주름 다다쉬가 아니라 현재의 다다쉬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부연해서 한가지를 더 말하면 터키인들 특히 시골이라 할 수 있는 에르주름 사람들의 손님접대 문화는 놀랄 정도다. 절대로 자기 집에 온 손님을 그냥 돌려 보내지 않는다. 집으로 들여 식사를 대접하든 '차이'라고 불리는 홍차와 비슷한 차를 대접하든 아니면 집밖에 세워 놓은 채라도 요구르트의 일종인 '아이란' 같은 음식을 대접한다. 그래야 손님이 돌아갈 수 있다. 기자의 일행도 그래서 가는 곳마다 일 때문에 시간적 여유가 없는데 황송한 대접을 받아야만 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시골이라 그런 점도 있지만 에르주름 사람들은 정말로 느낌이 좋았다. 오히려 아프리카 오지를 가서 만난 원주민들보다 순수하고 정감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를 도와준 지릿오유느의 스승 이르판 씨도 후대에는 이름조차 사라져 버릴 지 모르는 지릿을 보전하기 위해 관청의 도움 없이 혼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면서 애써는 분이었다. 그게 돈이 되는 것도, 자신에게 명성을 안겨주는 것도 아닌데, 다만 다른 사람들도 유럽에서 들어온 축구따위가 아닌 자신들의 전통스포츠를 생활 속에서 즐길 수 있기를 바래서 혼신을 다하고 있었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멀리서 찾아온 우리를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않고 끝까지 도와주었던 것도 너무나 기억에 남는다. 큰 것에 욕심내지 않고 자기들에게 주어진 여건과 환경 속에서 만족을 느끼고, 그러면서도 타인에 대한 정성과 배려를 아끼지 않는 좋은 사람들이 바로 에르주름 다다쉬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드가의 다큐멘터리 이야기'의 드가가 제공합니다. '드가(박성호)의 다큐멘터리 이야기'를 방문하시면 다큐멘터리에 관한 풍부한 정보들을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http://myhome.shinbiro.com/~fhuco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드가의 다큐멘터리 이야기'의 드가가 제공합니다. '드가(박성호)의 다큐멘터리 이야기'를 방문하시면 다큐멘터리에 관한 풍부한 정보들을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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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료방송 채널에서 교양다큐멘터리를 주로 연출했, 1998년부터 다큐멘터리 웹진 '드가의 다큐멘터리 이야기'를 운영. 자연다큐멘터리 도시 매미에 대한 9년간의 관찰일기 '매미, 여름 내내 무슨 일이 있었을까' 2016년 공개, 동명의 논픽션 생태동화(2004,사계절출판사)도 출간. 현재 모 방송사에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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