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아빠 학교 다닐 적에…"

<인터뷰> 옛 교육자료 1만2천여 점 모은 양호열 씨

등록 2001.07.04 23:23수정 2001.07.05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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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우리나라 군인들의 문맹을 퇴치하기 위해 정부가 군용 교과서를 제작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양호열(45·대구 수성구 황금동) 씨가 없었다면 후대에 알려지지도 못하고 묻혀버렸을지 모른다.

1890년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천황의 지시에 따라 반포한 '교육칙어' 원본을 100여 년이 지난 지금 원형 그대로 볼 수 있게 된 것도 순전히 양 씨의 개인적 노력 덕택이다.

옛 교육자료 1만2천점 소장

양 씨는 지난 18년 간 우리나라 구석구석을 누비며 교과서를 비롯한 각종 교육자료들을 수집하는 일에만 몰두하는 '기행'을 거듭해 왔다. 그의 교육자료 수집활동은 단순한 취미나 여가활동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양 씨가 보유한 교육자료는 1500년대 문구류·고서에서부터 개화기, 일제시대, 미군정기, 한국전쟁 기간 등에 사용된 각종 교육자료와 교과서 등 무려 1만2천여 점에 이른다.

그는 이 자료들을 보존하기 위해 대구시와 인근지역에 있는 20평짜리 창고 3곳을 임대해 사용하고 있다. 더욱이 그는 적지 않은 자료들을 현금으로 구입했으며 이 가운데는 구입 당시 가격이 1천만원을 호가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난 84년께 어느 시골에 있는 한 고물상 리어카에 실려있던 <조선독본> 등 3권의 일제시대 교과서를 구입한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머지 않은 시일 내에 교육사적으로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란 판단이 섰기 때문이죠."


당시 관광회사 여행가이드로 일했던 그는 이 때부터 교과서를 비롯한 교육자료 수집에만 전념했다. 이듬해인 85년에는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두고 강원도 철원 민통선에서부터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무인도까지 전국 방방곡곡을 뒤졌다.

"12년 전쯤엔 희귀 교육자료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경상북도 청도의 한 마을에 들어갔다가 물난리 때문에 교통이 두절돼 도보로 1시간이 넘는 산길을 걸어간 적도 있어요. 나올 때 사과 한 상자 분량의 자료를 둘러메고 왔는데 어깨에 온통 피멍이 들고 허물이 벗겨지는 등 말이 아니었죠." 그런데도 양 씨는 옛 자료를 얻었다는 기쁨에 겨워 어깨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때론 생명을 위협 당할 만큼의 고초를 겪기도 했다. 양 씨는 30살 되던 해인 지난 86년 어느날 경상북도 봉화군에 거주하는 한 골동품 수집상으로부터 희귀 교육자료를 확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첫 딸을 낳은 지 며칠이 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아이가 출생한 지 '삼칠일(21일)' 안에는 옛 물건을 만지거나 먼 곳 여행을 금하는 것이 통례지만, 희귀자료를 보고 싶은 마음에 잠을 설쳤어요." 그는 옛 교육자료에 대한 참을 수 없는 갈망 때문에 아이가 출생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서 장거리 외유에 나섰다.

"날씨가 제법 쌀쌀했던 꼭두새벽에 아침도 거르고 길을 나섰다가 간이휴게소에 들렀는데 그 곳 난로 위에서 유리병에 담긴 두유를 데우고 있더군요." 양 씨가 공복을 달래기 위해 한참 달아있는 유리병을 들고 뚜껑을 여는 순간, 마치 폭발하듯 유리병이 파열되면서 그 파편들이 왼쪽 눈언저리를 파고들었다.

"터부를 어긴 죄과라고 생각하면서도 인근 약국에서 간단한 응급처치만 한 후 곧바로 수집상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렇게 어렵사리 희귀자료를 구하고 보니 눈 아픈 것도 금방 잊게 되더군요." 하지만 이 일로 양씨는 장기간 왼쪽 눈을 뜨지 못하고 치료에 매달려야 했다.

'붉은 도장' 교과서의 아픈(?) 추억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쉽지 않은 양 씨의 '독특한' 열정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를 캐내기 위해서는 그의 초등학교 시절로 되돌아가야 한다.

