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시인 예츠는 "사랑은 눈으로 오고, 술은 입으로 온다"고 했다.
그리고, 바이런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만취의 순간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렇듯, 시인을 비롯한 예술가들을 술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들은 마시기 위해서 마시는 것이 아니라 취하기 위해서 술을 마신다고 했다. 특히 우리가 천재라고 명명하는 예술가들은 거의 만취에서 작품활동을 해 왔다.
18세기 이래, 유럽의 부르주아 가정이 감시의 대상으로 삼았던 '위생'과 '자위'에 비한다면, '술'은 적당히 자위적이고 비위생적인 것임이 틀림없지만, 부르주아나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들에게도 찰나의 행복은 사춘기 몽정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다빈치'에서 출간된 신간<모딜리아니, 열정의 보엠>을 읽어보면, 천재화가 모딜리아니와 평생을 함께 한 친구도 술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적포도주와 럼주는 그의 고통을 진정시켜 주는 치료약이었으며 또한, 하시시(마리화나의 터키식 이름)는 술이 전해주지 못하는 전희를 느끼게 해주는 독이었다. 그리고, 그의 짧은 인생은 수많은 아름다운 여자들과 함께 수놓아졌다.
이탈리아의 항구도시인 리보르노에서 유대인 아버지와 프랑스계 어머니사이에서 태어난 모딜리아니는 이탈리아 왕자들이 갖는 '아메데오'라는 이름을 부여받았고, 22세에 파리의 몽마르뜨에서 미술활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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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 다빈치 |
모딜리아니는 파리의 여자들이 보수 없이 누드모델이 되고, 스스로 그와의 섹스를 갈망할 만큼 귀족적으로 생겼으며, 부르주아풍의 회색빛 빌로드 정장을 입고 다녔다고 한다. 가난했지만 비굴하지 않았고, 언제나 위대함과 관용을 잃지 않았던 그는 죽은 후에 더 유명해졌다.
20세기 초, 피카소가 파리의 미술계에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있을 때 그는 채석장에서 돌을 훔쳤다. 모딜리아니에게 집이 있었다면 그는 집을 부숴버렸을지도 모른다. 조각을 하기 위해서 그는 돌이 필요했으니 말이다. 사실 그는 조각가가 되는 게 꿈이었고, 실제로 그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 조형미는 그의 조각에 대한 열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길쭉하게 늘여 놓은 달걀형의 얼굴과 목, 간단한 선으로 표현된 가늘고 긴 코, 섬세하면서도 정직한 손, 그의 그림을 들여다보면 그의 투명한 영혼을 만날 수 있다. 북유럽과 아이리쉬 음악을 연주하는 듀엣 <시크릿 가든(Secret Garden)>의 음악, 그리고 <헨젤과 그레텔>같은 동화속 순수함이 느껴지는 모딜리아니의 그림. 그의 초상화는 뱀의 독같이 순식간에 퍼지는 마력을 지녔고, 그가 그린 초상화의 푸른 눈에서 더욱 열정적으로 느껴진다. 아마도 이런 모든 것들은 그의 눈과 영혼에 투영된 풍부하고 미묘한 색조와 함께 표현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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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앉아있는 누드(유채, 1917년) ⓒ 모딜리아니 |
무엇보다 그의 그림 중에서는 아름다운 여인들의 누드화를 빼놓을 수가 없다. 조각가가 꿈이었던 탓일까? 그의 '나부'(裸婦)에서는 다른 작품에서는 느껴지지 않는 조각적인 조형감이 느껴진다. 통통하고 부드러우며 곡선적이고, 단순하며 단아하다. 다른 화가들이 표현할 수 없는 실감나는 관능미가 느껴진다.
모딜리아니는 채워지지 않는 욕망과 결핍으로 괴로워했다. 그는 자신이 그린 데생을 찢어버리기도 했고, 사람들에게 화를 내기도 했다. 그가 욕망을 채우기 위해 했던 일은 거리로 나가 흠뻑 술을 마시고 하시시를 하는 일 외에는 없었다. 그의 재능을 알아주지 못하는 세상으로부터 그는 괴팍해졌고, 고립되었다.
청년 시절부터 그를 괴롭히던 결핵, 알콜과 하시시, 불규칙한 식사와 평온하지 못했던 생활. 그는 가난의 괴로움 속에서 "이탈리아.... 카라 이탈리아(그리운 이탈리아)!"라는 최후의 말을 남기며 36세의 짧은 생애(1884~1920)를 마감했다. 마치 100년 전 영국의 시인 바이런이 36세의 나이(1788-1824)로 요절했듯이... 피카소가 "화가와 시인이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던 황금기"라고 말한 그 시기에 말이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여자 잔느 에뷔테른은 둘째 아이를 밴 만삭의 몸으로 그가 죽은 지 이틀 뒤에 6층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했다.
모딜리아니는 생전에, "아틀리에... 화가의 여자들은 그 화가의 아틀리에에 자기네들의 흔적을 남겨서는 안돼. 자네만의 진정한 아틀리에... 참으로 좋은 아틀리에는 빈 것이라네"라고 말한 바 있다. 잔느 에뷔테른은 모딜리아니의 말처럼 그녀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그의 아틀리에를 비우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 것이었을까?
모딜리아니는 르느와르가 말했던 것처럼 여자의 엉덩이를 애무하듯 그림을 애무하지도 못했으며, 육체가 지배한다고 하는 그 어떤 식의 관념도 반항했다. 그림, 그 욕망 하나로 그림을 그린 사람.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행복한 법이라고 한다. 모딜리아니는 그것을 알고 있었을까?
덧붙이는 글 | <리딩 포인트>
모딜리아니의 친구였던 앙드레 살몽이 모딜리아니의 삶에 대해 객관적으로 쓴 글로서 영화처럼 잔잔하게 읽히지만 중간중간에 지루할 수도 있다. 모딜리아니의 원색 그림을 그대로 감상할 수 있으나, 그의 내면세계나 철학, 그림에 대한 해석이 미학적으로 표현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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