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날, 헌책방에서 배운다

인천 금곡동 헌책방거리 <아벨서점>에서

등록 2001.01.02 08:03수정 2001.01.02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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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이 조그만 헌책방도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어 자기가 살아가는 길을 찾지 않음은 어릴 적부터 굳이 책으로 `삶길'을 찾지 않아도 됨을 온 몸과 마음으로 배운 탓이겠죠. 또한 책을 가까이 하고 많이 읽는다 해도 책만 많이 읽을 뿐 몸가짐과 마음가짐이 엉망이기도 하니 이 또한 `삶길'을 올곧게 다잡아 주지 못한 탓일 테고요.


지금 우리네 아이들은 굳이 책이 아니더라도 `삶길'을 어릴 적부터 올곧게 다잡는 앎과 슬기를 배워가는 아이가 적습니다. 더불어 어릴 적부터 책을 가까이 하는 아이들은 `조기교육'에 몸을 버리고 있지요. 일찍 자라라고 풀을 잡아당기면 어찌 되는지 아시죠? 식물은 일찍 자라라고 잡아당기면 뿌리가 뽑혀 말라죽습니다. 사람은 어떨까요? 사람은 `몸은 안 죽으나' `마음은 죽지' 않나 싶습니다.

우리가 즐겨 찾거나 가끔 가거나 그냥 지나쳐가는 작은 헌책방에서도 `삶길'을 올곧게 나아가고 있답니다. 사람들이 찾아와 책을 보는 매무새를 웃으며 반기거나 `이건 아니다' 싶을 때는 `그러면 안 되요' 하고 딱 잘라 말하며 책 앞에 갖출 예의를 가르치지요. 헌책방 임자들이 무엇을 알겠냐며 당신들 스스로 뒤로 물러서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무 해 서른 해 넘게 수천 수만이 넘는 온갖 사람을 마주하고, 그리고 그들 거의 모두 `책값 깎기와 에누리'를 하고자 애쓰는 실랑이를 벌이기에, 이를 겪어온 헌책장이들임을 생각하면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삶길을 아름답게 닦는 길이 어떠한 길일지 늘 생각하고 고민했을 터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손님'에게는 `아름다움'을 배우고 `못난 손님'에게는 `못남을 이겨내는 길'을 배우니까요.

조그마한 헌책방입니다. 그런데 이 작은 헌책방에서도 올곧고 떳떳하게 살아가며 하늘 부끄럽지 않도록 살아가고 있어요. 그런데 `커다란 지붕' 아래서 으리으리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하늘 부끄럽게 살아간다면? 많이 배우고 책도 많이 읽은 우리들이 하늘 부끄럽게 살아간다면?

새해 첫날을 맞이해 헌책방을 찾아갔습니다. 지난 1992년부터 저에게 좋은 책과 살뜰한 이야기를 안겨 준 인천 금곡동 <아벨서점>을 새해 첫날을 맞이해 찾아갔습니다.

나. 드래곤볼을 보기나 하고...


<드래곤볼>이란 만화가 갓 번역되면서 불티나게 팔리던 때 여러 학교에서는 이 책을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 만화를 보고서 왜 어떻게 문제라고 말하며 보지 못하게 한 교사는 드물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야기하듯 온통 폭력만이 있고 아이들에게 잘못된 성관념을 보여줄 수 있다는 비판도 틀리지 않은 비판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폭력성이 두드러지고 비틀린 성관념이 가득한 만화도 많은데 <드래곤볼>이 그때부터 지금껏 새책방과 헌책방을 가리지 않고 잘 나가는 까닭은 무얼까요?

<아벨> 아주머니가 책방에 <드래곤볼>을 놓았을 때 어느 교사분이 "어떻게 이런 만화를 여기에 둘 수 있느냐"고 따지셨답니다. 이때 아주머니는 "선생님, 이 만화를 보셨나요? 아이들이 만화를 볼 권리를 뺏으면 안 됩니다"하고 대답하셨답니다. <아벨> 아주머니가 <드래곤볼>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따지고 살피면서 아이들이 널리 볼 만한 만화인지 아닌지 가려내는 눈이 없었노라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벨> 아주머니는 `마음에 티 한 점이라도 있으면 근두운을 타지 못한다'는 소박하면서도 아주 뼈있는 진리를 만화 속에 담아내기도 한 만화를 `어설프긴 하지만 자기 눈으로 확인해' 보며 이 만화가 사람을 끄는 힘이 안에 가득 담겨 있음을 느꼈답니다.


이희재, 김수정 씨 만화처럼 우리들이 아프고 힘겹게 살아왔던 시대를 담고 그 안에서 웃음과 즐거움을 주는 살뜰한 만화도 훌륭합니다. 그러나 아픔도 힘겨움도 모르고 자라나고 있는 아이들에게 이희재, 김수정 씨 만화가 살갑게 다가가기는 힘들죠. 지금 아이들에게도 보편성을 갖고 지난날뿐이 아니라 지금 모습과 앞날도 담아내며 또 다른 이야기와 빛을 주는 만화라면 우리가 즐겨 볼 수 있는 만화로 자리매길 수 있습니다. 비록 <드래곤볼>에서 이런 모습을 보기에 안타깝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그만큼 우리 만화가들이, 우리 출판사들이, 우리 문화정책자들이 생각과 행동과 실천과 모든 것이 모자란 탓이기에 우리는 지금이라도 뼈저리게 뉘우치고 거듭나야 하지요.

