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정부는 '조폭'보다도 못한 집단인가?

로버트 김 사건으로 본 한국 정부

등록 2001.01.25 19:04수정 2001.01.26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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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한국 정부가 로버트 김에게 한 행위는 말 그대로 철저한 무책임과 무관심이었다.

우선, 그를 스파이로 이용했건 아니었건 간에 한국 정부는 자연인 김채곤 씨와 행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동포애적인 견지에서 구명운동의 취지를 공감하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관심을 기울이겠다"고 답변했지만 지금까지 정부는 전혀 손을 쓰지 않았다. 정부가 말했던 '동포애적인 관심'이란 무엇인란 말인가. 그저 속으로 "안됐다"고 생각만 하는 것이 동포애적인 관심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는 없는 노릇이다.

<로버트 김 옥중 인터뷰> "나는 그저 조국을 돕고 싶었다" / 박귀용 기자

두번째로, 정부는 끝내 자신들이 한 일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김씨는 이 인터뷰에서 자신의 사무실 책상 서랍 안에 국방부에서 온 팩스 정보요청 문건이 들어 있었고, 이것을 미 정보당국이 끝까지 문제삼아 "이래도 한국 정부가 모른 개인적인 일이었다는 말이냐?"라며 결정적으로 증거로 삼았다고 밝혔다.

정부의 말대로라면 국방부는 대한민국의 정부기관이 아니란 말이 된다. 법정 증거자료에는 한국 국방부가 김씨가 전달한 내용에 만족감을 표시한다는 백대령과의 통화내용도 포함돼 있다. 전문적인 첩자로 고용하지만 않았을 뿐 국방부는 김씨로부터 받은 정보를 전해 받은 것은 사실이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김씨가 체포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한국 정부의 "개인간의 일" 주장은 사실왜곡

김씨는 백동일 대령(군사정보수집담당)으로부터 "국방부측이 (정보를 보고) 매우 좋아 하더라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고 말했고, 이 부분은 검찰의 법정 감청증거에서도 나온 부분이다. 김씨의 증언과 법정기록을 놓고 볼 때 한국 정부의 "모르는 일"이라는 주장은 결국 거짓이 되는 셈이다. 이런 정부의 태도가 결과적으로 김씨가 과도한 중형을 받게된 중요한 이유가 된 점을 볼 때 정부의 '우리와는 무관' 입장은 억지에 불과한 셈이다.


정부가 김씨 사건에 있어 조직폭력 집단보다 못하다는 비아냥을 받을수 있는 이유는 김씨가 체포된 이후에도 계속 드러난다. 정부는 그가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일체의 법률적인 도움을 주지 않은 것은 물론 미국 정부에 김씨의 석방을 위한 어떠한 구체적인 노력도 취하지 않았다는 점이 그것이다. 순전히 국민적인 관심에 의해 김씨 구명운동이 끓어올랐을 뿐 어떠한 가시적인 노력도 취하지 않았다.

조직폭력 세계에서도 같이 일을 하다가 누군가가 잡혀가면 갖은 노력과 연줄을 다 동원해 구하려고 노력하기도 하고 안될 경우 번갈아 가면서 뒤를 봐주는 것이 그 세계의 불문율로 알려져 있다. 하물며 국가기관이 관여된 스파이 사건에 연루된 당사자가 잡혀갔는데도 한국 정부가 한 일은 이해할수 없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나는 조폭집단을 옹호할 생각이 결코 아니다. 문제는 정부가 멀쩡하게 정부를 대리한 백대령이 정보요청을 했고 그로 인해 관련자가 체포됐는데도 "그것은 개인들간의 일"이라고 강변한다는 점이다. 물론 한국 정부의 외교적 입장을 어느 정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미국 정부에는 외교문제상 그렇게 말하더라도 김씨와 그 가족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정부의 도리이다.

지금까지 한국 정부는 "스파이가 아니다"라는 입장만 밝혀놓고는 미국측의 이 사건 처리에 대해 변변한 성명서 하나 발표하지 않았다. 김씨와 비슷한 스파이 혐의를 받았던 대만출신 과학자 리웬허는 중국 정부의 성명발표 등 강력한 요청으로 수감된지 9개월만에 석방되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공교롭게도 그는 로버트 김과 동갑내기였다.

"김씨 면회 석방노력 기울인 정치인 단 한명도 없었다"

'조폭세계의 의리'를 들먹이기 이전에 한국 정부와 정치권은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도리를 저버렸다. 정치권 인사들이 대거 미국을 방문하고 남의 나라 대통령 취임식에 자랑스런 듯이 참석하면서도 조국을 위해 일을 하다가 영어의 몸이 된 한국인에 대해 관심을 보인 이는 아무도 없었다는 것은 매우 상징적인 일이다.

미국의 경우 자국민이 외국에서 스파이 혐의로 체포됐을 경우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 끝까지 그 사람을 구해내는 '의리'를 발휘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수년전 북한에 혼자 들어갔다가 붙잡혀 스파이 혐의를 받다 풀려난 에반 헌지크 사건을 비롯해 유사한 경우는 부지기수이다.

사건이 일어나면 미 의회 외교위 소속 의원들이나 국무부 관리들이 현지에 급파되어 그 사람이 풀려나올 때까지 교섭하고 면회하다가는 결국 데려온다. 우리 정부의 논리대로라면 미국은 정부가 말하는 '국제법의 기본원칙'과 '국제관례'를 밥먹듯이 어기고 있는 셈이 된다. 이에는 중국과 소련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말이 아닌가.

요청할 때는 '한국사람'이고 잡혀가면 '미국사람'?

대한민국 정부는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개입할수 없는 이유를 "김씨가 미국국적을 가진 미국 국민으로서, 미국 법정이 미국 국민에 대한 미국 법 위반사안에 대해 내린 판단에 대해 한국 정부가 관여하는 것은 국제법의 기본원칙과 국제관례에 배치된다"라고 들었다. 그렇다면 정부는 왜 "상관도 없는" 미국 국민에게 정보를 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인가. 요청할 때는 '한국 사람'이고 잡혀가면 '미국 사람'된다는 논리가 아닌가.

김씨가 지금이라도 석방되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미국이 끝내 석방요구를 외면한다면 그것은 별개의 사안이겠지만, 문제는 우리 정부가 노력을 해 보지도 않고 지레 겁먹고 있다는 것이다.

로버트 김의 노력이 과연 그가 편지에서 밝힌 대로 "한반도의 평화와 남북 긴장완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인터뷰를 통해 알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참으로 순수한 마음에서 조국을 돕고자 했던 것 만큼은 부인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정말 돈이라도 받고 전문적으로 간첩행위를 한 직업적 스파이었다면 어떻게 자신의 서랍 속에다 국방부 이름이 찍힌 팩스용지를 남겨둘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멀쩡하게 정보 요구자쪽과 감청되는 내용의 대화를 겁도 없이 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는 법정에서 10년 가까운 관련법 최고형을 받을 정도로 세련된 전문 스파이가 아니었다.

로버트 김은 결국 '이용가치가 없어진 인물도 저버리지 않는다'라는 조직폭력 세계의 룰보다 못한 한국의 정부의 사후처리가 나은 희생자였다. 구호뿐인 한미 공조, 한미 공조 하지 말고 정부는 지금이라도 한미 공조의 전형을 보여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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