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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 드세요."
당대의 페미니스트가 기자에게 권하는 말은 꼭 한석봉 어머니의 말씀같다. 어디서 챙겨 가지고 나왔다는 떡 몇 개를 식구들 줄 거라며 챙기더니 기자에게도 두어 개를 내밀었다. 뭐, "엿 먹어라"도 아닌데 맛있게 먹어야지.
서울여성영화제 집행위원장 이혜경. 수식어가 긴 만큼 그녀의 하루 24시간은 48갈래로도 모자라게 돌아간다. 그녀는 무척 피곤해 보였지만 어딘가에 행복의 향낭을 차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를 만나는 순간 달랑달랑 어디선가 행복과 기쁨의 향기가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4월 14일부터 22일까지 약 일주일 동안 동숭아트센터 동숭홀과 하이퍼텍 나다에서 열릴 제 3회 서울여성영화제. 격년마다 열리는 이 행사를 준비하는 여성문화예술기획은 지금이 가장 바쁘다. 페미니스트를 포함, 한국의 모든 여성들에게 영화제의 일주일은 달콤한 봄햇살이 내리쬐는 축제의 기간. 이혜경 위원장이 바라는 제 3회 여성영화제는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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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혜경 위원장 "관객이 많이 왔으면 합니다." ⓒ 배을선 |
"일단 돈 얘기는 그만하고 싶어요."
영화제를 개최하는데는 많은 사람들의 뜻깊은 후원금이 필요하다. 이혜경의 오후는 보통 후원금을 찾아다니는 일로 시작되어 마무리된다. 사람을 만나고, 단체를 만나고, 회사에 찾아간다. 영화제의 최고사령관은 알고보니 고급 앵벌이꾼이었다.
"바라는 것은 관객이 많이 왔으면 하는 거예요."
관객이라면 오직 페미니스트인 여성들일까? 그가 말하는 관객이란 모든 관객이다. 남성과 여성을 가르지 않고 단지 "사람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 오히려 그가 와주길 바라는 관객들은 30대의 남성들과 주부들이다. 영화제 예산으로 큰돈을 들여 운영하는 '놀이방'이 있는 만큼 주부들이 아이들을 편하게 맡겨놓고 영화를 관람하길 그는 바라는 것이며, 여성영화제라고 해서 여성만의 축제는 더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여성영화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관객이 모두 주인의식을 갖길 바란다. 결국 여성영화제를 이끌어 가는 힘은 관객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3회의 출품작은 160여 편이나 돼요."
1회 때는 모두 39편의 영화가 상영되었고, 2회 때는 모두 52편의 영화가 상영되었다. 2회 때도 규모는 많이 커졌으나 예산이 많이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3회의 출품작은 그 세 배가 넘는 160여편이다. 출품작의 숫자를 세는 것이 여성문화예술기획 식구들의 기쁨이 되었다. 그 만큼 이제 여성영화제를 기다리는 많은 영화인구가 생겼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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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영화제 포스터 ⓒ 여성영화제 |
"영화제에서 영화를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저희가 자랑하는 프로그램은 영화 말고도 많아요."
아시아영화포럼, 전문가포럼, 섹션별 포럼.. 특히 이번에는 프랑스의 아네스 바르다 감독의 영화세계를 이야기하는 포럼과 성을 둘러싼 골치거리들을 말하는 포럼 등 그 맛이 더 특별하고 향긋해졌다. '포럼'이라는 말이 멋쩍지만 사실 모여서 수다떨자는 말이 아닌가? 서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의견을 교환하고 더 나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발전을 모색하는 것. 그런 긍정적인 수다떨기가 바로 이혜경이 생각하는 포럼이다.
또한 2회까지는 한국단편경선으로 선보였던 것이 3회부터는 아시아단편경선으로 바뀌면서 아시아여성의 영화인력을 감싸안는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했다. 아시아에서 여성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나라는 한국, 일본 대만. 그러나 대만의 그것은 규모가 작고 일본은 보수적인 성향을 띄기 때문에 한국의 여성영화제를 따라올 영화제가 "아시아에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영화제에 아이와 유모까지 데려오겠다는 감독도 있어요."
그만큼 서울여성영화제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이야기이다. 이스라엘의 나바 하이페츠 감독은 처음에는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그 다음에는 유모까지 데려오겠다며 적극적인 방한계획을 이야기했지만, 유모까지 책임질 예산이 영화제에 없는 것을 알고 아이와 남편 셋이 방한하겠다고 최종인원을 타진해왔다.
