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훈련소 제28교육연대장 문영창 대령이 준 거금 3천원도 내 호주머니 안에 있겠다, 나는 부자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강원도 화천의 <제7보충교육단>에서 '파월교육'을 받는 4주 동안 나는 집에 편지 한번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몰래 살며시 월남에 갈 요량이었습니다. 집에서 떠안게 될 걱정에 대한 부담도 컸지만, 만일 가족들이 날 배웅하려고 부산항까지 내려오게 되면 그 비용 부담이 얼마나 클 것인가. 그 비용 걱정 때문에도 나는 집에 나의 파월 사실을 알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 정도로 우리집이 가난했다는 얘기지요.
그런데 거대한 미국 수송선에 몸을 싣고 부산항 제3부두를 떠나갈 때는 눈물이 나더군요. 수많은 장병 가족들이 부산항 제3부두를 꽉 메우고는 각기 배웅을 하느라 난리였습니다. 파월 장병의 이름과 계급, 출신지 따위를 큰 글씨로 적은 피킷들을 곧추세우고 흔들며 배의 갑판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비닐로 싼 고추장 덩이와 된장 덩이를 야구공처럼 던지고 하는 장면은 가히 장관이었습니다. 파월 장병들도 배의 갑판 가장자리에 빽빽히 몰려서서 함께 소리를 지르고 모자를 벗어 흔들고 날아오는 것들을 받고 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 장면을 나는 갑판의 후미진 한 켠에 서서 말없이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참 쓸쓸하더군요. 어머니 아버지와 형제들이 갑자기 보고 싶어지는 마음도 한량없는 것만 같고…. 내가 무사히 살아 돌아와서 가족들을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방정맞은 물음표도 자꾸 내 가슴을 찔러대어 한결 슬프게 하는 것만 같고…. 파월 사실을 집에 알리지 않은 것이 조금은 후회스러워지기도 하더군요.
월남에 도착한 나는 당연히 전투중대의 전투병이 되었지요. 백마사단 도깨비연대 1대대 1중대 3소대 화기분대가 내가 명줄을 걸고 있는 곳이었지요. 1중대는 악명 높은 홈바산(일명 호지명산)의 턱 아래, 육로가 없어서 헬기로만 수송이 가능한 공수기지에 있었고….
나는 월남에 도착한 후에도 1중대 공수기지의 지하 벙커에 잠자리를 잡고 나서야 집으로 편지를 해서 월남에 온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때 집에서 가족들이 안게 된 그 '놀람'에 대해서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나는 이런 저런 과정을 거쳐 이듬해인 1971년 4월 경에는 대대 본부중대 경비소대에 거처를 두게 되었습니다. 대대 본부중대의 경비소대는 좀 특이한 부대였지요. 거의 '반창고' 출신 병사들로 이루어진 소대였으니까요. 병원에서 퇴원한 전상병들을 원대 복귀시키지 않고 귀국할 때까지 안전한 곳에서 생활하도록 하는 '배려'에 의해서 생겨나고 유지되는 소대였지요.
그 '반창고 소대'에서 생활할 때 나는 제7대 대통령 선거를 맞았습니다. 1971년 4월 27일에 시행된 제7대 대통령 선거는, 삼선 개헌을 밀여붙여 성공한 여세로 삼선을 노리는 박정희 민주공화당 후보와 40대의 기수 김대중 신민당 후보 간의 대결이었지요.
나는 월남의 병영 안에서도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통령 선거전의 양상을 훤히 알 수 있었습니다. 새벽이면 아슬아슬하게나마 전파가 잡히는 KBS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도 알 수 있었고, 일주일이나 열흘 정도 지난 상태인 한국 신문들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상황을 종잡을 수 있었지요.
그때 나는, 지금도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장두만이라는 친구와 우리 나라의 정치 상황 등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경북 의성 출신인 그 친구는 대학에 다니다가 입대한 친구였습니다. 제대 후에 복학을 하기 위해서, 학자금 마련을 위해서 월남에 왔노라는 솔직한 고백으로 내 가슴에 거의 동질감적인 호감을 심어준 친구였지요.
