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의 '대형사고 코미디' 85분

특파원들의 복기: 94년 언론사 세무조사 고백 현장

등록 2001.02.11 22:42수정 2001.03.13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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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는 김영삼 전대통령의 도쿄발언의 중요성을 감안, 문제의 현장을 다큐멘터리로 복기합니다. 이 기사는 현장에 있었던 12명의 특파원 가운데 취재수첩을 꼼꼼히 기록한 3명의 특파원이 취재수첩을 보면서 증언한 내용을 토대로 작성한 것입니다---편집자)

2월 5일 밤.
00일보 도쿄특파원 000 기자는 주일 한국대사관으로부터 한 장의 팩스를 받았다. 그 날 오전에 일본에 도착한 김영삼 전 대통령이 9일 조찬 기자간담회를 하니 참석해 달라는 것이었다. 전직 대통령이란 예우 때문에 김 전대통령의 방일 일정은 주일대사관에서 챙겨주고 있었다.

9일 아침, 도쿄 시내 중심부에 있는 뉴오타니호텔(김 전대통령은 방일 때마다 거의 이 호텔에 머문다)로 향하면서 이 기자는 취재때마다 가지고 가던 녹음기를 챙기지 않았다. 얼마전 김 전대통령이 전립선 치료차 방일했을 때도 기자간담회를 가졌기 때문에 이 날은 뉴스거리를 크게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날 85분간의 조찬 간담회에서 김영삼 전대통령은 '준비되지 않은 대형사고'를 치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은 한편의 정치 코미디였다. 남의 '자기무덤 파기'를 비판하다 결국 자신의 무덤을 파고 마는.

관련기사 - 김영삼씨 발언에 펄펄 뛰는 조-중-동 사설

오전 8시 뉴오타니호텔 본관 16층에 마련된 기자간담회 방. 김 전대통령을 중심으로 특파원 14명과 수행원 10여 명이 양식으로 아침식사를 시작했다. 소시지, 계란 스크렘블, 과일샐러드 등이 나왔다.
"오늘은 특별히 준비해 온 것(모두발언)도 없으니 식사부터 합시다."
김 전대통령은 그렇게 말하고 기자들에게 식사를 권했다.
- 얼굴에 주름살이 하나도 없으시네요.
"운동을 열심히 하니까 그렇지. 하루에 두 시간씩 배드민턴을 한다고. 영하 10도로 내려가는 날에도 배드민턴을 하면 땀이 뻘뻘 나지."
- 전립선 수술한 것은 이제 괜찮으십니까?
"깨끗하게 다 잘 나았어."

이날 간담회에는 도쿄에 특파원으로 나와 있는 14개사 기자 가운데 한겨레와 SBS를 제외한 12개사의 기자들이 참석했다 (조선, 동아, 중앙, 한국, 문화, 연합뉴스, 한국경제, 매일경제, 파이낸셜뉴스, KBS, MBC, YTN). 수행원들은 박종웅 의원을 비롯 김기수 전 수행실장, 김광석 전 경호실장, 김명륜 한나라당 고문, 김정원 세종대 교수(전 안기부 차장), 주치의 등이 참석했다.


김 전대통령은 식사를 맛있게 하면서 특파원들에게 "요즘 일본경제가 어떤가"하고 물었다. 바로 전날 일본 경제당국이 올해의 GDP 성장률을 하향 조정했기 때문에 두 특파원이 그에 대해 설명했고 김 전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8시 20분경, 식사를 거의 다 마치고 커피가 나오자 김 전대통령은 마이크를 잡고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내 쪽에서 특별히 준비해 온 것이 없다. 궁금한 것 질문하면 대답하겠다."
특파원들의 간사를 맡고 있는 동아일보 기자가 첫 질문을 던졌다.
- 일본경제는 남의 나라 이야기고, 우리나라 경제가 요즘 어려워진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정치 지도자들이 잘못해서 그런 거다. 김대중이가 잘못해서 그런 거다."


김 전대통령은 두번째 질문을 받기 전에 "내가 이야기 좀 하겠다"면서 '준비해 온 두 가지'를 말하기 시작했다.
먼저 김정일 답방 저지에 대한 것이었다.

"김정일이가 서울답방을 하겠다고 하는데, 그는 목숨을 걸고 올 위인은 아니다. 어떻게 그의 답방을 저지할지 주요 인사들에게 방법을 강구하도록 지시를 해 두었다."

테러를 하겠다는 건가? 기자들은 이해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들이었다.
- 어떤 방법으로 저지를 할 건가요?
"지금은 서명운동을 하고 있는데 그 정도로 되는 것이 아니고 더 구체적인 방법은 지금 이야기 못한다."
- 남북 정상회담 자체를 부정하는 건가요?
"그건 아니다. 나도 김일성하고 만나려고 했으니까. 김정일은 김일성과 다르다. 김일성은 여러 사회주의 지도자들과 만나 경험을 쌓았지만 김정일은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다."

