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얼굴을 한 정리해고

기업가 사재 털어서라도 해고자의 마음을 붙들자

등록 2001.06.20 11:55수정 2001.06.20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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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해고 상상해보셨나요. 우리 식으로 하자면 사회적 추락이자 그대로 생존 위협인 정리해고.

전세계 경기가 나빠졌다고 여기저기서 정리해고 소리가 들립니다. 어차피 경기둔화로 회사 사정이 어려워지면 미국에서 정리해고는 불가피한 수순. 하지만 최근 정리해고 풍경은 예전과 조금 달라보입니다.

"회사에서 완전히 자르겠다는 게 아니야. 우리는 당신들 같은 인재와 계속 관계를 맺고 싶어."
해고자의 마음을 붙들어 두려는 아이디어가 줄을 잇고 있다고 할까요. 설혹 본질은 마찬가지라 해도 '인간의 얼굴을 한 정리해고'라고나 할까요.

통신 장비업체 시스코 시스템즈는 지난 4월 6000명을 해고하면서 한 가지 제안을 내놓았습니다. 퇴직금대신 앞으로 1년간 월급의 3분의 1과 각종 수당, 스톡옵션을 줄테니 시스코와 관련 있는 비영리기구에서 일해달라는 거죠.

암튼, 이달말부터 저소득층의 인터넷 접속 확대 운동을 벌이는 워싱턴의 한 단체에서 일하게 된 한 직원은 "1년 후 재고용됐으면 좋겠지만 재고용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다"며 "뭔가 흥미있는 일이 있어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온라인 증권회사 찰스 슈왑은 지난 3월 직원의 13%를 자르면서 아예 창업자 슈왑 부부가 사재 1000만달러(약 130억원)를 내놓아 장학재단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해고자들 가운데 다른 직장을 택하는 대신 공부를 원하면 학비를 지원해줄 방침이라네요. 또 18개월 내 재고용될 경우, 7500달러(약 980만원)의 보너스도 약속했습니다. 해고 과정의 마찰을 줄이는 동시에 나중에 회사 사정이 좋아지면 재교육된 예전 직원들을 부르겠다는 거죠.

반도체업체 텍사스 인스트루먼트는 최근 하청업체들에게 직원을 임대해주는 방식으로 정리해고를 피했다고 합니다. 8개월의 계약 기간 동안 '임대 직원'들은 하청업체에서 월급을 받으며 일하지만 나중에는 본사로 복귀하게 된다네요.


컨설팅회사 액센츄어는 이 달 초 600명을 자르면서 6~12개월의 안식휴가 프로그램을 제안, 1500명의 지원자를 받았다고 합니다. 휴가 중에는 20%의 월급과 각종 수당이 지급되며 경쟁사가 아니라면 다른 곳에서 일할 수도 있습니다.

정리해고 노동자들과 계속 '끈'을 놓지 않겠다는 이같은 움직임은 1990년대 말 구인난에 시달렸던 하이테크 및 전문서비스 업종에서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또 방위산업체나 보험, 자동차업체도 이런 추세에 동조하고 있다네요.


당장 인건비를 줄이고 후일 구인비용을 줄이겠다는 포석. 어쨌든 언젠가 좋은 날이 오면 함께 일하자는 현실적 메시지는 정리해고자의 재고용 희망을 높여주는 동시에 해고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사기도 높여준다는 평입니다.

물론, 사람 자르면서, 그래도 경쟁업체에 가는 꼴은 못보겠으니 앞날을 보장할 수는 없지만 일단 우리와 관계를 잘 유지해보자는 그런 속셈도 있을 테고, 암튼 재고용 보장은 쉽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또 일각에서는 첨단업체인 만큼 한 몇 달만 놀아도 해고자의 기술이 녹슬 것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디즈니처럼 회장은 현금보너스로 147억원을 챙기고 '진주만' 같은 영화 시사회 행사에 64억원이나 쓰면서도 회사가 어렵다고 4000명씩 자르는 곳도 여전히 있습니다.

정리해고. 당사자에게 그 가혹한 충격이 변할 리 없겠지만, 그래도 심지어 사재까지 털어서 해고자를 교육해주겠다는, 어떻게든 마찰을 줄이고 인간적 관계를 유지해보겠다는 노력에 어떻게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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