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제국의 뿌리를 찾아서 - 4

김현종의 <영국 이야기 10>

등록 2001.01.15 13:49수정 2001.01.15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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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인종의 창조에 나선 사람들

1492년과 1800년의 인구 변동은 바로 정복과 피의 역사를 상징한다. 인디오스는 천연두 같은 새로운 질병에 노출되며 절대 숫자가 감소했고, 스페인 인들이 중심이 된 백인들은 400만 명이나 신대륙으로 집단 이주했다. 이 숫자는 오늘날 이탈리아계 등 여타 백인의 이민, 초기 이민의 자손들이 합류하며 몇천만 명으로 증가한다(혹시 60년대 서양 영화 '엄마 찾아 3만리'를 기억하는지. 우리 세대에게는 국산 영화 '저 하늘에도 슬픔이'와 함께 대표적 최루성 영화이다. 특히 여자들이 이 영화를 보고 많이 울었다. 이 영화는 20세기 초반 이탈리아에서 9살난 꼬마가 아르헨티나로 돈 벌러간 엄마를 찾아 나서 대서양 횡단 이민선을 타고 밀항하는 스토리이다. 남 유럽계 백인들의 남미 이민사중 한 쪽에 해당할 것이다).

주목되는 숫자는 다음의 두 가지 항목, 흑인과 혼혈인의 수자다. 중남미에 웬 흑인이 600만명씩이나 되는가. 바로 백인 지배계층이 남미에 식민지형 농업경제를 추진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아프리카 사람을 노예로 잡아다 부렸다는 반증이다. 아라비아 반도가 원산지인 커피나무가 18세기 중반 브라질에 처음 소개되었다. 커피, 사탕수수 재배 같은 열대 플랜테이션 농업과 목축을 위해 많은 노예와 필요했던 것이다.

백인의 중남미 정복을 가장 뚜렷히 알려주는 지표는 혼혈인 메스티조 550만명의 존재다. 스페인, 포르투갈 사람들은 원주민과 피를 섞기를 즐겼다. 이 결과 백인과 黃人(황인) 사이에 새로운 인종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 최근 세계사에 유례없는 일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주요 인종은 선사 시대에 다 나뉘었다. 혼혈이 있다 해도 이는 개인이나 한 나라에서의 소수 문제일 뿐이다. 그런데 오늘날 중남미에서는 전체 인구의 절반에 육박하는, 인구 숫자로 1억명이 넘는 혼혈인종이 불과 500년 사이에 만들어졌다.

스페인 사람이 남미에서 피섞기에 나선 이유는

메스티조는 넓은 의미에서 혼혈인종 전체를 지칭하지만 좁게는 백인종과 황인종의 혼혈을 지칭한다. 인디오스와 흑인의 혼혈은 뮬레토라 부르는데 19세기부터 급증하고 있다. 요즘은 3인종 피가 골고루 섞인 사람도 점차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이 정도면 황인종, 흑인종, 백인종에 이은 제4인종의 공식 출현이거나, 인종의 해체 현상에 해당한다(미국 출신인 골프선수 타이거 우즈가 각각 16분의 1에 해당하는 중국인 피와 인디언 피, 8분의 1에 해당하는 태국인 피, 4분의 3에 해당하는 흑인의 피를 가졌다고 한다. 미국거주 흑인이 이럴 정도이니 남미 사람들의 광범한 혼혈은 충분히 짐작이 간다).

스페인 사람들이 피섞기에 적극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일제시대 일본 사람들은 조선 사람중 고분고분한 사람을 뽑아 식민지의 관료나 농장의 마름으로 활용했다. 스페인계 백인들이 인디오스의 여자를 취해 자기 아이를 낳게 한 것은 1)인종적으로 마름 계급을 만들어내려 한 때문일까. 2)인디오스를 멸종시키기 위한 것인가. 3)인종 문제로 인한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한 방안이었던가. 4)단순히 식민지형 플렌테이션 경제를 지탱할 노동력을 급속 증대시키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던가. 5)또는 인디오스라는 새로운 性的(성적) 대상을 선호한 결과물인가.

영국과 스페인, 누가 그나마 양심적인가

또 하나 궁금한 점은 영국과 스페인의 차이점이다. 알다시피 북미 식민지화의 주축인 영국계 이민들은 이곳에서 인디오스의 씨를 거의 말려버렸다. 우리가 본 거의 모든 서부 영화에는 미개하고 못생기고 호전적인 인디언이 정의의 상징인 기병대나 백인 총잡이에게 혼나는 장면이 나온다. 에둘러 혼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사살 당한다. 총 가진 사람과 활 가진 사람이 싸워 총 가진 사람이 이긴 것을 박수 치는 것이 미국의 풍토인 것이다.


