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대찌개가 '훌륭한 퓨전음식'이라니

음식에도 우리의 자존심을 잃지 말아야

등록 2001.06.18 18:02수정 2001.06.18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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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국악방송이 개국되었다. 민족문화를 아끼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반가운 마음이었다. 그 동안 국악이 방송에서 당하는 푸대접은 이루 말할 수 없었기에 온종일 국악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기쁜 소식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매주 토요일 낮에 방송되는 "퓨전국악"이란 프로그램은 민족문화의 뿌리와 자존심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큰 걱정을 안겨 주었다. 퓨전국악을 대표한다고 할 만한 국악계의 거물이 프로그램의 사회(MC)를 맡았다는 것 자체가 그 프로그램의 성격을 말해 주기에 충분했다.


첫방송에서 그는 "부대찌개"를 극찬했다. "부대찌개는 이제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으며, 부대찌개 전문음식점도 많이 자리잡고 있을 정도로 훌륭한 대표적 퓨전음식이다."

그는 부대찌개 탄생의 기원을 모르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자존심은 버렸는지 알 수 없을 만큼 극찬을 하고 있었다. 한 시간짜리 프로그램 내내 부대찌개 칭찬에 침이 마를 정도였다.

부대찌개는 과연 어떤 것일까? 어떤 이는 부대찌개를 '햄과 소시지의 행복한 만남' 정도로 말한다. 음식은 맛있게 먹으면 그만이지 웬 자존심 타령이냐고 말하기도 한다. 정말 그럴까? 우리는 이 부대찌개를 먹더라도 탄생의 의미를 새겨본 다음에 즐겨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원래 부대찌개는 이 땅에 미군들이 들어오면서 생긴 '사생아 음식'이다. 나는 진정 음식다운 음식이 아니고 어정쩡하게 타협한 산물로서의 이 음식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많은 반미운동가들은 이 땅에서 미군이 나가기를 바란다. 우리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 미군은 걸림돌이 된다는 주장이다. 얼마 전 있었던 '윤금이살해사건'이나 '한강 독극물 방류사건' 등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그런 미군들이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모두가 알다시피 해방직후보다는 6.25전쟁 이후이다. 그러면서 생긴 것들이 바로 군사문화(G.I문화)이다. 이 부대찌개도 이 군사문화의 한 사례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미군의 군수품으로 지급된 햄, 소시지 등은 일정한 유통기한이 지나면 자동 폐기하도록 규정되어 있다고 한다. 더구나 먹는 음식에 있어서 만큼은 단 하루만 지나도 여지없이 폐기처분하고 마는 것이 흔히 얘기하는 '미국식 합리주의'란다.


그런데 전쟁 직후 먹을 것이 턱없이 모자랐으며, 특히 고기를 거의 먹을 수 없었던 우리에겐 미군이 버린 햄과 소시지는 그야말로 소중한 음식이었다. 고기대신에 이 햄과 소시지에 김치를 넣어 끓인 '부대찌개'는 그땐 그야말로 환상적인 음식일 수밖에 없었다.

해서 생겨난 것이 바로 이 '부대찌개'인데 부대 즉 미군부대에서 나온 찌개란 뜻이다. 이 음식의 원조격인 미군부대 주변에서는 존슨탕(Johnson탕)이라고 불려진 적이 있었다 한다. 우리에게 김서방이 대표적인 사람이듯이 미국 사람들에겐 존슨이 흔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

싼값에 단백질(고기?)을 섭취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의정부, 동두천, 평택 등 기지촌 주변에서부터 시작되어 차츰 전국으로 퍼져 나간 것이 바로 이 음식 '부대찌개'이다. 우리나라의 주둔군(일부는 점령군이란 표현을 쓴다)이 내다버린 찌꺼기음식을 우리는 좋다고 먹는다.

그때는 정말 어려운 때여서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고 치자. 하지만 지금은 아직 IMF가 극복되지 않았더라도 일부 극빈층을 제외하고는 전쟁직후의 상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식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 지금에 와서도 자존심마저 저버린 채 그들 즉 미군의 찌꺼기음식에 기뻐하고, 맛있게 먹어야 할까? 물론 지금의 햄과 소시지는 엄밀히 미군들이 버린 것이 아니라 국내 기업들이 생산한 제품이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부대찌개' 출생의 비밀을 알고서는 자존심을 폐기처분한 것이 아니라면 좋아할 일이 아닐 것이다.

음식 좋아서 먹는 것이야 어디 나무랄 일이던가? 하지만 이 사생아 음식을 '최고의 퓨전음식'이라고 표현하는 잘못은 범하지 말았으면 한다. 더구나 정통 서양음식 재료 중의 하나인 햄, 소시지가 우리의 대표적 전통식품인 김치와 궁합이 잘 맞지 않을 것이란 생각도 해본다.

이제 음식에도 우리의 자존심을 생각하자. 차라리 어정쩡한 사생아 음식을 먹을 바에는 정통 서양식을 먹는 것이 우리 민족문화에 상처를 입히지 않는 그런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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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으로 우리문화를 쉽고 재미있게 알리는 글쓰기와 강연을 한다. 전 참교육학부모회 서울동북부지회장, 한겨레신문독자주주모임 서울공동대표, 서울동대문중랑시민회의 공동대표를 지냈다. 전통한복을 올바로 계승한 소량, 고품격의 생활한복을 생산판매하는 '솔아솔아푸르른솔아'의 대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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