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쓰는 편지> 영암 쌍계사터 돌장승 이야기

신년의 첫 답사에 말하지 않는 돌장승과 친구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등록 2001.01.03 00:48수정 2001.01.05 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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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 발 걸음

신년의 첫 여행지를 선택한다는 것이 사실 적잖은 부담으로 다가왔다. 목표로 삼고 있는 호남지역 문화유산에 관한 관광안내서 두번째 권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목적 있는 여행이 옭아매는 그런 중압감을 스스로 채웠음에도 게으름까지 동했던 탓이었다. 그런 나의 마음을 단도리할 수 있는 코스는 변덕스러움을 잡을 수 있는 대상물이 적격인데 무엇일까 두리번거리다 마음을 정했다.

바로 세월의 이끼를 더해 가고 있는 장승을 찾아가는 것이다. 얼마전 친구와 얘기했던 천년의 이미지와도 상응하는 훌륭한 코스가 되리라는 확신과 함께.

그래서 첫 답사지로 이미 마음 속에 그리워했던 영암군 금정면의 쌍계사터로 가는 것으로 정했다.

수년 전 빗속에서 어렵사리 찾았던 기억이 있는 그곳은 비록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지만 영암군이 국도 13호선의 나주와 경계선에 자랑스럽게 세워둔 장승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 오솔길
정겨운 이 길을 따라 가면 괘불지주와 석축이 있습니다.
ⓒ 전고필
사람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는 원시림과 그 숲 덩굴에 가려진 계곡의 아름다운 모습들이 언제나 눈에 아른거려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이 항상 있었지만 발걸음이 쉬 내키지 않았던 터였는데 새해 첫날은 일년의 향방을 결정한다는 보편적 정서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좀 찌푸린 날씨를 뒤로 하고 오후 두시반 경에 광주를 출발하였다.

쓸쓸하고 고적한 폐사지에서 한 쌍의 장승이 서로를 응시하면서 인고의 세월을 보내는 모습을 보면, 그 비 내리던 날 느꼈던 마음의 감흥이 아직도 내 몸에 흐르고 있으니 그들 앞에 서더라도 낯설거나 두려워 하는 마음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고적한 겨울 산의 정취와 사각거리는 낙엽의 속삭임을 기대하며 길을 나선 것이다.

광주에서 가는 길

광주에서 그곳까지 가는 길은 남평에서 819번 지방도를 선택했다. 바른 길로 13번 국도를 이용하여 영암읍에서 다시 지방도로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보다는 언제나 꼬불거리지만 정감이 묻어나는 지방도가 내게는 어울리는 길이라는 생각으로 봉황을 지나 세지의 양곡에서 23번 국도를 타고 장흥 방향으로 달렸다.

남평에서 도합 30여킬로미터를 가니 인곡 저수지가 나온다. 저수지의 상류쪽으로 시멘트 포장이 된 길이 나타나고 그 길을 따라 2킬로미터를 더 가니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아직은 도회의 화려한 문화가 덜 미친 마을의 정경은 장작더미들이 집 앞에 있고 굴뚝에는 연기가 나는 집들, 허물어진 외양간으로 하품을 하는 소들이 있는 마을의 풍경을 흘깃 보면서 사시는 분에게는 죄송하지만 일견 고맙기까지 하는 도회지 사람의 사치스런 마음이 든다.

마을의 제일 위쪽까지 차를 타고 올라 리어카가 갈 정도의 비포장 길이 나타난다. 차를 이곳에 주차하고 비포장의 흙 길을 따라 500미터 정도 걸어가니 그리던 계곡이 나타난다.
이곳에서부터 오솔길을 따라 500여 미터를 가면 무덤덤한 모습의 돌장승을 보게 되는 것이다.

계곡의 아름다움

▲ 쌍계사 계곡
아직 가을을 담고 있는 조그만 개울의 모습 ⓒ 전고필
마음은 벌써 설레임으로 가득했다. 군에 간 동생 면회를 가는 기분만큼 어서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지난번에 비 때문에 물이 불어 제대로 보지 못한 계곡을 타고 가기로 결심하고 계류를 택했다.

아직 사람들의 손길을 덜 탄 계곡에 혹여 남아 있지 모를 어떤 흔적이 또 욕심이 났던 것이다. 차분히 계곡을 오르니 개울 물 속에 남아있는 가을의 흔적 단풍과 푸르른 이끼들이 더욱 빛나 보이는 경관이 눈에 들어온다.

