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대한 기억 ④

지요하의 <참된 세상 꿈꾸기>

등록 2001.08.17 08:17수정 2001.08.17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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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지 1971년의 제7대 대통령 선거 당시 월남에서의 나와 장두만 사이에서는 지역감정과 관련하는 얘기까지 오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때까지는 지역감정이라는 것이 우리 사회에 아직 큰 문제로 대두되지 않았으니까요. 거듭 말하지만, 우리는 '지역감정'이라는 말도 거의 듣지 못하고 있었으니까요.

반창고 소대 고참병인 장두만은 내가 설파한 삼선개헌을 반대한 이유와 박정희를 싫어하는 이유들을 깊이 공감해 주었습니다. 경북 의성의 수백년 묵은 토박이인 그는 나보다도 더 박정희를 싫어했습니다.

김대중의 그 예언이 들어맞아서 박정희가 이번에 또 당선되고 난 다음 삼선개헌 이상의 어떤 또다른 형태의 장기 집권을 시도한다면 박정희는 역사의 죄인이 되고 말 것이라는 말도 했고, 박정희가 또 만일 영남 지방의 지역감정을 크게 유발시키는 짓을 한다면, 그것 또한 역사의 단죄를 면치 못할 것이라는 말도 했습니다.

나는 어쩌면 장두만의 그런 말 때문에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이름을 잊지 않고, 어떤 희망과 존경심을 싸안은 마음으로 그를 즐겁게 기억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장두만과 나는 박정희가 친일파였다는 사실은 그 당시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일본의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본토 육사를 나온 관동군 장교로서 독립군을 토벌하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그리고 '여순반란사건' 당시 혼자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수많은 동지들을 밀고했던 좌익물이 든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지요.
그런 것에 관한 얘기는 한마디도 나눈 기억이 없으니까요.

하여간 월남 땅에 와 있는 우리에게도 대통령 선거는 남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월남 땅에서 투표를 하게 되리라는 것에 이상한 긴장과 흥분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다시 공개 투표가 자행된다 하더라도(그것은 십중팔구 명약관화한 일이니까 단단히 각오를 하고), 반드시 김대중을 찍기로 서로 굳게 약속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날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부재자 투표가 실시되는 때에 맞춰 개시된 '주월사 작전' 때문에 우리는 보름 동안이나 산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대부대 작전으로서는 가장 상위인 '한·미·월 연합작전'이라고 했다가 '주월사 작전'으로 바뀐 그 작전에 다른 속내가 있는지 없는지는 우리 같은 졸병들로서는 알 길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여간 부재자 투표 시기에 실시된 가장 큰 규모의 대부대 작전 때문에 주월사 예하 부대의 부재자 투표는 자동적으로(거의 자연스럽게) 유실이 되고 만 것이었습니다.


장두만과 나는 월남 땅에서 투표를 해 본 경험을 갖지 못하게 된 것이 너무 아쉬웠지만, 누구에게 불평 한마디 해 볼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군대에서는(특히 월남에서는) 최고로 끗발이 좋은 '광땅대(보안대) 친구들의 눈치도 무시할 수가 없었으니….

그런데 그때 우리는 우리가 부재자 투표를 하지 않았어도 투표를 한 것처럼 꾸며져서 박정희에 대한 지지표 속에 보태졌을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쩌면 주월사 5만 병력의 표가 몽땅 그런 식으로 박정희의 표가 되어 고국 땅으로 실려갔을 거라는―그런 생각도 우리는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 묻겠습니다. 1971년 4월 27일에 실시되었던 제7대 대통령 선거 직전에 월남에서 부재자 투표를 하셨던 분이 혹시 계십니까?
그리고, 주월사 장병들의 표를 박정희 지지표로 바꾸는 작업에 참여했던 분은 혹시 안 계십니까?

그 선거에서 박정희는 결국 삼선에 성공했고, 40대의 기수 김대중 신민당 후보는 90만 표 차이로 고배를 마셨습니다.
표차는 90만 표였지만, 나와 장두만은 김대중이 이긴 선거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선거에서는 이기고 표에서 졌다는 얘기였지요.
우리는 그 90만표에서 우선 군대 표 60만 표는 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일부 공무원 표와 갖가지 원천적인 부정에 의한 표를 빼면 김대중이 이긴 선거라는 결론이었지요.

실제로는 김대중 씨가 이긴 선거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할 정도로, 김대중 씨가 완패나 참패를 당하지 않고 '석패'를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건 내가 세월이 흐른 후에 생각을 한 것입니다만,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그때는 아직 지역감정의 망령이 마구 설치지 않을 때였으므로, 사실은 그 덕이 가장 크지 않았을까요?
김대중 씨가 1971년의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지역감정의 피해를 크게 입지 않았다는 사실―그것은 우리가 그리워해야 할 사항이 아닐까요?

