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지금 눈 온다!

<미국 사는 이야기 31>

등록 2000.12.19 17:06수정 2001.01.04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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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잠이 달콤한 아침.
"쾅쾅쾅!"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했어.
저렇게 세게 두드리는 품이 은비가 틀림없구나.


은비는 우리 아파트 옆에 옆에 동에 사는 아이야.
"It's snowing! 눈 와요. 눈 오고 있어요. 가연이 아직 안 일어났어요?"

왜 눈이 오면 누군가에게 알려주고 싶은 걸까.
은비는 얼마나 신이 났는지 얼굴이 활짝, 분홍 꽃이다.
아니, 왔다기 보다는 어지러운 바람에 그저 날리는 정도라고 하는 게 옳을 것 같애. 그래도 눈이라고 나도 금방 은비 따라 숨을 훅- 들이 마셨다가는 이내 새어나오는 가는 숨 아래로 맘이 푸욱 내려 앉았다.
눈이 오는 구나...

5년전 겨울 이후, 그래 여긴 한번도 눈다운 눈이 안 왔어.
지난해부터 유난히 눈이 그리웠는데 드디어 어제 눈이 온 거야.
지붕을 살짝 덮고 잔디밭에 앉은 걸 살살 긁어 주먹만한 눈 뭉치를 만들 수 있을 정도였지만 말야.

동그랗게 뭉친 눈이 금방 녹아 버릴까봐 아이들이 냉동실로 열심히 갖다 나르는 모습이라니...

역시나, 흐응~
눈은 이내 그쳤고 오늘은 다 녹아 버렸지만 흩날리는 눈발 속에 분홍 꽃이던 은비의 얼굴은 쉽게 녹아 내리지 않네.
아니, 눈 오는 날 무턱대고 달려가 "눈 온다! 빨리 나와 봐!"라고 말하는 은비의 맘속으로 너희들 얼굴이 자꾸 생각나.


값이 얼만지 상관 않고 선물을 사 주고 싶던 인숙이.
내가 쓰던 물건 손때 지울 일없이 주고 싶던 미경이.
경희야, 너 생각나니? 짧아지는 오바 밑에 감출 수 없던 네 빨간 내복.
그거 가려 주려고 파란 목도리를 떴었는데.

나는 오늘 사느라고 눈물 마르고 가슴까지 말라 가는 삼십대, 그 한 가운데 서서 크리스마스 선물을 챙기고 있다. 어떻게 하면 내 주머니 사정 안에서 가장 큰 효과를 낼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말이지.


선물을 걱정하지 않는다면 더 즐거운 성탄절이 되었을 거라 믿는 42%의 미국인들과 이리저리 나누어 선물 살 돈을 한 데 모아 차라리 어려운 이들을 돕자는 애틀란타 저널과 연말 쇼핑 북새통에 카드 도둑, 선물 도둑 맞지 말라고 주의사항을 적어 돌린 아파트 뉴스레터 속에서. 선물 생각하고 사러 갈 틈도 없이 바쁜 사람들 틈에서.

리치스 백화점엔 어느 때보다 높고 찬란한 크리스마스 트리가 섰다. 낼 모레면 시내의 작은 상점들까지 손님들이 밀어닥칠 테지.
어쩌면 더 못 들어오게 문을 잠가놓고 장사를 하는 곳도 있을지 몰라. 전에 내가 일했던 가게에서처럼 말야.

인숙아, 미경아, 그리고 경희야.
근데, 지금 생각하니까 내가 그렇게 눈이 그리웠던 건 너희들이 그리웠기 때문인 지도 몰라.
아님, 값이 얼만지 상관 않고 선물을 사는 나.
그 때 그 파란 목도리를 다시 뜨고 싶은 내가 그리웠는 지도.

내 옆에도 온통 초록과 빨강으로 포장한 작은 선물들이 놓여있다. 내일은 여기에 가는 리본을 묶으면서 눈 그리운 맘 같이 담아볼까 해.
음-, 여긴 언제나 눈 같은 눈 한번 쏟아지려나.

"어머, 얘!"
"여기, 눈 온다. 지금 눈 와."
이거 다 쓰고 혹시나 살짝 블라인드를 들춰봤는데 눈 오네. 정말 눈 같은 눈이다.
소복소복, 소복소복...

"근데, 얘! 지금 내 얼굴이 분홍 꽃이니?"

덧붙이는 글 | 여긴 언제나 눈 같은 눈 한번 쏟아지려나 까지 써놓고 내일 올리려고 했는데 지금 올립니다. 밤이 매우 깊었지만.
지금, 눈 오거든요. 여기 애틀란타에. 
밤 2시, 눈 같은 눈 내리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여긴 언제나 눈 같은 눈 한번 쏟아지려나 까지 써놓고 내일 올리려고 했는데 지금 올립니다. 밤이 매우 깊었지만.
지금, 눈 오거든요. 여기 애틀란타에. 
밤 2시, 눈 같은 눈 내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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