얼마 전 머리에 노랑 브릿지를 하고 학교에 갔을 때 나를 가르쳤던 교수님들이 한참 놀라면서 나더러 머리에 물들였냐고 물었을 때 내가 준비해 뒀던 말이 생각났다.
"가는 가을이 아쉬워서 머리에 단풍을 담았습니다."

아마 이 개울도 가는 가을의 아쉬움을 담고 있는 것 같다는 동병상린의 교감을 하면서 여울 사이를 살피니 석창포가 또 눈에 들어온다.

늘 푸른 자태로 물살이 센 곳에서도 뿌리를 드러내며 지탱하는 강인한 녀석의 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니 그 사이에 상수리 하나 떨어져 뿌리를 내리고 있는 모습까지 눈에 보인다. 과연 이 상수리의 운명은 이 겨울에만 유효할 것인지, 아님 창포의 그 단단한 뿌리와 상수리의 활착력으로 거센 폭우와 쏟아지는 물줄기를 이겨낼 것인지 의문스러웠지만 상생의 경외스러움으로 간직하기로 하고 걸음을 재촉하였다.

우리는 겨울을 맞아 몸을 움추려대지만 이 계곡은 또 생명을 키워내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계곡을 타고 상류로 거슬러 오르니 군데군데 석축이 보인다. 사람의 흔적이다. 이곳에 사람이 살았음을 느끼는 공간이 시작된 것이다.

그다지 높지 않은 산자락이지만 계곡이 사뭇 깊어서 곳곳에 이런 석축을 한 흔적이 나타난다. 거센 물길이 길을 훔쳐내는 것을 막기 위한 준비였을 것이라는 예단을 가지며 드디어 금강역사상 같은 장승을 만났다.

장승에 담은 마음

몇 해 만인데도 변치 않는 그의 모습에서 신실한 믿음과 안도의 마음이 교차한다. 이 깊은 산골에서 벗이라곤 오로지 양옆의 삼나무와 지나가는 비와 바람과 하늘의 구름, 달, 별뿐인데도 외롭고 지친 기색조차 없이 서로를 주시하며 서 있다.

▲ 주장군과 당장군의 모습
절로 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는 두 장군의 위용
ⓒ 전고필
장승이 이렇게 절의 입구에 서 있는 것은 여러 가지 생각을 부여한다. 여기서부터 부처님의 세상이라는 것을 알리며, 그 신성한 영역에 사악한 것은 오지 말라는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마치 사천왕의 모습과 같이 우락부락한 모습으로 길섶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원래 장승의 기능이 이런 불가의 세계에 몸담고 있지는 않았다고 한다. 농경의 사회에서 장승은 솟대와 더불어 원시시대의 지배이념에 부합하는 신앙의 한 형태로서 위상을 지녔지만 불교가 힘을 가지면서 자연스럽게 사찰로 습합된 부분이 있다.

그러나 어차피 문화는 다양함 속에 변화 발전하는 법, 장승의 신성을 불가에서 다 차지할 수는 없었다. 마을과 마을 사이의 경계를 표시하고, 여기에서 한양까지의 거리를 몸에 달고 있는 이정표로서의 기능,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기능, 잡귀를 물리치는 벽사의 기능들은 다 가져가지 못했던 것이다.

덕분에 부안의 서문안 당산, 동문안 당산이 돌 솟대와 더불어 서 있는 것이고, 장흥의 방촌에도 장승이 서 있고, 진도의 덕병리에도 마을 어린이를 닮은 듯한 장승이 서 있으며, 경기도 광주의 엄미리와 그 일대에는 나무를 단순하게 깎아 만든 형태의 장승이 존재해 있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그 장승은 한국의 심벌처럼 널리 사용되어 지기도 했으며, 대학가에서는 당대의 염원을 담은 민족해방, 민족통일등의 대장군·여장군들이 예전의 역할을 승계하며 건재해 있는 것이다.

출중한 돌장승의 외모

하여튼 오늘은 오로지 이 한 곳에 집중하기로 하였으니 여유가 있어 넉넉하게 장승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 당장군의 얼굴 ⓒ 전고필
안내판에 나온 글을 보니, 당장군의 키는 247센티미터이고, 주장군은 345센티미터라고 하는데 역시 주장군이 덩치도 있어 보이고 더 무서워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둘을 찬찬히 뜯어 보면 이제 무서운 사천왕 같고, 수문장 같은 이미지는 사라지고 둘 다 털벙거지 같은 모자를 쓰고 있는 모습에서 마치 제주의 돌하르방을 보는 듯하다.

특히 당장군의 모습은 내가 병장이었을 때 가끔 삐딱하게 쓴 모자처럼 위로 치며 올린 듯해서 웃음이 살포시 나오기도 한다. 주장군과 당장군의 사진을 몇해전 찍어두고서 서로 헷갈린 적이 있어 이번에는 비교를 하면서 살펴본다. 우선 이마의 주름이 차이가 있다.