김 전대통령은 이어 준비해 온 또 하나의 주제로 화제를 돌렸다.
"김대중이가 언론사들에 대해 세무조사를 시작했는데 이것은 명백한 언론탄압이다. 언론이 이제 쬐끔(조금) 바른 소리를 하려고 하니까 보복을 시작하고 있다. 명백한 정치보복이다. 언론사도 영리를 목적으로 한 기업이니까 세무조사가 필요하지만 이 시점에서 하는 것은 정치보복이다. 김대중 씨는 이번 일로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무덤을 팠다. (언론사들이) 한두 달은 참을지 모르겠지만 그 뒤는 죽음의 길로 갈 것이다. 나도 언론에 당한 사람이다. 대통령은 원래 그런 것 아니냐. 언론이 용기를 가져야 한다."

- 그때 세무조사와 지금 조사에 차이가 있다면...
"1994년에 조사를 했으니 나는 그때 힘이 있었고 김대중 씨는 지금 힘이 없다. 그것이 다르다. 그때 조사를 했지만 공개는 하지 않았다. 10년, 20년이 지나도록 조사 한번 안 받는 것은 문제가 있으니 하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지금 하고 있는 것은 정치보복이다. 자기무덤을 파는 짓이다."

여기까지가 김 전대통령이 '준비해 온' 것들이었다. 핵심 요지는 김대중 대통령이 정치보복 차원에서 세무조사를 하고 있으니 언론은 용기를 잃지 말라는 거였다. "자기무덤을 파는 짓"을 하는 김대중 대통령을 향해 언론과 자신이 "용기를 잃지 말고" 공동전선을 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20여 분 후 김 전대통령은 자기무덤을 파기 시작했다.

세무조사에 대한 이야기는 '별다른 뉴스거리 없이' 거기에서 끝난 것으로 보였다. 기자들은 바로 세무조사 문제에 대해 추가 질문을 하지 않았다.

질문은 하시모토 류타로 전 일본총리와 전날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가로 이어졌고 대우문제도 나왔다.

"김대중이가 예전에 대우로부터 돈을 많이 받아서 김우중 씨를 전경련 회장시켜줬다. 김우중이한테 돈 받은 것이 있기 때문에 김대중이는 그 사람을 못 잡아들일 것이다."

김 전대통령은 국보법 개정 문제에 대해 "김정일에게 아부하려는 짓"이라면서 "그렇게 되면 국정원과 검찰이 할 일이 없어져서 안된다"고도 했다. 또 차기대선에 대해서는 "반드시 특정 후보를 지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오는 15일에 조선일보사에서 발행되는 '김영삼 회고록'에 대한 언급도 있었다.

그렇게 김 전대통령은 세무조사에 대해 1차로 언급한 후 전혀 다른 사안에 대해 7개의 질문을 받고 답을 했다.

대형사고 코미디는 참석자들이 파장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던 9시 10분경에 시작됐다. 한 특파원이 사고를 촉발하는 질문을 던졌다.

- 94년에 언론사 세무조사를 해 보니 정말 문제가 많았습니까?
"어, 문제가 많았다. 존립이 위태로울 정도였다. 국민의 신뢰성이 무너지고 허탈해 할 만한 내용이었다. 세무조사하면 가족관계까지 전부 조사하는 것 아니냐. (재산 등을) 가져서는 안될 사람도 (갖고) 있었다. 국세청이 원칙대로 했다면 상당히 징수해야 했다. 여러 건이 있었다. 그래서 없었다고 할 수는 없고 적당한 수준에서 얼마만 받고 끝내라고 딱 잘라 지시했다."

김 전대통령은 '역사의 은밀한 곳'을 단박에 드러냈다. 자신의 초법적 직권남용과 언론사들의 적나라한 부패상에 대해 너무나 쉽게 증언했다. 기자들은 '드디어 사고치고 있구나'하는 심정으로 귀를 세우고 질문을 계속했다. 그러나 김 전대통령이 그렇게 대형사고를 치고 있는데도 박종웅 의원과 김명륜 고문 등 수행원들은 아무도 그에게 '아니되옵니다'는 눈치를 주지 않았다.

- 왜 공개하지 않았습니까?
"언론사의 장래를 위해 안 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내가 몰랐던 게 너무 많았다. 만약 내가 공개했다면 큰일났을 것이다. (언론사들) 존립에 대단히 큰 문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 도덕적 의미까지 포함해서 그렇습니까.
"그렇다."

- 공개는 안 했더라도 시정하라고 했나요?
김 전대통령은 이 질문에 대한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한 단계 나아간 답을 했다.
"그 후에 내가 언론사 사주들을 모아놓고 논조를 똑바로 하라고 했다, 바르게 써라고 했다."
편집방향과 세무조사 결과에 대한 처벌 유예를 서로 거래했단 말로 들릴 수 있었다.

- 공개하지 않은 건 언론사의 약점을 계속 쥐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까.
"내막을 공개하면 존경심이 무너지고 국민들이 허탈해 할 것 같았다. 오히려 그게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 이번 조사로 타격을 입을 사주가 많겠습니다.
"이건 협박용이다. 김대중이는 절대 결과를 공개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할 때는 힘이 있었다. 김대중 씨는 지금 반송장 아니냐. 정권 말기고 하산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니 공개할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 여기서 언론이 굴복하면 김대중 씨가 기고만장해진다."
마지막으로 94년이나 지금이나 세무조사 결과를 걱정해야 할 처지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언론사에 소속된 기자가 물었다.

