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국소설가협회>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올린 내 글에 '동료문인'이라는 익명을 사용하신 분의 '답변글'이 올라왔다.
'동료문인'이라는 익명도 그렇거니와 문맥으로 보아 <한국소설가협회> 회원 작가임이 분명하신 분 같았다.
익명으로 올라온 글이니 부담 갖지 않고 우선 그 글을 소개부터 해 보겠다.
《오해가 없도록 우선 언론 권력으로의 J신문, 문단 권력으로의 L작가, 그쪽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지요하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거부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나 과거 오랜 동안 우리 역사 속의 2분법적 사고, 하나의 조류에 대한 맹목적 편승, 혹은 그 반대의 死守라는 용어가 붙는 소위 선명성을 내건 투쟁들이 우리들의 삶과 정신세계를 얼마나 황페화시켜 왔나를 문득 생각하게 하는 요사이입니다.
어떤 문제에 대한 의견이나 행동은 어디까지나 개인 의사이며, 더구나 문인의 경우 그것은 몇십곱 강조되어도 부족하지 않을 덕목입니다. 그런데도 어느 한쪽을 강요하거나, 선동하는 듯한 태도는 도리어 역효과를 내게 됩니다.
지요하 선생님이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건 그것은 지 선생님의 권한입니다.
그리고 이미 이 게시판에 같은 의견을 여러 번 올리신 것으로 알고 있고, 읽은 사람들은 지 선생님의 의견을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그동안 그 의견에 동조하거나, 반격하는 글이 올라 오지 않은 것은 그 내용이 별로 흥미를 끌지 못했거나, 솔직하게 끼어들 흥미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이 게시판이 메아리 없는 발언대가 되지 않도록 지금 식의 의견 표현을 자중해 주시기 부탁 드립니다.
누구는 태양이고, 누구는 반딧불이이고, 동갑내기 누구 누구…등으로 표현되는 지 선생님의 의견은 본인 홈 페이지 게시판이나, J신문의 게시판도 있고, L작가의 홈페이지를 이용하실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많은 동료, 후배 작가들이 있고, 소설에 관심을 가진 청소년들이 드나드는 이 게시판이 보다 다양한 의견 교환의 광장이 되기를 기원하면서, 빠른 시일 내에 지 선생님의 뛰어난 문학성의 작품을 독자와 함께 기다리겠습니다.
제 이야기가 실례가 안 되기를 바라면서 더운 날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답변글이 오르자마자 이 글을 반박하는 글들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동안 '평온'을 유지해 왔던 '한소협' 홈의 자유게시판이 돌연 활기를 띠고 소란스러운 양상마저 보이게 되었고, 욕설이 섞인 글도 비집고 올라와서 관리자가 '경고'를 발하는 둥 한결 바빠진 형국이었다.
돌연한 '소란'을 개탄하면서 예전의 '평온'을 그리워하는 글도 오르매, 그 글에 대한 예리한 반박들이 또다시 줄을 이어서, 이에 당황했음인지 관리자가 마침내 내게 이런 제의를 해 왔다.
7월 28일에 게시한 「너무 점잖으신 <한국소설가협회> 회원 작가님들께」라는 내 글을 삭제하고, 내가 언론 개혁과 관련하는 '건의문'을 협회 집행부에 정식으로 제출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한국소설가협회>가 오늘의 언론 개혁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거나 확실한 태도 표명을 하게 되기만 한다면 다 좋다는 생각으로 내 글의 삭제에 동의했다.
관리자는 내 글과 여러 개의 답변글들을 지우고 양해를 구하면서 내가 언론 개혁과 관련하는 건의문을 정식으로 협회 집행부에 제출키로 했음을 게시판에 공지했다. 나로서는 그런대로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었다.
나는 다음날인 어제 (7월 31일) 아침에 <한국소설가협회> 사무실로 정을병 회장님께 언론 개혁 관련 '건의문'을 올렸다. 우선 팩시밀리로 보낸 데 이어 우체국에 가서 '등기 빠름'으로 우송도 했다.