그 친구는 우리 나라의 정치 상황이며 사회 문제 등에 관심이 많았고, 그만큼 아는 것도 많았습니다. 자연 우리들의 대화는 참으로 진지했고, 수많은 화제들이 우리 두 사람의 대화에 오르곤 했지요. 그리고 매번 의기투합을 이루곤 했지요.
그 친구는 고국 부대에 있을 때 공개 투표 때문에 자신의 뜻과는 달리 삼선개헌에 찬표를 던진 것을 고백하며 몹시 부끄러워했습니다. 나처럼 용감하게 반대쪽에 기표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곤 했는데, 그런 감정 때문에 박정희씨를 더욱 증오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반드시 김대중씨를 찍겠다고 별렀습니다.
분명히 경상도 출신임에도, 경북 의성 땅의 수백 년 묵은 뿌리의 자손이어서 사투리가 심한 편인데도, 그에게서는 지역감정 같은 건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때 지역감정이라는 말조차도 듣지를 못했습니다. 그랬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지역감정이라는 이름의 망령은 우리의 생활 공간에 분명히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내 기억의 후미진 구석 구석까지 다 뒤져봐도, 나는 그때 지역감정이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없습니다.
나는 자신 있게 단언할 수 있습니다. 1971년의 제7대 대통령 선거 때만 해도 지역감정의 망령은 우리 나라의 정치판에서도 횡행하지를 않았던 겁니다. 그래서 호남 출신인 김대중씨가 정치 '경력'이 다소 앞서는 영남 출신 김영삼씨를 누르고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나는 반창고 소대의 고참이기도 한 장두만으로부터 많은 것을 듣고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는 정말 아는 것이 많았습니다. 그런 그는 오래 국회의장을 했던 이효상씨를 몹시 증오했습니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참으로 의미롭고 재미있는 이유였습니다.
1963년 가을에 실시됐던 제5대 대통령 선거―'민정 이양' 후의 첫 번째 대통령 선거는 군복 벗고 출마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후보와 제2공화정 내각책임제 시절에 대통령을 지냈던 민정당 후보 윤보선씨 간의 대결이었습니다. 그런데 선거전이 치열해짐에 따라 불안을 느낀 박정희 후보 쪽에서 이효상씨가 나서서 나쁜 짓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효상씨가 대구 지방의 유세장에서 연설을 하면서, "경상도 문딩이가 경상도 문딩이를 찍어야지 누굴 찍겠노. 우리 경상도 문딩이들이 뭉쳐야 한데이."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갖고마, 경상도 지방에서 부분적으로 박정희의 표 집결 현상이 일어나긴 했지. 그래서 박정희가 윤보선을 간신히 이기는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셈이 됐고…."
이효상의 그런 발언은 아주 나쁜 저질 발언이라는 것이 장두만의 주장이었습니다. 경상도 지역에서부터 이효상의 그런 발언을 비난하는 말들이 많아서, 1967년의 제6대 대통령 선거 때는 이효상이 그런 발언을 자제하였노라는 말도 장두만은 덧붙였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한솔 이효상이 1963년에 벌써 대구 지방의 유세상에서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저질 발언을 함으로써 부분적으로 박정희 표의 결집 현상을 가져오긴 했으나, 그것이 곧바로 지역감정의 불씨를 피워내는 단계로까지 발전하지는 않았다고 추정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장두만의 말이 사실이라면, 경상도 지역에서부터 이효상의 그런 저질 발언을 비난하는 말들이 많았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 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것이 어쩌면 윤보선 씨가 호남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긴 합니다만….
그러나, 1971년의 제7대 대통령 선거는 호남 출신인 40대의 기수 김대중이 박정희의 상대였음에도, 아직 지역감정의 망령이 소매를 걷어붙이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가 참으로 그리워해야 할 사항이라고 여겨집니다.
또 그러나, 망국적인 지역감정의 불씨는 이미 1963년의 제5대 대통령 선거 때부터 마련되어서 서서히 그 흉흉한 모습이 잠복의 형태로 자라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렇게 보는 것이 전적으로 옳을 듯싶습니다. 그것에 관한 설명은 차차 (다른 이름의 글에 가서) 하기로 하죠.
장두만은 내게 삼선개헌을 반대한 이유를 묻기도 했고, 박정희를 싫어하는 이유를 묻기도 했습니다. *
(계속)
2001년 8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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