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엄 회장이 당신들의 사표?

등록 2001.08.22 09:37수정 2001.08.22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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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포스트>의 사주인 캐서린 그레이엄 회장이 타개한 뒤 '언론여제'의 업적을 칭송하는 미국 언론들의 합창이 아직까지도 드높은데 언론사 세무조사로 수세에 몰려있던 한국의 조.중.동 역시 그레이엄 여사의 타계란 소재를 활용해 어떻게든 사주 변호를 하려고 애를 쓴 바 있다.

그렇다면 과연 그레이엄 회장은 조.중.동의 기대처럼 바람직한 언론사주의 사표라는 칭송을 들을 만한 공정한 인물이었을까?

언론비평가 노먼 솔로몬은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에 기고한 칼럼에서 그레이엄 여사가 공정보도라는 이름과는 거리가 먼 기득권층의 대변자였을 뿐이며 특히 미국이 베트남전의 수렁에서 헤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보수신문의 수장에 불과했다고 비판한다.

미국이 베트남전에 참전하게 된 구실이 됐던 1964년의 통킹만 사건이 CIA의 자작극이었음은 이제는 잘 알려진 사실. 솔로몬은 <워싱턴 포스트>가 통킹만 사건 발생 초기부터 국방부 내부 문건을 통해 이 사건이 베트남전 참전을 합리화하기 위한 미국의 자작극이었음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참전논리를 퍼뜨리는데 앞장서 왔던 그간의 논조를 밀어붙이기 위해 이를 의도적으로 외면했다고 주장한다.

솔로몬은 당시 통킹만 사건을 취재했던 워싱턴 포스트의 머레이 마더 기자를 인터뷰했는데 그에 따르면 개전의 구실이 된 미군 전함의 피격사건이 발생하기도 전에 이미 월남군의 전함이 북베트남에 대한 함포사격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나름의 취재를 통해 통킹만의 진실을 제대로 알리기도 전에 <워싱턴 포스트>의 수뇌부가 이미 미국 정부의 베트남전 참전을 비호하는 쪽으로 일찌감치 편집방향을 잡았다고 증언한다.

실제로 워싱턴 포스트는 베트남전을 전후로 헨리 키신저를 비롯한 온갖 보수 논객들을 동원해 백악관과 국무부 및 국방부에 포진한 매파 주전론자들의 입장을 옹호하는데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했다. 그 동안 베트남의 정글에서는 수십만의 죄없는 베트남인들과 미국의 젊은이들이 무고한 피를 흘려야 했다. 조선일보가 과거 독재정권 시절에 학생운동권과 민주화세력을 좌경 폭력 세력으로 몰아 여론 폭격을 먼저 하고 나면 마치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으레 안기부와 검찰의 검거선풍이 뒤따랐던 것과 지극히 흡사한 모습이다.

솔로몬은 퓰리처상까지 수상한 그레이엄 여사의 자서전 역시 언론사주의 덕목인 공정성과는 거리가 멀다고 지적한다. 600여 페이지가 넘는 그의 자서전에는 고관 대작들과 거대 기업의 경영자들을 비롯한 기득권층의 실력자들이 즐비하게 등장하지만 정작 워싱턴 포스트가 이들의 이데올로그 역할을 도맡았던 과오에 대해서는 전혀 반성이 없다고 비판한다.


이렇게 기득권 엘리트에는 많은 지면을 할애한 것과는 반대로 ‘60년대 미국 민권 운동사의 핵심적 인물인 마틴 루터킹 목사에 대해서는 단 한 줄의 언급도 없다는 것이다. 또 기성 언론이 그레이엄 여사를 남성사회에서 자력으로 성공한 고독한 여권주의자의 상징처럼 그리고 있지만 그녀의 자서전에는 중.하류층 및 유색인 여성의 권익 옹호에 대한 배려 역시 찾아보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솔로몬은 이렇게 기득권 편향 일색인 그녀의 자서전에서 공정보도를 사명으로 삼아야 할 언론사주의 덕목을 하나라도 발견할 수 있느냐고 비판한다. 그는 그레이엄 여사에게 <워싱턴 포스트>를 물려준 그녀의 남편 필립 그레이엄이 "언론은 역사의 첫번째 기록자"란 어록을 남겼음을 상기시키면서 과연 그레이엄 여사가 사주로 재직하던 때의 워싱턴 포스트가 공정한 역사의 기록자였는지 되묻고 있다.


역사의 공정한 기록자로 남기보다는 수구 기득권 세력의 적극적인 이데올로그로서 단물을 빨아온 한국의 조.중.동이 그레이엄 여사의 죽음을 활용해 자사의 사주들을 언론 순교자로 그려보려 애쓰는 모습은 이래서 더욱 희극적일 수밖에 없다. 하긴 그레이엄 여사의 ‘일편단심 기득권 편향’이라는 신조를 본받고 싶은 것이 본심이라면 그나마 일관성이 있다는 칭찬을 들을 수는 있을 것이다.

j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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