그 뿐이 아니다. 영화제 기간에 한국을 방문하겠다는 감독은 프랑스 누벨바그의 어머니라 불리는 아네스 바르다 감독을 비롯, 미국의 바바라 해머, 일본의 후지오카 아사코, 인도문화 사회연구소의 테자스위니 니란자나, 대만의 황위샨 감독, 북경대 교수인 다이진후아, 호주의 글레니스 로우,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그 명성이 자자한 인도계 영국인 프라티바 파마 등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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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혜경 위원장 ⓒ 배을선 |
이런, 영화제 소개만으로 이혜경을 넉아웃시킬 수는 없다.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영화제 소개에 관한 개괄적인 이야기보다는 영화제의 본질적인 이야기나 숨겨진 이야기일지도 모르는데.. 기자앞의 대추차가 이미 식었다. 대추차 한 모금을 넘기고 그가 준 떡의 비닐 포장을 벗기며 물었다. 도대체 여성의 시각으로 세계를 본다는 것이 어떤 건가요?
"지금까지 우리들은 남자들의 생각, 이데올로기로 만들어진 기준에 의해 문화를 답습했어요. 정치, 경제, 사회 모두.. 그런데 문화까지 남성으로 내면화된 시대를 살아온 거죠. 여성들은 그 동안 자신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못했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어요. 이제는 여성 스스로의 시선과 목소리를 발견할 때죠. 그렇다고 여성의 목소리만 커져야 된다는 것은 아니에요. 남성과 여성이 '어떻게 표현하는가'를 서로 배우는 자세가 필요할 때 아닌가요?"
그렇지만 아직까지 여성 이꼬르(=) 페미니스트, 이렇게 생각하는 남성들이 많아요. 페미니즘은 결국 여성과 남성이 조화롭게 잘 살자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21세기에는 어떻게 변해야 하는 건가요?
"21세기는 희망의 세기에요. 패러다임의 전환이 중요하지요. 그 동안, 세상은 너무나 도구적이며 두뇌중심적이고, 지배와 피지배의 이분법적 세상이었어요. 그런 걸 남성적 가치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이제는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논리에서 벗어나 세상을 둘러볼 때예요. 주변적 존재를 경험하고 체험하는 자세가 요구되죠. 자연이, 환경이 중요시되고, 생명이 보호를 받는 그럼 감성 위주의 여성적인 시선이 필요한 거죠. 여성적 시각, 여성적 문화는 감성과 이성이 합쳐진 문화를 말하는 거예요. 페미니즘이라는 것이 꼭 여성만을 위한 이론이 아닌 것은 이제 모두들 알고 있겠죠."
여성과 문화의 연결고리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아시다시피 정치, 경제, 사회, 이런 것들이 중요한 시대에 살아왔어요. 우리나라의 문화마인드도 그리 높은 편이 아니죠. 왜 그럴까요? 언제나 문화는 '밖'의 것이었어요. 일상과 먼 것이라고 해야할까? 바쁘게 살아온 옛 시대에는 그래도 굶지 않기 위해서 문화가 천시되었다면, 지금은 어떤 면에서 신앙화, 혹은 신화처럼 여겨지고 있어요. 문화의 가치처럼 여성의 지위 또한 마찬가지에요. 언제나 남성들의 들러리였죠. 이제는 여성과 문화 모두 새로운 패러다임, 혹은 네트워크의 기반이 되어야 해요. 특히 아시아와 한국에서 문화와 여성의 지위를 더불어 상승시키는 일이 필요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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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거나이즈"만큼 중요한 게 있을까요? ⓒ 배을선 |
이제 여성들이 해야할 일, 아니 모두가 해야할 일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올거나이즈(Organize), 즉 조직화하는 거예요. 주변의 목소리, 주변의 시선을 조직화해서 활성화하는 것이죠. 여성영화제처럼요, 시대와 패러다임을 전환시킬 수 있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동력을 조직화해야 해요."
그가 주장하는 것은 요즘의 NGO들의 올거나이즈와 사실 다를 바가 없다. 총체적으로 집권화된 권력에 대항하고, 그 권력을 변화시키려면 사실 그 만큼의 동력을 필요로 한다. 여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왜 우리가 바뀌어야 하는가의 일차적인 교육과, 이차적인 올거나이즈의 필요성.
이혜경이 여성문화예술기획 식구들과 함께 쓰고 있는 이메일 아이디는 '마녀'. 선녀는 자기 몸을 씻기 위해 세상에 내려오고, 마녀는 세상의 패러다임을 바꿔보고자 봄의 문을 두드린다. "웃기고 있네.." 혹은, "어디서 못돼 먹은 말만 주워와서 적어놨네"라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원래 페미니스트는 못된 말을 잘 한다.
새는 죽게 될 때 그 울음이 슬프고 사람은 죽게 될 때 그 말이 착하다는 증자(曾子)의 말이 옳다면? 페미니스트는 언제나 못된 말만 한다! 슬프게도 한국 사회의 페미니스트는 영원히 죽지 않을 테니 말이다.
언제쯤 승리의 여신인 나이키(Nike, 혹은 니케)가 페미니스트 마녀들에게 개선의 팡파르를 울려줄 수 있을까? 제 3회 여성영화제가 성공리에 폐막하는 날이라면 너무 이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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