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광화문 근처에서 약속을 잡게 된다면, 엉뚱한 곳에서 만날 필요가 없어졌다. 더위도 추위도 없다. 애꿎게 커피숍에 들어가 커피를 주문할 필요도 없다.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이 문화공간인 '광화문 갤러리'로 재탄생했다. 아늑하고 포근한 지하철 옆 미술관. 입장료도 없고, 붐비지도 않는 '광화문 갤러리'에서 예술작품들을 구경하다 보면,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마저 행복해진다.
5호선 광화문 역은 이전부터 일반 시민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둘러볼 수 있는 문화공간이었다. 그러나 뻥 뚫린 공간, 이름도 없는 전시장, 허술한 관리 등으로, 좋은 작품들이 전시되어도, 일반인들은 지하철 광고를 둘러보듯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다.
좀더 효과적으로, 좀더 효율적으로. 광화문 역은 대대적인 성형수술을 받았다. 공간과 공간, 선, 면, 유리. 수술 후에는 '광화문 갤러리'라는 그럴싸한 이름도 부여받았다.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약속시간보다 먼저 온 사람들,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 전시작품들을 보기 위해 일부러 찾아온 사람들은 미술관에 발을 들여놓으며 새삼 놀란 눈치다. 인사동의 유명 미술관이 부럽지 않은 독특하고 풍부한 예술작품들이 시민들을 찾아온 것이다.
'서울의 화두(話頭)는 평양'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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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오 윤의 <원귀도> ⓒ 오 윤 |
'광화문 갤러리'의 '처음'을 장식한 작품들은 어떤 주제 아래 열리고 있는 것일까?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남과 북의 관계를 새로운 비전과 시각으로 바라본 작품들이 1월 29일까지 '광화문 갤러리'에 전시될 것이다. 사진, 회화, 비디오, 공예, 퍼포먼스에 이르는 다양한 작가들의 개성있는 작품들을 대하고 있으면, 남과 북, 서울과 평양이 창작과 예술이라는 미로를 통해 어떻게 화합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의 최효준 전시과장은 젊은 대학생들에서부터 이미 작고한 화가들까지 다양한 작가들을 섭외했는데, 그 이유는 보다 넓은 남과 북의 프리즘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요즘의 젊은 사람들은 남과 북의 관계에 대해, 통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하는지, 남과 북의 화해무드조차 상상하지 못하고 이미 세상을 떠난 화가들의 옛 작품에 묻어있는 남과 북의 이미지는 어떤 것인지, 북한을 다녀온 작가들, 그렇지 않은 작가들의 세계는 얼마나 다른지, 한국인이지만 한국에 살지 않는 동포예술가들은 얼마나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광화문 갤러리'에서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광화문 갤러리'에서 제일 처음 접하게 되는 작품은 손승현 씨의 <그늘진 낙원·분단시대>이다. 나침반과 자석, 아크릴 판으로 표현한 김승영 씨의 <하나'ONE'>은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여 나침반 바늘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그로 인해 정지된 일률적인 사고의 전환을 유도한다고 한다. 즉 원(ONE), 하나의 조국을 유도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아닐까?
원색의 칼라, 사실적인 묘사, 작고한 오윤 씨의 <원귀도>는 유채로 그려진 원본을 축소, 전사해서 전시되고 있다. 원본의 일부분만이 전시되어 있지만, 그가 표현하려고 했던 전쟁의 참혹함은 유채물감처럼 선명하게 눈을 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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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박찬경 씨, '리빙 데드'인 냉전의 풍경 ⓒ 배을선 |
2000년 한 해를 달구었던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박찬욱 감독의 동생 박찬경 씨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진작가이다. 그는 남양주에 마련된 영화세트장을 사진으로 표현했다.
'리빙 데드'인 냉전의 풍경, 아무도 없는 판문점. 단지 영화 한 편을 위해 만들어진 건축물이지만,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혹은 발산하고 있는 의미라는 것은 분단의 아픔, 그것을 뛰어넘는 것이다. 정지된 구조물과 정지된 사진이 보여주는 차가운 이미지는 움직이는 영화 속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차가움과 냉혹함을 맛보게 한다.