다. 우리가 낸 책 가운데 `우리 것'이라고 할 만한 책이 얼마나 되는가

<아벨> 아주머니는 `독고탁' 만화가 일본 만화를 베낀 것임을 알았을 때 아주 속상하셨답니다. 저도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는 느낌이었습니다. 이제는 이런 일을 아주 흔하게 듣기에 평론가 김윤식 씨가 일본평론가 글을 표절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그러려니 하고 넘겨듣습니다. 워낙 `우리 스스로' `우리 것'을 엮어내고 나누는 생각도 힘도 없으니까요. `우리 스스로' 일궈낸 `우리 것'이 조금 보이노라 하는 사람도 오래 가지 못해 `변절'이나 `부귀영화와 영합'하는 못난이 꼴을 보이기에 희망을 갖는다는 일이 참으로 힘들더군요.

부산에는 `김영삼' 같은 이도 있으나 `김정한'처럼 올곧은 선비도 있었습니다. 김정한 스승은 "나는 후배들에게 손으로 글을 쓰려 하지 말고 발로 쓰란 말을 곧잘 한다. 비록 얻어 터지는 한이 있더라도 진실을 쓰란 말이다. 돼먹지 않은 자식 여럿 낳아서 부모나 사회를 성가시게 하는 것보다 그저 쓸모 있는 놈 한두엇 두는 게 좋다는 격으로" 하고 말씀했지요.

김정한 씨는 당신이 산 삶을 떠올리면 남긴 문학작품은 얼마 안 됩니다. 그렇지만 어느 작품 하나 빼놓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알찹니다. 바로 자기 `발'품을 팔고 자기 `손'품을 팔아 온몸으로 부딪히고 말공부를 하고 사람을 만나고 겪은 일을 어우르며 올곧은 삶길을 문학 속에 담아냈거든요. 그 문학작품이 역사성이 짙든, 사회성이 짙든, 앞날을 밝히든, 재미있는 이야기이든 늘 아름답고 애틋하게 나눌 수 있는 열매 하나면 됩니다. 이런 열매를 모은 책이야말로 참말로 `우리 것'이라 할 만한 아름다운 책이 아닐까요.

라. "고생은 많으나 그만큼 배우는 세상도 넓다"

<아벨> 아주머니와 일을 돕고 있는 누님이 `나폴레옹'이란 만화 - 일본 것 - 를 보시며 나폴레옹이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산맥을 넘는 일을 이야기 나눕니다. 알프스산맥을 넘는다는 일이 무모한 일이지만 이렇게 고생해가면서 죽을 고비도 넘겨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겠느냐고...

우리가 힘겹고 고생도 많은 삶을 살아간다면 그만큼 배우고 느끼고 깨닫고 얻을 수 있는 앎과 슬기도 많지 않겠느냐고요. 하지만 나폴레옹이 알프스산맥을 넘는 만큼이 못 되더라도 스스로 고통과 고생이란 짐을 안고 세상과 부딪혀 가는 사람들이 나날이 줄어들어서 안타깝다는 말씀을 덧붙입니다. 이 또한 아이들이 어릴 적부터 자기 삶길을 밝힐 수 있도록 부모도 교사도 이끌지 못하는 현실이지요.

이같은 고생을 <아벨> 아드님도 어느새 한 해 동안 해왔답니다. <아벨> 아주머니가 건강 문제로 책방 살림 꾸리기 힘든 탓도 있었지만 아드님도 평일에 부지런히 책방을 꾸리고 있습니다. 아주머니와 달리 아드님은 책손님을 마주하는 일에 서툴기도 하고 `자기 가게'로 완전히 꾸리는 곳이 아니기에 힘든 구석이 더 많을 수도 있겠더군요. <아벨> 책값이 비싸다고, 그렇게 책값을 받아서 무엇을 하겠느냐고 책방에서 떠드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헌책방 책값이 제 아무리 비싸야 새책값 절반도 안 되는데. 새책값 절반도 안 되는 값이 비싸다면 도대체 얼마가 되어야 싼 값일는지...

<아벨> 아드님도 이런 손님 저런 손님과 부딪히고 겪어가면서 고생도 많았지만 그만큼 세상 경험도 많이 했겠죠. 그리고 지난 한 해는 힘들었지만 올 한 해는 지난 한 해 동안 쌓고 얻고 느낀 앎과 겪음을 발판으로 좀 더 거듭나며 좀 더 미끈하고 떳떳하고 힘있게 책손님과 마주할 테고요.

