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책 읽는 헌책방 주인

헌책방 가는 길에 만나는 다른 삶

등록 2001.04.30 09:26수정 2001.04.30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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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서적> 아저씨는 손님이 뜸하거나 손님이 있어도 함께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당신이 골라둔 책을 찬찬히 읽으십니다. 책장사도 책장사지만 책을 좋아하고 가까이 하며 나이가 들어도 공부를 이어간다고 할까요. 대한민국 노량진이란 그야말로 어수선한 동네에서 오랜 동안 헌책방을 꾸려온 <진호서적>은 아주 작은 곳입니다.

노량진에서 전철을 내려 <진호서적>을 찾아가는 길은 사람숲을 뚫고 헤쳐야 하는 길입니다. 노량진은 학원가 + 유흥가가 되어서 사람들로 그야말로 복작복작. 중고등학생부터 대학생, 재수생... 지나가는 이들에게 전단지를 나눠 주는 아줌마에게 `저는 학생 아니다'고 얘기하며-붙잡기도 하니까요- 구름다리 하나 건너고 건널목 하나 건너서 사람물결이 좀 잔잔해 진다 싶은 곳에 이르면 이제 <진호서적>입니다.


<진호>도 한 자리에 오래 한 헌책방인 만큼 중고등학생이나 학원생, 대학생(교재나 과외 참고서 사러)들이 자주 드나듭니다. 자그마한 책방을 반으로 뚝 나누어 들어가는 문에서 오른편은 자습서와 문제모음과 교과서, 왼편은 여느 책이죠. 이러한 책 배치와 푼수는 <진호>를 처음 찾아갔던 1995년과 이제나 그다지 달라진 구석이 없습니다. 그만큼 `오른편'에 자리한 책을 찾는 사람들이 많으니 `왼편'에 있는 책은 자리를 넓히지 못합니다.

학원가에 자리한 만큼 학원생들이 바라는 책이 많아야겠죠. 그러나 학원생이라 해서 자습서와 문제모음만 봐야 하지는 않은데 우리네 학원생이나 중고등학생은 교과서+자습서+문제모음을 벗어나는 책은 학교에서 보라는 책을 넘어서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마쳐도 도토리 키재기하듯 책을 보는 눈길도 얕기 때문에 가벼운 문학을 빼곤 잘 보지 못하죠. 조금 생각이 있다는 아이들은 인문사회과학 책을 곧잘 사 보긴 하지만 그 푼수는 보잘 것 없을 뿐 아니라 인문사회과학 책을 보는 아이들도 책 보는 테두리가 좁게 마련입니다.

오랜 동안 학교 교육에 길들여진 아이들이기에 이러한 벽을 혼자 힘으로 뛰어넘을 수는 없다고 봐요. 사람들을 많이 자주 만나고 깊이 이야기를 나누는 한편 책방에 가서 책을 사지는 않더라도 꾸준히 찾아가고 학교 도서관도 휘휘 둘러본다 해도 가끔 찾아가기를 여러 해 하면 조금씩 책도 좀 알고 보게 되며 사람 사는 삶과 사회를 보는 눈도 기를 수 있습니다(도시에서는).

하지만 사람은 책만 보며 사는 사람이 아니고 일하고 먹고 자는 사람인 만큼 일과 먹이와 잠자리를 알아가는 일도 경험으로 익혀야지요. 이러한 줄거리를 우리네 교육이 아이들에게 가르치거나 이끌지 못하기에 답답하고 안타까와요. 노량진에 갈 때면 늘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 수많은 사람들은 노량진에 모여서 무얼 할까 하면서요.


열려 있는 <진호서적> 문 안으로 들어갑니다. 아저씨는 점잖게 나이를 잡수신 아주머니 한 분과 조용조용 이야기를 나눕니다. 책방 복판에는 새로 들어온 듯한 액자가 대여섯 점 놓여 있습니다. 살금살금 액자를 에돌아가며 가방 내려놓고 안쪽 칸으로 들어갑니다. 안쪽 칸 한 켠에 중학교 교과서와 문제모음이 열일곱 권이 한 묶음으로 쌓여 있습니다.

헌책방에서는 옛 교과서나 잡지는 따로따로 들어오면 하나씩 팔지만 묶음으로 들어오면 책 상태만 확인한 뒤 다시 그대로 묶어서 통째로 팔지요. 죽 살펴보니 영어 교과서나 <민주생활> 같은 교과서는 저에게는 쓸모가 없는 책입니다. <뉴우 코오스 중학수학> <표준 음악> <표준 미술> <새 중학영어,양서각> <뉴우코오스 중학 국어> <베스트 중학영어> <뉴우마스터 중학 생물문제집> <중학생의 생물> <중학교 새 시대의 수학> <중학 국어> <과학> 이렇게 열일 곱 권이군요.


문제모음 앞에 붙인 이름을 보는 것도 재미있군요.

┌ 뉴우 코오스
├ 베스트
├ 뉴우 마스터
└ 새

수학 교과서(1966)엔 `새 시대의'라는 말을 앞에 붙였습니다. 뜻이 좋아 뵈는 영어 낱말은 되는 대로 붙이던 모습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요즈음도 마찬가지지만 요즘은 토박이말로 살갑게 빚어내는 이름도 쏠쏠히 보지요.

`매력여성을 찾오하는 진선미의 창'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작은 잡지 <진주> 1976년 11월호 하나를 봅니다. 이 잡지는 자리매김(차례)을 책 뒤에 단 모습이 남다릅니다. 자리매김에 쓴 말을 보면 이때도 영어(외국말)를 글에 마음껏 집어넣는 일이 톡톡 튀는 바람(유행)임을 엿볼 수 있지요.

