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분명 씻어주지 말라고 했데이"

배달된 자장면 그릇때문에 언제나 남편과 다툰다

등록 2000.11.26 23:10수정 2000.12.15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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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자장면을 먹었습니다. 외출에서 늦게 들어온지라 밥을 해먹기도 마땅찮아서 '오랜만에 자장면이나?'하다가 이견 없이 자장면을 먹기로 했지요. 그럴 때면(지금은 아닙니다만, 예전에) 남편은 반드시 단서를 하나 달았습니다.

"그릇 씻어주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렇게는 안 된다."
"하늘같은 서방의 말이 말 같지 않나?"
"거기서 왜 '하늘같은' 이 나오노?"
"별나게 굴지 마라. 자장면 먹고 그릇 씻어주는 사람 니밖에 없을 끼이다."
"안 씻어주는 남들이 이상하지 씻어주는 내가 왜 이상하노."
"어쨌든 튀지마라, 그런다고 중국 집에서 만두 하나 더 튀겨 줄지 아나?"

설왕설래, 암튼 저희부부는 배달 음식을 시키고 난 다음 그 음식이 도착하기 십여분 동안 늘 같은 멘트로 설전을 벌입니다. 그러다 초인종이 울리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배달 온 음식 먹을 준비에 분주합니다.

(모든 음식이 다 그렇긴 합니다만) 특히나 배달음식은 식으면 그 맛이 반으로 줄기에 우리는 식기 전에 열심히 먹습니다. 그렇게 해서 다 먹은 다음 또 설전(?)은 이어집니다.
"내 분명히 씻어주지 말라고 했데이."
"알았으니까 제발 그만해라. 도대체 남자가 그렇게 쪼잔해 가지고는..."

그러면서 일단은 씻기 좋게 음식 찌꺼기를 버리고 싱크대에 담궈 두었다가 남편이 화장실에라도 갈라치면 그 사이에 후다닥 씻어서 복도에다 내놓습니다. 그렇게 눈치보며 할 일은 아닙니다만, 평소에 설거지가 하기 싫네 어쩌네 하면서, 남의 그릇은 잘도 씻어준다는 비아냥을 피하고 싶어서이지요.

사실 그렇습니다. 집에서 해 먹고 난 설거지는 하기 싫어하면서도, 배달그릇을 씻을 때는 정말 기쁜 마음으로 씻거든요. 시골 대학생이 자기 집 농사는 거들지 않으면서 남의 동네 농활은 열심인 것과 같은 심정이라고나 할까요?

어쨌거나, 일본에서 경험한 일이 아니었더러라면 저는 남편이랑 몇 번 싸우다가, 그냥 '그래 나 혼자 씻어준다고 뭐 그리 도움이 되겠어'하며 빈 그릇 씻어주기를 그만 두었을지도 모릅니다.


일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때 저는 한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였는데, 메뉴 중에는 스파게티나 그라탕 등 간단한 식사류도 있었습니다.

때문에, 가끔씩은 걸어서 이삼분 거리의 단골집에 배달을 가곤 했습니다. 나중에 그릇을 찾으러 가면, 빈 그릇은 깨끗이 씻겨진 채 출입문 바깥에 놓여 있곤 했습니다. 물론 일본이라는 나라가 워낙 타인에 대한 배려가 철저하기 때문에, 그것 자체로서는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습니다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렇게 빈 그릇을 깨끗하게 씻어 밖에 내 놓은 사람들은 야쿠자(?)들이었습니다. 제게 배달을 시킨 사람은 그 사무실 안에서 제일 높은 야쿠자였구요. 저는 커피숍 주인에게서 그 이야기를 듣고 사시나무처럼 떨었(?)습니다.

'아이고 무서워라, 다시는 그곳에 배달 가고싶지 않다'고 했더니 그렇게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면서, '사실은 한 달에 한번씩 우르르 와서 커피 마시고 가는 여남은 명의 40대 아저씨들, 그들도 다 직업이 야쿠자다. 그러나 그들이 미스정에게 무서운 행동하지 않았잖아. 일본 야쿠자들, 야쿠자들 사이에서나 무섭고 말고 하지 일반인들에게 뭐라고 하진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야쿠자라는 말을 들은 이상 예전처럼 편한 마음일 수는 없었습니다만) 제가 새삼스레 놀라웠던 것은 그 어깨씨(?)들조차도 일반인들과 다름없는 매너를 가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 어깨씨(?)들 정도라면 그릇을 안 씻어 내놓든, 담배꽁초를 넣어서 내놓든, 음식값을 떼먹(?)든 별무리가 없을텐데 말입니다.

이따금씩 배달그릇을 수거해 가는 중국음식점 배달원의 대형 플라스틱 통을 볼 때가 있습니다. 방금 어느 집 문밖에 내놓았던 걸 거두어 들인 그 그릇들은 자장이 말라붙고, 짬뽕 국물이 흘러 그릇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지경입니다. 음식 찌꺼기만 묻어 있으면 괜찮을텐데, 거기에 나무 젓가락이며, 랩이며, 휴지도 보입니다.

중국집에서는 그 많은 그릇들을 언제 다 씻어 다시 음식을 내올 수 있는 것인지? 집집마다 먹은 그릇들을 씻어서 주면, 중국집에선 한번 더 헹구기만 하면 될텐데, 그렇지 못하고 태산 같은 것을 한꺼번에 씻으려고 하니 가정에서처럼 깨끗하게 씻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그 께름칙함은 우리들에게 고스란히 돌아오게 되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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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이라는 말이 좋습니다. 이 순간 그 순간 어느 순간 혹은 매 순간 순간들.... 문득 떠올릴 때마다 그리움이 묻어나는, 그런 순간을 살고 싶습니다. # 저서 <당신이라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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