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거서(五車書)>란 말 들어 보셨나요? 소 한 마리가 다섯 수레를 가득 채워 나를 만한 책을 가리키는 옛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상수동에 자리한 헌책방 이름이기도 하고요.
헌책방 <오거서> 앞에 서면 들어가는 문에 판박이로 붙인 귀여운 소 한 마리가 자그마한 수레 다섯에 책을 싣고 노래부르며 나르는 무늬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오거서>에 들어가면 책방 안에 있는 책이 `다섯 수레'나 나오냐고 할 만큼 <오거서>는 자그맣답니다.
그러나 노고산동(신촌)에 자리한 헌책방 <숨어있는 책>은 <오거서> 보다도 작지요. 용산 <뿌리서점>도 <오거서>와 크기는 비슷하다고 할 만한데 <뿌리서점>은 책을 워낙 높이 탑처럼 쌓아올려서 사람들이 책에 짓눌립니다. <숨어있는 책>이나 <오거서>는 책을 가지런히 갈무리해두어 찾아오는 사람들이 책을 살펴보기에는 무척 좋은 곳입니다.
<오거서>는 몇 해 앞서까지 홍대 앞(동교동)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책방살림이 여의치 않아 퍽 외진 곳인 상수동 서강초등학교 앞까지 옮겨 왔습니다-1999년 6월에-. 이곳 앞은 지하철 6호선이 한창 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하철 6호선이 뻥 뚫리면 찾아가기엔 아주 손쉽지만 지금으로선 <오거서> 앞 큰길을 지나가는 시내버스는 2번 한 대뿐이고, 신촌에서 이 앞을 지나가는 마을버스 7번이 <오거서> 앞을 다니는 대중교통 모두랍니다.
교통이 썩 좋지 않아 멀리서 찾아가기는 힘들고 동네 사람들 장사를 주로 할 수밖에 없는 처지죠. 홍익대학교에서 홍대부속초등학교쪽 큰길로 걸어가서 극동방송국 앞을 지난 뒤 와우어린이공원쪽으로 들어가는 작은 골목으로 들어가 끝까지 가면 왼편엔 서강초등학교, 길 건너편에는 상수아파트가 나옵니다. 여기서 길을 건너면-상수아파트쪽으로- <오거서>가 바로 건널목 앞에 있어서, 홍익대학교쪽에서 걸어온다면 이 길로 올 수도 있지요.
이렇게 헌책방 <오거서>를 찾아가면 맨 먼저 `다섯 수레'를 끌며 빙긋이 웃고 노래하는 귀여운 소가 판박이된 문을 만나고 문을 삐익 열고 들어가면 왼편과 오른편에서 옛 물건들이 책손님을 반깁니다.
해도 떨어지고 겨울 들머리라는 `입동'을 맞이한 저녁에 찾아가니 퍽 춥더군요. <오거서> 아저씨는 자그마한 난로 하나를 켜두었습니다. 난로 하나는 작은데 책방 안을 가득 따뜻함으로 채워주고 있습니다. 작은 난로 하나가 작은 헌책방 <오거서>를 따뜻함으로 가득 채우고 있으나 동네에 한길가로 나다니는 사람도 적고 날도 추운 탓인지 책구경하러 오는 손님이 없습니다. 이것참. 내가 찾아갈 때만 책손님이 없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가 "옛날 책을 모으는 사람들은 이미 많이 모았고 요즘 사람들은 옛날 책이든 새로 나오는 책이든 그다지 사 읽지 않으니 이래저래 헌책 장사가 힘들다"는 아저씨 말이 떠오릅니다.
지금 제가 사는 동네-종로구 평동-에도 <연구서원>이란 옛책방(고서점)이 있으나 이곳 또한 여러 시간 동안 책을 보고 있어도 책방을 찾는 이를 한 사람도 보기 힘든 게 요즘 형편이거든요.
