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얼굴의 '야매' 그것이 알고싶다

가수 볼빨간의 2집 앨범 <야매>

등록 2001.06.21 17:09수정 2001.06.22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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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당신이 듣고 있는 가수의 음악앨범에 아래와 같은 고백이 들어있다면?

"지금까지 4곡을 쭉 들어보셨는데, '이번 앨범도 얘는 망했구나' 그런 생각을 하실 줄로 압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교통비라도 한번 벌어보겠다고 이렇게 나와서 앨범 만들고 살아보겠다고 하는데 여러분들 한번만 꼭 좀 도와주십시오."


참으로 처절하지 않을 수 없다. 1등부터 꼴등까지 순위를 매겨야만 직성이 풀리는 한국 가요계에서, 그것도 십대들의 전유물인 댄스음악을 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할 국내 음반시장에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는 한 트로트 가수의 처절한 고백.

그러나 그의 음악에 귀를 기울여보면 그 어떤 처절함도, 당장에 싸그리 망할 것 같은 불안감도 담겨져 있지 않다.

볼빨간. 이제 막 서른에 접어든 이 가수의 전문영역은 트로트이다. 96년 '카바레싸운드'를 설립하고 98년 '지루박 리믹스 쇼'를 발매하는 등 트로트를 향한 끝없는 충성과 정열을 아낌없이 발산하고 있는 그가 2집 앨범인 <야매>를 발매했다.

그렇다. 한마디로, 그의 음악은 2집 앨범의 제목처럼 '야매'성이 짙다. '야매'란 어원이나 사전적인 의미를 정확히 파고들 수는 없지만 '오리지널이 아닌', '자격증이 없는 비전문가에 의한 행위나 그 결과물'을 의미하는 단어다.

사실, 20대의 기자가 트로트에 대해서, 그리고 볼빨간의 음악에 대해서 왈가왈부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그의 음악이란, 20대의 감성으로 듣자면 변형된 테크노, 혹은 엽기음악으로 더 가깝게 다가오며 50~60대의 클래시컬한 트로트 감성으로 들어보자면 정통성을 거부한 날라리 '개뼉다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음악을 하는 목표의식이란 독창성과 신선함이 한데 어우러져 질 높은 명랑사회를 구현하자는 데서 출발한다.


그의 음악을 곰탕 끓이듯 서서히 음미해보면 현대인의 고뇌와 아픔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한(恨)의 정서마저 느낄 수 있는데, 그것을 표현하는 볼빨간의 목소리는 코믹하면서도 자못 진지하다.

'사랑의 스튜디오'라는 노래를 들어보면, 6자리 수 월급과 3개뿐인 학교 졸업장으로 사랑의 스튜디오에 출연하지 못하는 한 남자의 애환이 고스란히 실려 있다. 그는 노래한다. '학력란이 왜 있는 건가? 수입란이 왜 있는 건가? 꿈도 못 꾸네 러브스튜디오'. 이 노래는 가사만큼 튀는 그의 목소리와 리듬에 매력이 있다. 상쾌한 뽕짝사운드가 느끼한 그의 목소리를 타고 부드럽게 스며드는 맛이란 정말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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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빨간의 2집 앨범 <야매>
ⓒ 아임스테이션
테크노 비트와 유럽식의 댄스 리듬이 믹스된 곡 '볼빨간 댄스'는 후반부에 등장하는 볼빨간의 트로트 목소리만 아니라면 트로트라고 믿지 못할 만큼 부르조아 냄새가 나며 이 앨범에서 가장 이질적이고 독창적인 음악이라 할 수 있다. 여타의 테크노 음악과 비교해 전혀 손색이 없는 곡, 한 번 들어보면 안다.

누군가 당신에게 그리운 이름 슥자(석자)를 불러보라고 한다면? '영숙이?' '미선이?' 그러나 볼빨간은 다르다. 그는 '부모님'을 외친다. '이젠 준비가 됐는데'라는 곡은 첫 월급을 타고 부모님을 위해 정종대포와 메리야스를 사왔지만 부모님은 이미 세상을 뜨셨다는 내용이다. 이 노래가 한국인의 한(恨)을 농축시킨 게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인가.

"나여..."라며 사랑하는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우리 이제 끝났어요, 그만 전화하세요"라는 대답을 들었다면 당신이 내뱉는 말? "미치겄네..." '내 사랑의 설명서를 주세요'라는 곡은 느끼한 목소리의 완결버젼으로 목소리의 꺾임이 압권이며 도저히 웃지 않고는 못 배기는 노래이다.

룸살롱과 단란주점의 '룸'과 '단란'을 둘러싼 남자들의 동물적인 근성과 아가씨들의 계산적인 처신(?)을 노래한 '언감생심'은 영화 <하면된다>에 수록된 곡.

한편, 1집에 수록됐던 이박사 풍의 노래 '동천각'과 전형적인 리어카 트로트 리듬의 '사랑의 십자말 풀이', '육체의 환타지' 등은 볼빨간 매니아들의 소장 대상이 된 곡들로 2집을 구입하는 애청자들을 위해 보너스 선물로 다시 한 번 수록되었다.

그의 음악을 찬찬히 들어보면 '야매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공중파를 타는 가수도 아니면서, 댄스음악을 하는 심장빨간(?) 십대도 아니면서, 게다가 돈도 별로 들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팬들을 위한 서비스 정신 하나로 무장해 이렇게 재미있고 풍부한 앨범을 낸 볼빨간의 정신력이 과연 '야매'인가? 그의 본격 장르인 트로트 위에 락과 지루박, 테크노 등의 음악장르가 완성도 깊게 입혀진 그의 음악이 과연 '야매'인가?

이번 볼빨간의 음악 <야매>는 목소리보다는 컴퓨터에, 노력보다는 기술에, 음악성보다는 춤과 외모에 주력을 하면서 CF스타로 더 주가를 올리고 있는 립싱크 가수들에게 경종을 울릴만한 것이다. 누구의 음악이 더 '야매'인가. '야매'의 두 얼굴? 성인인 우리가 가려내지 않으면 누가 가려요? 애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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