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가 어떻게 전통을 밀어냈을까

역사문제연구소 <전통과 서구의 충돌>

등록 2001.05.14 16:56수정 2001.05.14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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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기지 않겠지만 내 고향에는 아직까지 상수도가 없었다. 그렇다고 물동이로 물을 길어 먹지도 않는다. 이를테면 샘물과 집 사이를 파이프로 연결해 수도꼭지로 틀어 물을 쓰는데, 얼치기 상수도인 셈이다.

겉모양은 상수도지만 속은 물긷는 방식만 다를 뿐 내 조상들이 마시던 바로 그 물을 사용한다. 그런데 최근 이 마을에 상수도를 설치하고 있다고 한다. 고향집에는 상수도가 당장은 필요 없지만 공사하는 김에 달아 놓을 참이란다.


물맛 좋기로는 고향 동네에서 나의 고향집 샘물보다 나은 곳이 없다고 마을사람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터여서 왠지 찜찜한 기분이 드는 상수도-아마 물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정수처리를 한다는 점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를 들인다는 것이 반갑지만은 않다.

그 이유는 가뭄이 들어 샘물이 졸졸거리게 되면 그 상수도가 곧바로 역할을 대신 떠맡게 되고, 시나브로 상수도의 역할이 커지면서 예부터 마시던 샘물을 떠밀어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바로 이것이 전통과 근대가 부딪치는 지점이 아닐까.

이 책 <전통과 서구의 충돌>(역사문제연구소 엮음·역사비평사 펴냄)은 우리 역사에서 이런 전통과 서구가 부딪치는 접점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지난 몇 년간 계간 <역사비평>에 같은 제목으로 기획 연재되었던 글들을 다시 수정 보완하려 단행본으로 엮은 것인데, '한국적 근대성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는 부제가 말하듯 한국적 근대성의 형성과정을 여러 부문의 사회현상을 통해 살펴본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전통과 서구적인 것, 그리고 역사의 전개와 동인(動因)을 보는 시점(視點)과 시선(視線)에서 상당한 큰 편차를 보이지만 대체로 우리 실생활의 모습이 지난 100여 년 동안 어떠한 변모과정을 거쳐왔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그러기에 내가 기사의 들머리에 장황하게 개인적 경험을 늘어놓았듯 추상적인 맥락에서가 아니라 우리 개개인의 구체적 삶에 비추어 가면서 읽는 것이 더 실감이 난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는 주거문화(이일훈)를 비롯 △한국 가족의 근대성(문소정) △성과 성의식의 변화(윤가현) △근대적 소비생활과 식민지적 소외(허영란) △미술 : 서구화 지상주의의 환상(최열) △서양음악의 수용과 전통음악의 변화(아소영) △황색 피부와 하dis 가면(이승환) △한의학과 서영근대의학의 만남(황상익) △돌이켜 보는 '망국의 종교'와 '문명의 종교'(장석만) △서구법 수용의 왜곡(정긍식) 등이다.

전통에는 물론 현재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과거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터이지만 그와 더불어 전망의 의미에서 미래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 갖고 있는 시간을 잇는 역사적 사유방식이 전통의 이해와 창조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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