<오거서> 아저씨는 사람들이 옛말을 따라 `다섯 수레가 될 만큼 책도 많이 읽고 세상도 폭넓게 배워가며 든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사람은 사람을 가장 두려워 한다"는 말도 있잖습니까. 짐승은 먹이사슬에 따라 두려워 하는 짐승이 있으나 사람은 먹이사슬과 관계없이 풀뿌리부터 맨위 짐승까지 닥치는 대로 먹어치워 무서울 것이 없어서 자기 종족끼리 치고받고 다투며 무서워 한다고요.
이런 일들도 `다섯 수레든 한 수레든' 자기 스스로를 일깨우는 책을 멀리 하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 일을 함께 하고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기 보다 "저 녀석 꿍꿍이가 뭘까? 어떻게 하면 저 녀석 등쳐먹어 이득을 올릴까? 어떻게 하면 저 녀석을 딛고 내가 일등을 할까..." 이런 생각만 하는 탓이 아닐런지. 그래서 사람 사이 정도 사라지고 책은 책대로 안 읽지 않나 싶습니다.
<오거서>에도 <박경리-토지>가 맨 처음 나온 `삼성'판 10권짜리가 있습니다. <김성칠 주해-용비어천가 상·하>도 있고요. 옛책도 많이 다루지만 요즘 나오는 책들도 책장에 가지런히 갈무리해서 꽂아두고 있지요. <오거서>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하나하나 살피면 그냥 지나칠 책 보다 한 번쯤 집어서 꺼내보고 살필 책들이 훨씬 많이 있습니다. 웅진과 창비에서 나온 다른나라 전래동화 모음이 스무 권 남짓 끈으로 묶여 있고 옛 민주화운동 자료-말지와 일반 자료집-도 서른 권 남짓 끈으로 묶여 있습니다.
저는 1949년에 처음 나오고 1950년대에 재판으로 나온 <심훈 전집> 가운데 7번 <시가-수필 "그날이 오면">과 1970년 교학사에서 펴낸 <한글 전용의 실제,문교부 편수관 엮음> <장재성-한글 바로잡이, 운암사(1983)> 세 권을 골랐습니다.
1949년판 심훈 전집은 모두 일곱 권(한성도서주식회사)이라는데 책은 시와 수필을 모은 7번만 들어왔답니다. 요즘 새로 나왔을 <심훈 전집>을 사서 보아도 되겠다 싶지만 심훈 씨 중형(仲兄)인 설성 씨가 머리말을 쓴 이 책이 더 남다른 느낌을 주어 조금 비싸긴 해도 소중히 옛뜻을 헤아려 보고자 집었습니다.
책을 죽 보니 맨끝에 `절필'이라 하면서 "오오, 朝鮮의 男兒여!"란 이름으로 "伯林마라톤 대회에 優勝한 孫,南 兩君에게"라고 쓴 축하시가 있습니다. 이 축하시이자 `절필'글은 `1위한 손기정, 3위한 남승용'이라 하지 않고 1등과 3등한 두 사람을 한데 묶어 `우승했다'고 적었지요. `1등자'만이 아닌 `3등자'도 똑같이 `우승하며 우리 겨레얼을 높였다'고 적었던 지난날. 그러나 이제는 `1등자'만이 있는 듯 다루고 여기는 현실. 안타까와도 우리 모습이고 우리 현실입니다.
책을 다 고르고 나오니 저녁은 더 깊어서 날은 더 춥습니다. 책방에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책방 언저리엔 사람 하나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래. 날이 추워서 다들 집안에만 있겠지' 생각하며 집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날이 풀리면, 그래서 사람들이 책을 보러 나올 만큼 따뜻해지면 <오거서>에도 뭇사람 발길로 가득하겠지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오거서>엔 추운 날에 와도 난로를 따뜻하게 피우고 있어서 걱정없이 책을 볼 수 있는데...' 하는 생각도 듭니다.
덧붙이는 글 | * 시내버스는 2번이 지나갑니다. 시내버스 2번을 타기 어려운 분은 전철로 2호선 신촌역으로 오신 뒤 이곳에서 `서강초등학교 앞'을 지나가는 마을버스 7번을 타고 오시면 됩니다. 찾아가실 때 책방으로 전화(333-3282) 한 통 걸고 찾아가시면 아저씨가 찾아가는 길을 친절히 가르쳐 주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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