"아버지께서 대구에서 서적상을 하셨는데, 각 학교에 교과서를 납품하는 일을 주로 하셨습니다. 그 때는 교과서 구입을 위해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해야 했지만, 저는 아버지 덕에 무료로 교과서를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교과서는 표지에 '비치용'이라는 붉은 도장이 찍힌 것으로 가정 형편이 지나치게 어려운 학생들에게 일부 지급되던 것이었다.

"붉은 도장이 찍힌 교과서는 매우 가난한 처지에 있음을 스스로 내보이는 것과 같았기 때문에 저는 당시 상당한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남들에게 표지를 들키지 않기 위해 늘 신경을 썼죠."

18년 전 한적한 시골의 한 고물상 리어카 위에 폐지로 버려진 옛 교과서가 양 씨의 눈에 전광석화처럼 꽂혔던 것은 이같은 초등학교 시절의 남다른 '아픔(?) 때문이었다.

"끊어진 교육사의 맥 잇고자…"

양 씨가 발굴한 교육자료는 과연 얼마만큼 가치가 있는 것일까. 1895년에 발간된 국내 최초의 역사교과서인 <조선역사>를 비롯, 19세기의 서당교과서, 과거시험 합격증서인 '과거급제교지' 등은 사료적 가치가 비교적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1890년 일본 천황의 의해 반포된 <교육칙어>는 지난 46∼48년 대부분 소각됐기 때문에 양 씨가 가지고 있는 원본이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유일한 것이다.

그러나 양 씨는 "발행연도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골동품으로도 가치가 충분한 것들도 있지만, 이 보다는 해방 직후나 한국전쟁 기간 등 혼란기에 발간됐던 교과서들을 더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양 씨는 자신이 보유한 교육자료 중 가장 가치있는 것으로 51년 한국전쟁 당시 발행된 초등학교 교과서인 <전시생활>이나 군용 교과서인 <군용 셈본> 등을 꼽는다.

"멀지 않은 과거이지만, 당시의 교육자료들은 거의 보존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조선시대 이전 자료들이 더욱 잘 보존돼 있다고 할 정도에요. 끊어진 교육사의 맥을 잇는다는 점에서 이 시기에 발간된 자료들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엄마·아빠 학교 다닐 적에' 전시회

양 씨가 한 때 가족들에게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아가면서까지 수집해 온 옛 교육자료들은 최근에 들어서야 세간의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한국에 신식교육이 도입된 지 100주년 되던 해인 95년 대구의 한 백화점 갤러리에서 '한국교과서 100년전'을 개최했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돼서 교육학자들이나 관계기관에서 자료를 요청해 오는 일이 빈번해 졌습니다." 그는 또한 대구 황금초등학교의 명예교사로 5년째 활동하면서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가 학교 다니던 시절'을 가르치고 있기도 하다.

현재 양 씨는 지난 18년간 축적해온 엄청난 분량의 교육자료들을 동원해 자신의 생애에 가장 큰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다. 오는 7월 20일부터 8월 5일까지 서울 예술의 전당 제3전시실에서 개최되는 '옛 자료로 본 한국교육 변천사-엄마·아빠 학교 다닐 적에…' 전시회가 바로 그것.

이번 전시회는 조선시대, 개화기, 일제시대, 미군정기, 한국전쟁기, 근·현대 등 시기별로 교육 자료관을 따로 마련, 1500년도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교과서, 필기구, 교복 등 다양한 교육자료 변천사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꾸며진다. 또한 이 행사기간에는 서당이나 1970년대 교실, 전통놀이 등을 직접 체험하거나 옛날 교복을 입고 사진촬영을 할 수 있는 체험교실도 운영된다.

양 씨는 "전시회를 준비하는 동안에는 산고에 가까운 고통을 감내해야 하지만, 아이들이 옛 것을 체험하고 기성세대들이 향수를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 없이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는 높은 가격에 교육자료를 구입하겠다는 의사를 타진해 오는 사람들이 많았음에도 불구, 단 한 번도 자신의 교육자료를 팔아본 일이 없다. 돈 욕심이 있었다면 당초 이 길에 들어서지도 않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단 한 가지 욕심이 있다.

"아직 발견하지 못한 교육자료도 많지만, 현재 소장하고 있는 자료들은 이미 포화상태입니다. 이 자료들을 가지고 교육박물관을 만들어보고 싶은 것이 제 소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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