세월은 앞을 향해 흐르고 흘러 연기(年紀)의 숫자들을 하많이 쌓아왔는데, 왜 우리 국민의 정신세계는 오히려 뒷걸음을 치며 지역감정의 흉령에 사로잡혀 살아왔는지, 그리고 왜 지금도 이 모양 이 꼴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부끄럽고도 참담할 심정일 뿐이지요.

나는 월남에 간 죄로, 투표권을 갖게 된 이후 최초로 맞은 1971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를 하지 못한 것이 지금 생각해도 못내 아쉽습니다. 아무래도 십중팔구는 내 표를 도둑맞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 더욱….
그리고 장두만과 내가 공개 투표 상황과 상관없이, 그럴수록 더욱, 반드시 김대중 씨를 찍겠노라고 했던 그 결심과 약속을 실행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지만 그때의 이심전심과 의기투합에 의해 장두만과 실로 많은 대화를 나누며 내 시야를 더욱 확장시킬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리하여 오늘 경북 의성 사람 장두만의 이름을 환히 기억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월남에 갔던 것이 더욱 다행스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사족(蛇足) 하나

나는 중학교 1학년 때 5. 16쿠데타를 맞았습니다. 처음에는 신문에 나는 박정희 소장의 사진이 참 멋있게 보였습니다. 별 두 개가 달린 모자며, 검은 안경이며….
그런데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 나는 박정희를 부정적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1964년 '6. 3사태'를 치르면서 박정희의 대일 굴욕외교의 실상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던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신문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한자가 너무 많아서 읽기가 몹시 어려웠지만, 한문에 통달하셨던 아버지로부터 한자를 배울 겸 열심히 신문을 읽었지요.
당시 우리집은 가난한 살림에도 <동아일보> 뿐만 아니라, 천주교 재단에서 운영하던 <경향신문>도 구독하고 있었지요. 당시에 경향신문의 논조는 동아일보보다 한결 '반골'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무래도 그 영향이 컸을 듯싶습니다.

언젠가 나는 내 '원고 궤짝'을 정리하는 일을 하다가, 고등학생 시절에 지은 많은 글 공책 속에서 박정희를 비판하는 글들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지요. 고등학교 2년 생의 박정희에 대한 비판이 참으로 치열했더군요. 논리도 제법 정연했고…. 지금도 그 글들을 잘 간직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지요.


사족(蛇足) 둘

나는 월남에서 받는 상병 45불, 병장 54불의 전투 수당을 피같이 아껴 모았습니다. 고국에 돌아와서 군표들을 한국 돈과 바꾸니 30만원 가까운 돈이 손에 쥐어지더군요. 월남에 가기 위해 쓴 '뇌물' 3천원의 무려 백 배에 달하는 금액이었지요.

그 돈을 도둑맞지 않기 위해 밤에는 잠도 제대로 못자고, 무사히 집에 돌아온 나는 그 돈을 모두 부모님께 드렸지요. 부모님은 그 돈을 모두 내 누님의 결혼 비용으로 쓰셨고…. 내가 월남에서 목숨 걸고 벌어온 돈이 있어 내 누님은 그런대로 혼수를 장만해 가지고 시집을 갈 수 있었던 거지요.

그때부터 내 누님은 동생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한량없었던 것 같습니다. 동생을 안쓰럽게 여기는 마음이야 누님의 기본적인 품성이지만…. 친정 부모를 생각하고 동생들을 생각하는 내 누님의 마음은 한도 끝도 없답니다.

너무 사사로운 얘깁니다만, 내가 보증빚의 깊은 수렁에 빠져서 6년 동안 무려 1억 4천만원의 빚을 갚으며 죽을동살동 살 때도 누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요. 누님의 도움이 없었으면, 초등학교 교사인 아내의 월급과 내 알량한 고료 수입을 털어 매월 빚잔치에 열중해야 했던 그 피눈물 세월을 어찌 살았을지….
지난 초복 때도 누님이 보내 준 돈으로 어머님 모시고 두 형제 가족이 멍멍탕 전문집에 가서 냄비 전골을 푸짐하게 즐겼지요. 오는 말복날도 그럴 것 같고….

내 글을 읽으시고 공연히 또 화를 내실 분도 계실지 모르는데, 가난한 형편에도 늙으신 어머니 잘 모시고 형제 간에 우애하며 화목하게 사는 우리집 풍경을 상상하시면서 그 노여운 마음을 가라앉히시기 바랍니다. *


2001년 8월 11일
충남 태안의 반딧불이 작가 지요하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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