- 협박용이라 할지라도 세무조사 자체가 언론사에게는 형벌이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곳에 세무조사는 할 필요가 있다. 한 번 받은 기업은 건전하게 된다."

앞에서의 김대중 비판과 모순되는 답이었다.
어쨌든 김 전대통령은 전혀 준비도 없이 '권력과 언론의 검은 봐주기 유착'을 너무도 솔직하게 고백했다.
기자들이 귀엣말로 "이거 대형사곤데..."라고 주고받을 때 김 전대통령은 "이쯤 하자"고 마무리를 지으면서 다시 '준비된 말'로 돌아왔다.

"어쨌든 김대중이가 세무조사를 통해 저렇게 탄압해도 언론이 기가 죽으면 안된다. 내가 오늘 말한 것을 얼마나 크게 쓰는지 그것을 보면 언론이 기가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를 알 수 있다. 어떻게 쓰는지 지켜보겠다."
그는 "기죽지 말고 크게 쓰라"는 말을 두세번 반복해 강조했다.

그때가 9시 25분이었다. 그렇게 해서 1시간 25분간의 대형사고 코미디는 끝났다.

그의 원대로 연합뉴스와 석간 문화일보를 시작으로 그의 '94년 언론사 세무조사 고백'은 크게 한국으로 전해졌다.
대조적인 것은 그의 말을 가장 크게(1면의 반을 차지하는 큰 머릿기사) 다룬 곳은 그 자리에 기자가 참석하지 않은 한겨레였다. 그가 그렇게 "기죽지 말고 크게 쓰라"고 당부했건만 조선, 동아, 중앙, 한국 등은 1면이 아닌 2,3면 등에 2,3단으로 다뤘다.

김 전대통령은 기자간담회 방을 떠날 때까지도 자신이 한 발언이 자기무덤을 파는 것이라는 걸 깨닫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가 바라던, 세무조사 받는 언론들과 자신의 연대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는 것을 하루가 채 가기 전에 알아챈 후 그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바로 그날 저녁에 나온 조선일보 9일자 가판의 사설은 "김영삼 전대통령이 일본에 가 있는 사이 실로 엄청난 문제를 일으켰다"면서 "언론계 전체를 두루뭉수리로 '죽일X'로 만들어놓았"다고,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중대사태"로 규정했다.

그날 저녁 박종웅 의원은 간담회에 참석한 한 특파원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 파장이 커졌는데 와이에스가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노 코멘트."

김 전대통령은 일요일(11일) 낮 비행기로 귀국했다. 귀국 직전 한 특파원이 그의 측근에게 물었다.
- 조선일보사에서 15일에 발행하는 회고록에도 세무조사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까?
"그런 이야기는 없다."

김 전대통령의 85분간의 도쿄 기자간담회는 지난해 10월 13일의 고대 앞 19시간 농성때 보여준 '부끄러운 대통령학 교과서'에 또 하나의 장을 보탠 것이었다. 고대 앞 농성때는 '이해할 수 없는 인간 김영삼'을 보여줬지만 이번에는 '묻어둘 수 없는 권언유착의 역사'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짧지만 더 중요한 페이지이다.


취재를 마치고:
헛웃음은 그만, 이젠 진지해지자


김 전대통령이 그렇게 솔직히 고백한 이상 검찰은 그의 초법권적인 직권남용(탈세기업에 대한 형평과세를 방해한 죄)에 대해 철저한 조사를 해야 할 것이다. 언론개혁시민연대는 10일 발표한 성명에서 이를 "중대범죄행위"라고 규정했다. 조선일보의 9일자 사설도 이 대목을 잘 지적하고 있다.

"김영삼 씨는 또 '조사결과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하면 안될 것 같아 얼마만 추징하라고 딱 잘라 지시했다'고 말했는데, 대한민국 대통령직이 언제부터 초법적으로 세금 깎아주는 권한을 가졌다는 말인가. 그는 스스로 월권과 위법을 했음을 자인한 셈이며, 그 점에 대해서도 그는 누구에 의해서든 책임추궁을 받아야 한다."

검찰은 또 김 전대통령이 언급한 언론사들의 "존립이 위태로울 정도"의 부패실상에 대해서도 철저한 조사에 착수해야 할 것이다. 그 길만이 전직 대통령의 '고백'을 코미디로 전락시키지 않고 생산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한다.

한나라의 국가원수를 지낸 이의 언행에 국민들이 헛웃음치기만 계속한다면 그것은 국가적 에너지의 낭비다. 이제 모처럼 김 전대통령이, 비록 준비되지 않은 것이었다 할지라도 핵심을 이야기한 만큼, 이제 그 핵심에 진지해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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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myNews 대표기자 & 대표이사. 2000년 2월22일 오마이뉴스 창간. 1988년 1월 월간 <말>에서 기자활동 시작. 사단법인 꿈틀리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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