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떨이로 마감하는 KBS 대우차노동자해고 뉴스

97년 한라중공업 노동자 해고와 올 대우차 해고 닮은 꼴 보도

등록 2001.02.18 02:25수정 2001.02.18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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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뉴스가 보여주는 영상은 때때로 기자의 육성 멘트 못지 않게 시청자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올 때가 있다. 세상이 뒤집어 질만한 큰 사건이나 사고를 접하게 될 때면 카메라가 휘젓고 다니는 대로 시청자들은 넋을 잃고 현장 화면을 주시하고 그 위력 앞에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인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삼풍붕괴나 성수대교 붕괴와 같은 대형 사고에서 그리고 어제 내린 끔찍한 폭설에서 우리는 이미 그런 식으로 텔레비젼뉴스에 몰입했다.

큰 동선에서 작동하는, 그야말로 ENG 수십 대가 동시다발적으로 현장을 누비며 테잎을 쉴새없이 교체하지 않고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그런 사건사고를 보여주는 뉴스화면에서 흠잡을 구석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그럴 필요성도 그다지 절실하지 않다. 이런 종류의 보도는 몇 자의 헤드라인으로 요약되어 이미 수용자의 정서적 감각을 어느 정도 사고 들어가며, 또한 어떤 사실을 이해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재난을 목격하게 하는 것으로 그치기 때문이다.

다만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했던 책임(예를 들면 지난달 중부지방에 폭설과 혹한이 몰아칠 때 단식농성자들이 있었던 명동성당)을 미디어에 추궁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대체로 카메라의 노고를 칭찬해 준다.

그런데 문제는 ENG 한 대가 만들어 내는 취재화면이다. 시청자들이 숨을 죽이거나 넋을 잃거나 하지 않는다. 하지만, 개인적 차원에서 관심을 두고 있었으면 몰라도 미리 현장의 모습을 그려 볼 시간적 여유가 없는 대부분의 시청자에겐 하나의 장면이 큰 울림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는 뉴스화면이라는 미세한 부분이 사건보도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것이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특정한 화면을 통해 시청자들은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된다. 최근 스치듯 지나가는 특정한 뉴스화면에서 가진 자와 강자의 편, 아니면 가난한 자와 약자의 편에 서려고 하는 표상들을 어렵지 않게 잡아낼 수 있다.

작년 말 노벨 평화상 시상식이 있던 날, 문화방송 뉴스 카메라는 구로구 벌집촌의 인권상황을 말하고 있었다. 희뿌연 창을 가운데 둔 카메라와 독거 노인의 마주침, 그때 노인의 놀란 눈이 뼈만 앙상하게 남은 얼굴에 비해 유난히 커보였다.


시청자와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운 헐벗은 노인의 만남, 3초도 안되는 이 찰나의 화면은 우리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의 한 단면을 여과없이 그리고 오랜시간 동안 보여준 셈이었다.

반면에 기득권층에 서려는 장면은 잘 드러나지 않게 교묘하게 사용된다. 그렇기 때문에 과감하게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경향도 있다.


97년 11월 26일 한라중공업 임직원 절반 가량이 감축될 것이라는 보도가 조간 1면을 메우고 있었다. 그날 저녁 문화방송 뉴스데스크는 한라중공업 소식과 함께 내년 실업자가 100만에 이를 것이라는 소식으로 뉴스 첫머리를 열었다.

그런데 KBS 9시 뉴스 톱은 APEC회의에 참석중인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보도가 차지했다. 부실경제의 주범이 뉴스 톱을 장식했으니 그 주범이 만든 결과물인 한라중공업 소식이 그 뒤를 잇는다면 모양새가 너무 우스워진다고 생각했는지 뉴스중반부를 넘어서 한라중공업 소식은 보도되었다.

이때 보도된 화면의 마지막은 사장쯤 되는 간부급 직원이 창 밖을 보며 담배를 피우는 장면으로 끝맺고 있었다. 회사식구 절반을 자를 수밖에 없는 사용자의 참담한 심정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애써 시청자로 하여금 사측에 연민의 감정을 느끼도록 말이다.

그런데 4년이 지난 오늘(2월 17일), KBS 9시 뉴스에 보도된 대우차노동자 해고 관련 내용을 보면 KBS의 정리해고 관련보도 형태가 97년 겨울의 문턱에서 한 걸음도 더 나가지 않은 듯 했다. 보도 순서와 화면구성이 그때와 너무 닮아 있었다.

그런 의구심은 마지막 장면에서는 확신으로 바뀌었다. 로우 앵글로 잡은 화면에는 대우차관계자라는 자막과 함께 담배연기가 뿌옇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착찹한 심정을 토로하는 사용자측 관계자의 목소리와 그 영상은 하나의 화음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다음 엔딩 컷은 긴 담배재를 담아내는 재떨이의 클로즈업이었다.

갑자기 KBS에는 노사갈등 취재시 화면구성과 영상편집에 관한 지침이라도 있다는 억지를 부리고 싶어진다.

프랑스 사회학자 라모네의 저서 <커뮤니케이션 횡포>에 의하면 오늘날 검열의 방식은 매우 교묘하게 작동한다고 한다. 예전의 검열은 촌스럽게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행해졌지만, 오늘날은 소비해야 할 뉴스가 너무 많기 때문에 뉴스는 은폐되거나 삭제된다고 한다.

나는 이 부분에서 또 한번 억지를 써서라도 공영방송 한국방송공사에 검열을 그만두라는 경고를 하고 싶다. 검열은 내용의 은폐나 삭제 뿐 만 아니라 보도순서의 은폐나 시청자의 눈을 속이는 편집행위도 포괄적으로 의미한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KBS는 국민을 위한 공영방송으로서 무엇이 중요하고 그렇지 않은가를 냉철하게 판단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사회적 의제설정에 혼란을 가져오는 검열을 즉각 중단할 것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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