어제만 해도 제가 <아벨>에 있던 네 시간 동안 책값을 문제삼는 손님을 서넛이나 보았습니다. 책값을 문제삼는 사람은 `헌 책'이라고 무조건 한 권에 천 원을 주면 많이 준다는 사람과 자기가 파는 책 - 컴퓨터 실용책 - 이 고작 그만큼밖에 안 나오느냐며 따지는 사람과 새책방에서 파는 2만원 가까운 사전을 7천원이라 할 때 뭐 그렇게 비싸냐고 놀라는 사람... 들이었습니다. 2만원짜리 사전을 헌책방에 팔 때 7천원은 받아야 한다고 하면 아마 그 사전을 팔려고 하는 사람은 그보다도 더 받으려 하겠죠?

마. 한갓질 수 있는 마음

<한길역사기행1(1986)> <하나와 둘이,시공사(1996)> <윤기현-정의의 예언자 아모스,풀빛(1986)> <민요집성,연변인민출판사(1980)> <장태진-국어변말사전> <말살된 묘비-여자정신대,지평(1990)> <윤석중-날아라 새들아,창비(1983)> <정병욱-한국의 판소리(1981)> 들을 골랐습니다. 책을 고르자면 읽어서 함께 느끼고 배우고픈 이야기가 가득한 책도 더 많았으나 그 많은 책을 다 제 것으로 삼기 어렵겠다 싶어서 그냥 만지작거리다 제자리에 꽂아둡니다.

새해 첫 날이라 그런지 처음 <아벨> 문을 열고 들어설 때는 책손님이 없고 아주머니와 누님은 난로가에 앉아 한갓지게 책을 읽고 계시더군요. 한갓지게 책을 보시고 도시락으로 싸온 낮밥을 조금 늦게 드시고 난 뒤인 네 시가 넘어서부터 손님들이 물밀듯 들어오더군요. 다들 아침과 낮 시간은 식구들이나 동무들과 조촐히 보내고 찾아왔겠죠.

<아벨>이나 인천 금곡동 헌책방거리 사람들은 이렇게 시간대에 따라 한갓짐과 바쁨을 마주합니다. 이렇게 바쁘다가도 저녁참이 되면 한갓지죠. 그렇게 한갓질 때 자기를 살찌우고 이끌어주는 책을 가까이 하기에 책방에 `책'을 찾아오는 사람과 푼더분히 이야기를 나누고 조촐하게 이야기를 나누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책'이 아닌 `헐값에 넘겨지는 물건'을 찾으러 오는 사람에게는 따끔한 꾸짖음 한 마디를 던질 수 있고요. 스스로 책 값어치를 깎아내리면 그책은 제 빛을 읽게 마련이죠. 스스로 `책 아닌' `헐값에 넘겨지는 물건'을 사드는 사람이 `책을 제대로 읽겠'습니까? 절대 아니지요. 그 사람이 읽는 건 `처세'요 `자기 합리화'일 뿐입니다.

어제 <아벨>에 오랜동안 머물며 이야기도 나누고 책손님도 구경(?)하며 여러 책손님 모습을 보았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여러 아이들 가운데 어느 아이는 자기가 본 책을 아무데나 내팽개치고 다른 책을 뽑아서 보더군요. 하지만 어느 아이는 자기가 뽑아든 책을 다 보고는 다시 그 자리에 꽂아 놓습니다. 두 아이는 어떻게 다를까요? 분명 세상 경험도 짧고 세상에서 살아간 나날도 짧은 두 아이일 텐데 어떻게 그처럼 다르게 행동할 수 있을까요? 어느 아이는 날 적부터 `버릇없음'을 타고 나서 그랬을까요?

부모와 이웃사람들이 아이에게 모범이 될 수 없다면 아이도 아름답게 자랄 수 없음을 헌책방에 와서 다시금 느낍니다. 부모와 이웃사람이 아이가 보기에도 아름답고 모범이 된다면 아이도 온 몸과 마음으로 따라 배우고 자라지요. 우리는 지금 아이들에게 모범이 되지도 못하고 아름답지 못한 어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왠 줄 아세요? 지금 아이들이 말도 엉망으로 쓰고 행동도 문제가 많고 청소년범죄가 장난이 아니다고 하니까 그러지요. 그 아이들이 하고 있는 잘못을 다 누구에게 보고 배워서 하고 있겠습니까?

덧붙이는 글 | [인천 금곡동 아벨서점] 032) 766-9523

* <아벨서점>을 가려면 서울에서는 국철(1호선)을 타고 `도원역'에서 내려서 동구세무서-영화여상쪽 길을 따라 가시거나 `동인천역'에서 내려서 누비가게 골목을 지나가면 됩니다. 인천에서는 `배다리 헌책방골목' 하거나 `금창동(금곡동-창영동)' 이야기를 말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지요. 문여는 시간은 낮 1시 30분부터입니다 *

덧붙이는 글 [인천 금곡동 아벨서점] 032) 766-9523

* <아벨서점>을 가려면 서울에서는 국철(1호선)을 타고 `도원역'에서 내려서 동구세무서-영화여상쪽 길을 따라 가시거나 `동인천역'에서 내려서 누비가게 골목을 지나가면 됩니다. 인천에서는 `배다리 헌책방골목' 하거나 `금창동(금곡동-창영동)' 이야기를 말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지요. 문여는 시간은 낮 1시 30분부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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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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