주장군은 이마의 주름이 크게 두 개로 나뉘어져 있고 긴 원형인데 당장군은 V자 형태로 6개의 주름이 잡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장군은 치과 의사들이 좋아할 법한 고른 이빨을 가지고 있는데 당장군은 합죽이의 모습이다. 이빨을 생략한 듯하다.

또 주장군은 수염이 일자로 가지런히 배꼽이 있는 곳까지 내려왔는데 당장군은 뭉뚱하게 있는 듯 없는 듯 생략해 버렸다. 그렇다면 남자와 여자일까 생각해 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을 것이고 주장군이 아마 형님뻘 된다고 하면 맞을 성싶다. 덩치도 그렇지만 턱이 올라가고 이빨을 드러내고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는 것이 웬만한 귀신은 겁먹기 딱 좋은 모습이다.

하지만 또 뜯어보면 주먹코에 퉁방울 눈에 이빨까지 각각 부각시켜 놓은 것이 좀 아심찮은 느낌이다.

▲ 주장군의 얼굴
ⓒ 전고필
당장군은 아래쪽의 턱이 생략된 듯 해서 찬찬히 보며 이매탈과 같은 느낌이 들 정도이다. 이 또한 퉁망울 눈 위에 주름이 치켜세워지지 않았다면 쉽게 친근해질 모습이지만 자못 엄숙하고 사색적인 풍취를 남겨준다.

자연석으로 머리 부분에만 정을 대고 꾸며내면서도 고개를 약간 숙이는 듯 하면서 눈을 근엄하게 내려보고 있는 주장군의 호기나 반듯하게 서 있으면서도 이마의 주름으로 위압감을 부여한 장승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남원 주천면의 호기리의 장승이나 운봉 서천리의 장승. 실상사 앞의 장승들이 인접한 운흥사나, 불회사 등의 장승보다 가까운 사촌간이지 않는가 싶은 생각까지 가지며 절이 없어진 흔적을 찾아 오솔길을 올랐다.

오솔길은 무슨 연유인지 잘 다듬어져 있었다. 가끔 인기척에 놀란 꿩이 푸득이거나 산토끼가 뛰어서 오히려 나를 더 놀라게 하기도 했지만 서걱거리는 낙엽을 밟는 소리가 정말 운치있어 좋았다.

시냇물의 합창 소리도 내 엷은 귀를 파고들었다. 한참을 오르니 괘불지주가 눈에 띄었다. 자연석에 구멍을 두 개씩 파낸 것이 쌍을 이뤄 3미터 정도의 간격을 두고 있었다. 나무 등걸에 이미 쓰러진 것도 있지만 모진 세월을 이겨내고 이만치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의미있게 다가왔다.

내친 걸음에 길이 끝나는 곳까지 걸어 보았다. 이번에는 어느 건물의 받침돌이었을 법한 위쪽은 짧고 아래쪽은 넓직한 2미터 정도의 돌이 눈에 들어온다. 간격으로 보아 어느 문의 받침돌이었을 법하다는 상상을 하면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대숲 사이를 헤치고 돌아왔다.

답사를 마치며

억지처럼 내 설날이 아니라고 우기면서도 짐짓 달력에 맞춰 의미를 부여할 수밖에 없는 그런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항전의 역사를 살아왔던 옛 사람들의 숨결을 그나마 느낄 수 있는 흔적으로서 폐사지의 장승과 이 땅 사람들의 삶의 숭고한 염원을 담았던 또 다른 형태의 한 신앙과 그 신앙을 현실에 잘 이용한 조상들을 생각해 보았다.

변치 않을 것, 변하지 않는 것, 과연 무엇일까? 저 석인들은 내 후손들에게도 변치 않는 모습으로 조용히 자신들의 염원을 얘기해 줄 것인지... 나는 또 내가 지향하는 바대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인지.

내 숙제와 같은 답사의 시작은 이렇게 막을 올렸다. 이제는 그 고적한 쌍계사의 장승을 내 친구처럼 삼고 자주 만나 위안을 받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덧붙이는 글 | 쌍계사는 신라 문성왕(854년)에 창건했습니다만 그 이후 어떻게 없어지게 되었는지는 알수 없는 형태로 터와 장승과 몇개의 석물만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쌍계사는 신라 문성왕(854년)에 창건했습니다만 그 이후 어떻게 없어지게 되었는지는 알수 없는 형태로 터와 장승과 몇개의 석물만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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