그리고 나는 협회 홈 게시판에 건의문 제출 사실을 공지하면서, 내 글을 삭제한 것에 대해 별다른 오해가 없도록―관심을 가지셨던 모든 분들의 양해를 구하는 글을 올렸다.
나의 건의문은 공개하지 않기로 했는데, 나는 앞으로 당분간 건의문 게시는 하지 않을 생각이다. 어떤 식으로든 협회의 태도 표명이 있은 후에 그 건의문을 공개할 생각인 것이다.
오늘은 위에서 소개한 '동료문인'의 '답변글'을 가지고 얘기판을 한번 벌여보고자 한다. 그렇다고 그가 언급한 모든 사항들에 대해서 얘기를 하겠다는 건 아니다. 이미 여러 가지 사항(맹점)들에 대해서는 여러 건의 반박문들이 명쾌함과 통절함을 잘 제시해 주었다.
내가 오늘 문제 삼고자 하는 사항은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부분―'이분법적 사고'에 관한 것이다.
다시 한번 그가 말한 그 부분을 상기해 보자.
'과거 오랜 동안 우리 역사 속의 2분법적 사고, 하나의 조류에 대한 맹목적 편승, 혹은 그 반대의 死守라는 용어가 붙는 소위 선명성을 내건 투쟁들이 우리들의 삶과 정신세계를 얼마나 황페화시켜 왔나를 문득 생각하게 하는 요사이입니다.'
나는 이 글을 읽고 우선 '이분법적 사고'라는 용어―그 개념부터 깊이 생각해 보았다. 어떤 사물이나 사안에 대해 단 두가지로만 나누어 생각하고 그 가치를 규정한다는 뜻의 이 말은 우선적으로 우주 만물의 기본 원리인 '상대성 원리'를 내포한다. 무엇보다도 '대립항'을 설정하거나 구성하는 용어이므로, 이 용어에는 또한 우선적으로 역동성이 내재한다. 상대성 원리나 대립적 구조는 사실상 엄청난 에너지를 바탕에 깔고 또한 끊임없이 에너지를 분출하는 것이므로, 그것 자체로서 역사 발전의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또 존재한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우주 만물과 더불어 운명적으로 상대성 원리나 대립항의 구조 속에서 살지 않을 수 없다.
그것에 부수되는 것들―이를 테면 대립항의 구조 밖에 존재하는 것들, 즉 어떤 사안에 대한 중립적이고 중도적인 가치 개념 따위는 사실상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것들일 뿐이다. 대립항의 구조 때문에 생겨난 것들이고, 대립항의 구조를 더욱 강고하게 하거나 탄력적으로 만들어주는 속성을 지닐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에게도 '이분법적 사고'의 조건이나 토대는 늘 있어왔다. 또한 그것을 비판할 수 있는 근거는 일정 부분 인정할 만하다.
우선 '해방 공간'과 '6·25 사변'을 중심으로 한 시기를 처참한 살육으로까지 몰아넣었던 '좌·우' 이념 대결을 떠올릴 수 있다. 그 시절의 '좌·우' 이념 대결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이분적법 사고'의 사슬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얼마든지 "우리들의 삶과 정신세계를 얼마나 황페화시켜 왔나를 문득 생각하게 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시기의 시대 조건을 포괄적으로 개괄하면 대립항 구조 이외의 가치 개념을 정립한다는 것조차 사실은 위험한 일이었다. 중립적 가치 개념의 존립 기반 자체가 역사적으로나 시대적으로나 모든 조건으로 볼 때 지극히 부실할 수밖에 없었고, 보통 백성이 아닌 '의지자'들일 경우 오히려 양쪽의 타격 대상이 되는 참으로 큰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해방 공간과 6·25사변을 중심으로 그 전후의 어둡고 처참했던 '좌·우' 이념 대결의 시기를 지나온 후로도 우리는 전반적으로 대립항의 구조 속에서 살아왔다. '이분법적 사고'가 우리의 삶을 지배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옛날의 그 극심했던 '좌·우' 이념 대결의 폐해를 제외하면, 대립항의 구조로부터 우리의 삶에 내재하게 된 폐해는 참으로 불명확하다. 그것은 함부로 속단할 수 없다. 이분법적 사고가 우리의 삶을 황페화시킨 구체적 근거는 도대체 무엇이며, 그 세목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의 대립항 구조―이분법적 사고의 토대는 참으로 명확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단순한 이해 구조 속에서 살아온 것이 아니다. '독재와 민주, 정의와 불의, 진실과 거짓, 최면과 깨어남'으로 규정할 수 있는 거대한 대립 구조 속에서, 그 구조를 스스로 극대화시키며 살아왔던 것이다.