실크노방, 신문기사, 바느질, 그리고 꼴라쥬. 한 공간을 지나, 다른 공간으로 이어지는 곳에는 이정희 씨의 작품 <어머니>가 있다. 백(白)은 남을, 적(赤)은 북을 상징하는 색깔, 우리는 아무런 저항없이 색깔의 구분에 학습되어져 왔다.
박강원 씨의 열 여섯개 그림들은 정겹다. 북한의 이미지들을 표현한 것 같은 열 여섯개의 그림 중에는 남한의 일상적인 모습을 그린 두 개의 그림이 자연스럽게 섞여 있다. 굳이 두 개의 그림을 색출(?)하려고 하지 않는 한, 열 여섯 개의 그림들은 서로 어울려 있을 것이다.
'광화문 갤러리'에서는 쉽게 구할 수 없는 동영상도 쉽게 볼 수 있다. 바로 재미교포 다큐멘터리 작가인 크리스틴 최의 작품 <두 개의 한국>이다. 작가는 1991년, 59분짜리 16mm 다큐멘터리로 두 개의 한국을 세계에 알렸다. 삼팔선으로 갈라져 있는 두 개의 한국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이질적이 되어간다.
당시 미국의 교육방송으로 상영되어 호평을 받은 크리스틴 최는 홍콩대학의 교수로 재직중이다. 그의 한국 이름은 최명혜. 크리스틴과 명혜라는 이름의 이질감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문득 스치는 호기심. 어쩌면 한국은 두 개라는 큰 덩어리들이 작은 덩어리들을 양산해내고 있지는 않은가? 한국을 떠나 있는 한국인들의 또 다른 한국. 이런 상념들을 접하게 되면, 레이몬드 한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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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레이몬드 한의 <백두산 도시계획 2015> ⓒ 배을선 |
2000년 여름, 개인전을 연 레이몬드 한의 독특한 디지털 작품들은 레이몬드 한의 정체성을 엿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는 작품 속에서 한국 밖에서 살아가는 한국인들의 세계를 정체성이라는 굴레를 극복한 이미지로 표현해 냈는데 이번 '광화문 갤러리'에서 만난 그의 작품도 세련되고 국제적인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는 <백두산 도시계획 2015>라는 작품으로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의 도시의 꿈을 표현했는데, 2015년의 백두산이 얼마나 변해 있을지가 궁금한 사람이라면 그의 작품을 놓치는 실수는 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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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석영기 씨의 <팔광도연작> ⓒ 석영기 |
석영기 씨의 <팔광도연작>은 컴퓨터판화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은 성공한 대북포용정책으로 평가되는데, 김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일반 대중이 쉽게 접할 수 있는 교통표지판으로 친숙하게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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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계영, <통일, 그 이후 박제가 된 언어들 ⓒ 배을선 |
북괴, 남침, 괴뢰... 대북정책... 통일 후에는 더 이상 쓰이지 않을 단어들, 작가 송계영은 <통일, 그 이후 박제가 된 언어들>을 에폭시와 아크릴로 재미있게 표현했다.
'광화문 갤러리'를 가득 채우는 사진들은 월간 <말>지 기자였던 임종진 기자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들이다. 그가 찍은 북한의 일상들은 150여개의 슬라이드로 감상할 수가 있다. 양서유치원 기린반의 유아들은 '친구들'이라는 주제로 그림과 딱지를 이용해 작품을 만들었다. 당장은 미술시간에 만날 수밖에 없는 북쪽의 친구들이지만, 그들과 함께 공부하고 함께 뛰어 놀 수 있는 시간은 언젠가 올 것이다.
마지막으로 '광화문 갤러리'의 가장 큰 특징은 일반 시민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임옥상 씨의 작품 <디엠지(DMZ)를 날다>와 정병례 씨의 <발길>은 시민들이 직접 스티커를 붙여서 작가와 함께 작품을 완성할 수 있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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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윤성, 정지웅 <풀리고, 묶이리라> ⓒ 배을선 |
'광화문 갤러리'는 시민들의 갤러리이다. 그것은 싸구려 갤러리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웃집 정원같이 아름답고 친숙한 미술관이 시민을 위한 장소인 만큼, 시민들도 제대로 된 문화의식과 주체의식을 가지고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전직 대통령의 이름을 딴 '000기념관'보다는 시민들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수수한 미술관이 더 자랑스러운 시대가 오고 있다. 마치 남과 북이 전쟁과 분단을 겪고 평화와 통일의 시대를 열어가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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