┌ 연재 에세이
├ 유우머 재판실-센티멘탈/코믹영어교실
├ 新에티켓사전
├ 연예살롱
├ 애독자 릴레이 소설
├ 여성상식테스트
├ 사이언스 칼럼
├ 現代版 名作-맨드라미 스넥의 어린왕자
└ 사랑의 캐치프레이즈

김소운 선생이 쓴 <붓 한 자루, 범우사(1976)>라는 책을 보면 김소운 선생이 1940-50년대에 겪은 일을 그림 그리듯 잘 적고 있습니다. 이때 기찻간에서 자기 나이 또래 되보이는 경상도 시골 아저씨가 새파란 젊은 패에게 자리를 빼앗기고 무안해 하는데, 차 안에서 아무도 말리지 못하고, 젊은 패들은 시골 아저씨 맥고모자를 뺏어서 차 안에서 서로 던지고 받고 하며 노는 모습이라든지, 피란길에 공동우물 하나 앞에서 바가지 하나를 만들어서 함께 쓰지 못하고 저마다 따로따로 물바가지를 만들어서 깊은 우물에 넣고 길어서 자기만 쓰고 휙하니 사라지는 모습이라든지... 그때 이런 일들을 했던 젊은 사람은 이제는 낫살먹고 환갑 진갑 지난 할아버지 할머니입니다.

이런 모습이나 잡지에서 말 같지도 않은 어수선한 말을 쓰는 모습은 요즘에만 문제가 아니라 지난날에도 문제임을 알아야겠습니다. 이러한 문제가 나날이 깊어가면서 오히려 더 힘을 내고 있음도 보고요.

우리가 보는 책은 어떻습니까. 지난날에는 책이 없고 귀해서 못 보았다고 하지만 그때 책이 없어서 보지 못했다고 하는 분들이 책이 넘쳐나는 요즈음에 이렇게 넘쳐나는 좋은 책들을 부지런히 사서 보지 못하고 있지요. 어릴 적에 책 한 권 못 쥐고 자랐다는 분이라면 나이가 들어서 돈 좀 벌고 그럴 때에라도 책을 읽으면 좋을 텐데. 이렇게 자기 스스로 지난날이나 오늘날이나 몸과 마음이 어긋나게 살아오면서 다른 누구에게 무어라 말할 수는 없지 않나 싶습니다.

"... 산간 화전민들은 벼농사도 안 되고 집 지을 연장조차 신통찮기 때문에 귀틀집에 너와지붕을 얹는 것이다. 또 화전민들은 먼 거리에서 옹기독을 사올 수 없기 때문에 피나무독과 채독으로써 저장 용기를 삼는다. 한국은 벼농사 중심의 농본국이어서 초가가 발달한 것이고 제주도에서는 볏짚을 얻기 어려워 띠풀로 지붕을 인다. 만약 한국에 도자기의 태토가 마땅치 못해서 청자, 백자가 구워지지 않았더라면 유리 제품이 훨씬 발달했을 것이다. 분명히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에 걸쳐 유리를 다루는 기술이 도입돼 있었는데 그 후 자취를 감춰 버린 이유가 어디 있을까.

한국에서도 중국과 같은 진귀한 옥이 산출되었더라면 그 동안 옥공예를 다채롭게 전개시킬 구실이 충분히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을 국외로부터의 수입품에 의존해야 하는 처지여서 도리어 엄격한 규제 품목으로 묶여 있었다. 반대로 고 대에는 주요 수출 품목에 들어 있던 금은이 뒷날엔 수탈 대상 제일호로 둔갑하여 수난을 가중시킨 까닭에 아예 정책적으로 채금을 금지시키기도 하였다. 그 결과 고대에 탁월했던 금세공 기술이 조선시대에 이르러선 보잘것없도록 몰락해 버리었다. <이종석-한국의 전통공예, 열화당(1994)>"


그러나 헌책방에서 참고서나 문제모음과 교과서만 산다 하더라도 이 책들을 자기 나름대로 곰삭이는 눈길과 손길이 있다면 이 아이들은 자라면서 자기 생각을 갖게 마련이고 자신이 일하는 곳에서도 `솜씨'를 낼 수 있을 테죠.

유리를 다루는 재주나 은을 분리해 내는 재주가 일찌감치 우리에게 있었으나 이러한 재주가 묻혀버리거나 사라지듯 우리 땅과 우리 삶에 쓸모 있고 자기가 살아가는 환경과 처지에 따라 저마다 다 다르게 책을 봅니다.

<진호서적> 아저씨는 당신이 헌책방을 꾸려온 여러 가지 이야기를 갈무리하고프지만 "뭔가 하려면 다른 것을 희생해야 하기에" 쉽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도 당신 스스로 꾸준히 준비해 오고 있었기에 이러한 일과 삶은 당신 스스로 못 하더라도 뒷날 누군가가 이어서 할 수 있겠죠.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을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이루지 못한다 해도 뜻이 있고 깊이와 폭이 있다면 누군가는 이 일을 이어받아서 하게 마련입니다.

덧붙이는 글 | [노량진 진호서적] 02) 815-9363 / 011-9890-9363

* 국철로 노량진역에서 내려서 구름다리를 건넌 뒤 용산쪽으로 350미터 안팎 걸어가면 버스정류장을 둘 만나는데, 첫째를 지나고 둘째 버스정류장 앞에 <진호서적>이 있습니다. 

* http://freechal.com/tobagi

덧붙이는 글 [노량진 진호서적] 02) 815-9363 / 011-9890-9363

* 국철로 노량진역에서 내려서 구름다리를 건넌 뒤 용산쪽으로 350미터 안팎 걸어가면 버스정류장을 둘 만나는데, 첫째를 지나고 둘째 버스정류장 앞에 <진호서적>이 있습니다. 

* http://freechal.com/toba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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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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