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독을 땅에 묻으며...

등록 2000.12.28 14:30수정 2000.12.28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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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가에서 쌀과 김치를 택배로 부쳐 보냈습니다. 쌀은 우리 식구가 몇 달은 거뜬히 먹을 정도의 분량이었고, 김치도 커다란 통에 하나 가득 채워져 있어 혼자 들기도 벅찰 정도였습니다.

"한 일년은 김치 걱정 안 해도 되겠다."
맛깔스러운 김치를 보며 괜히 신나 한마디 하지만 아내의 표정이 그리 좋지만은 않습니다. 이 추운 날 손수 김치를 담그신 어머니가 마음에 걸렸나 봅니다.

시골에 전화를 했습니다.
"장모님, 추운데 고생 많으셨죠. 저희들 김치 사서 먹어도 되는데."
"파는 김치가 어디 김친가. 자네 매운 것 안 좋아한다고 해서 약간 싱겁게 했어. 다 먹으면 또 올려 줄 테니 그때 연락해."

수화기를 건네받은 아내는 혼자 작은 방으로 가서 통화를 합니다. 평소 사위 노릇 제대로 하지 못했던 남편이 미워서인지, 아니면 오랜만에 어머니와 단 둘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것인지….

김치가 너무 많아 냉장고에 넣어 둘 수도 없고, 다행히 마당에 흙도 조금 있어 김치를 파묻기로 했습니다. 추운 날씨에 땅은 꽁꽁 얼어 있었고 오랜만에 하는 삽질이 잘 되지 않습니다. 30분 동안 땀을 흘린 후에야 겨우 김치독을 묻을 만큼 파냈습니다.

"어휴 힘들어."
"그럼 그 정도 힘도 안 들이고 김치 먹으려고 했어?"
어지간해서는 싫은 소리 잘 하지 않는 아내가 오늘은 얼어 붙은 땅만큼이나 차갑게 대합니다.

이번 설에도 처가에는 가 보지 못합니다. 본가가 부산이고, 처가가 전주라 명절 때 두 곳을 다 들르기 어려워 처가는 따로 주말을 이용해 내려 가곤 합니다.

장가를 들거나, 시집을 가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인격체 둘이 만나 한 가정을 이루는 것인데도 아직까지 매사에 남자 집안이 우선입니다.
이제는 바뀌어도 될 때라고 생각하면서도 행동은 생각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모의 자식 사랑은 아들이든 딸이든 똑같은데 말입니다.

김치독을 묻고 나서 뚜껑을 덮었습니다. 이제 우리 가족은 내년 봄까지 맛있는 김치를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김장독 묻는 일이 이렇게 힘이 드는 건지 몰랐어. 장인어른께 김장독 묻으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 참에 요즘 유행하는 김치냉장고 하나 선물해 드릴까?"
아내는 아무 말이 없습니다.

아내에게는 좋은 며느리가 되는 것 만큼, 좋은 딸이 되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었을 겁니다. 아내 혼자 하기 힘든 그 일을 이제 제가 나누어 해야 할까 봅니다.

그날 저녁은 김장 김치 하나만으로 풍성한 식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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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에 사는 이주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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