영국인이 건설한 호주, 뉴질랜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애보리진이라 부르는 토착민은 거의 멸종됐다. 영국이 건설한 식민국가중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의 토착민 비율은 불과 2-3%가 안 된다.

최근에는 지난 시드니 올림픽에서 보았듯 속죄의 길도 조금씩 밟는다. 올림픽 개막식 행사의 첫 장면을 애보리진 문화로 장식한다든지. 의문은 이어진다. 인디오스를 滅絶(멸절)시키는 대신 피섞기에 주력한 스페인 방식은 좀더 양심적인가. 당시 남미의 토착 인디오스들은 북미나 호주의 원주민과 달리 절대 숫자가 많고 문명의 형태를 이루고 있어 쉬 멸종시키기 어려웠기 때문은 아닌가.


어떤 이유에서였건 현재 상태에서 북미-영국계 이민 국가들은 이제 원주민에 대한 보호 정책을 펴도 무방할 만큼 백인의 强者的(강자적) 위치가 뚜렷한 반면 중남미-스페인계 이민 국가들은 인종간 경제적 갈등 속에서도 어느 정도의 상호 공존이 유지되고 있다.

이런 생각을 하며 달리는데 저만치 카디즈가 보이기 시작했다. 인구 16만의 카디즈 市(시)는 좁은 地峽(지협)을 통해 본토와 연결되는, 섬처럼 생긴 도시다. 시내 북편에는 대형 조선소가 여럿 있다. 대우조선이나 현대조선 노사 분규 뉴스를 통해 보통의 한국 사람에게도 익숙해진 골리앗 트레인(?)도 보였다. 지금은 항해대신 造船(조선)업이 도시의 주산업으로 바뀌었다.

300년 동안 흥청거린 도시 카디즈

지난해 11월 EU(유럽연합)는 한국 조선회사들이 덤핑을 한다고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그때 EU 국가 중에서도 이 문제에 가장 강경했던 나라가 바로 스페인이다. 그렇다면 스페인에서도 카디즈가 대표적인 조선산업 도시이니 한국과 경쟁하는 유럽 조선업의 대표주자가 바로 카디즈인 셈이다.

카디즈에는 조그만 방조제를 통해 육지와 연결되는 높이 100미터쯤의 커다란 등대가 있다. 이 등대는 의미심장하다. 카디즈의 등대는 오랜 항해와 모험에 지친 정복자들에게 희망의 상징이요 고국의 상징이랄 수 있다.

1930년대인가 사상 최초로 대서양 횡단 비행에 성공한 미국인 린드버그가 파리 하늘에 도착하자 남긴 유명한 한마디. "저것이 파리의 등불이다"라고 외친 것처럼 많은 스페인 인들도 감격에 차 "저것이 카디즈의 등대다"라고 소리쳤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나 흥청거렸을까. 경기가 좋은 시절 항구도시의 흥청거림은 익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기록에 따르면 이 호황은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300년을 이어졌다고 한다. 카디즈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큰, 미주 대륙과의 무역항이었다. 조기잡이 철의 연평도 파시보다 몇십 배 큰 규모로 흥청거렸을 카디즈 항구를 상상하며 천천히 시내로 들어갔다.

등대와 함께 해변가의 게노비스 공원에 들렀다. 대서양쪽 해변에 커다란 방조제를 쌓고 그 위에 인공 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식민지를 호령하던 시절의 기상이 담뿍 담겨져 있는 공원이다.

흰색과 노란색으로 단장한 성당도 볼만하다. 스페인 도시 어딜 가나 느낄 수 있지만 웬만한 건축물은 무슬림 풍이 잔뜩 묻어 있다. 카디즈의 성당도 마찬가지다.

우리 가족은 카디즈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았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전날 저녁 초속 20미터는 능히 될법한 강풍을 정면으로 받으며 대서양 바다로 천천히 들어가는 태양을 보았다.
"대 스페인 제국도 저 석양처럼 천천히 졌겠지" 역사의 현장에 선 상념을 읊조리며 해변도로를 걷자니 집채만한 파도가 한꺼번에 수십 수백 개 공원옆 방조제에 와 부딪친다. 그 억센 바람 사이로 바다갈매기들이 수백 마리 날고 있었다. 저 갈매기들의 조상들과 저 바람은 한때 대서양과 미 대륙을 주름잡던 스페인 제국의 영광과 몰락을 다 보았으리라. 그날밤 서울로 전화하니 서울은 화이트 크리스마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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