이런 구도 속에서는 중립적 가치 개념이라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하며 거의 필요치도 않다. 민주화를 열망하는 세력이 군사독재정권과 싸우고, 정의와 진실이 불의와 거짓을 상대로 피흘리며 대결을 벌이는 판국에서 중립적 가치 개념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디에 소용이 된단 말인가. 설령 소용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이고 국부적인 아주 미소한 가치일 수밖에 없다.
우리의 현대사를 좀더 진지한 눈으로 살펴보면 우리의 대립 구조―이분법적 사고가 우리 사회를 이만큼 발전시켜 왔다고 볼 수 있다. 그것 자체가 엄청난 에너지를 스스로 생성시키고 분출해 낼 수 있었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오늘 이만큼이라도 굴러올 수 있게 한 것은 실로 그것으로부터 얻어지는 힘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 힘은 오늘에도 끊임없이 우리의 삶속에서 생성하며 분출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어디에서도 이분법적 사고로부터 우리의 삶에 녹아들어 있는 정신적 폐해 따위를 찾아볼 수 없다. 또 그러므로, "∼선명성을 내건 투쟁들이 우리들의 삶과 정신세계를 얼마나 황페화시켜 왔나를 문득 생각하게" 한다는 '동료문인'의 그 말은 너무도 근거가 박약한 일종의 허사요 요설일 수밖에 없음을 직시한다. 또 그러므로, 그 '동료문인'은 '이분법적 사고'라는 용어에 스스로를 단단히 옭아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심히 의심스럽다. 말하자면 그런 용어가 그에게 이미 '고정관념화'되어 있으리라는 얘기다. 고정관념이 하나의 '화석'임은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우리의 대립 구조―이분법적 사고 체계가 우리의 삶속에서 오히려 미약했음을 진단한다. 역사의 굽이굽이에서 그것이 좀더 치열하고 철저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갖는다. 대중이 좀더 민중으로 승화하고, 그 민중적 에너지가 좀더 크고 웅혼했더라면, 우리가 오늘 언론 개혁이라는 또 하나의 대명제와 정면으로 맞닥뜨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언론 개혁이라는 오늘의 대명제 역시 우리가 끊임없이 추구하며 나아가야 할 '역사 발전'의 한 장엄한 과정임을 어쩌랴!
이 장엄한 역사 발전을 우리가 잘 갈무리하며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오늘 대립항의 구조―이분법적 사고 체계를 더욱 분명히 해야 한다.
'정의와 불의, 진실과 거짓, 발전과 퇴보'라는 이름의 상대적 관점을 더욱 엄정히 함으로써만 우리는 진정한 언론 개혁과 역사 발전을 동시에 잘 이루며 나아갈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학설이 아니더라도, 이 세상은 '상대성 원리'에 의해 존재하며 발전한다. 상대성 원리는 곧바로 '운동성'을 의미하고, 운동성은 또 곧바로 창조와 발전을 의미한다. 그 속에 '진보'가 내재하는 것은 물론이다.
'인류는 진보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 평범하면서도 장엄한 진리를 오늘 다시 한번 가슴 깊이 명심하고 되새기며 나아가자.
대한민국의 언론 개혁―역사 발전의 저 지평을 향하여!
2001년 8월 1일
충남 태안의 반딧불이 작가 지요하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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