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사람은 강하다

등록 2001.08.25 02:19수정 2001.09.03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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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문화재단에서 작가·시인 등에게 문예창작지원금을 수여하는 행사장에 다녀왔다. 대산문화재단은 교보문고에서 운영하는 재단으로 여러 가지 비영리 문화사업을 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슨 무슨 문학상을 수여하는 행사장이라는 것은 어디나 그렇듯 붐비게 마련인데, 그곳은 속된 말로 돈을 받는다는 인상이 강해서 그런지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수상자들이 하객을 많이 부르지 않은 탓이겠다.

그래도 문학인들이 모이는 곳은 조금씩은 붐비기 마련이다. 우리나라는 작을 뿐더러 '중심'이 하나여서 작가나 시인들이 서로 아는 사람 많고 자연스레 인사말도 오가고 이야기꽃이 피어난다. 또 그렇게 모여 지원금을 받는 행사나 다과회가 끝나고는 적당히 어울려 근처 찻집이나 술집으로 몰려가게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문학은 고독한 작업이건만 문학인들이 한데 모인 곳은 늘 소란스럽고 분주해 보인다.

그날도 속인(俗人) 벗어나지 못한 우리 문학인들이 서로 아는 체 하면서 인사도 하고 사람 소개하고 소개받고 농담도 주고받고 하다가 자리가 파할 때 되어 함께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행사장이 9층이었던가? 교보빌딩의 엘리베이터는 1층부터 10층까지 운행하는 엘리베이터가 따로 있어 젊은 작가·시인들이 모두 그 앞에 북적거리게 되었다.

그때 나는 어느 여인에 무심코 눈이 갔는데 누군가 그녀를 가리켜 김채원이라고 하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그 행사의 소설 쪽 심사위원 가운데 김채원이라는 이름이 있었다는 생각이 났다. 그녀는 작고 가냘프게 보였는데 벽에 등을 기대고 새초롬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저 여인이 [겨울의 환(幻)]을 쓴 작가였나?'

사람들 모두 타도 넉넉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바깥을 보니 오로지 단 한 사람 그녀만 여전히 홀로 벽을 기대고 서서 엘리베이터에 들어선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빛은 우리들 중 누구도 초점을 맞추어 응시하는 것 같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벽에 기대어 문이 닫히는 엘리베이터 쪽을 향해 서 있을 뿐이었다. 여인이 지닐 법한 표정을 지닌 채. 그런데 그런 그녀는 뜻밖에도 강해 보였다. 나는 사람들에게 그 분만 두고 다 탔으니 누구 한 사람 올라가서 다시 모셔 오는 게 어떠냐고 말했으나 반응은 없었다. 나도 홀로 남은 그녀를 무리들 속으로 데려오는 일은 쉽게 포기했다.

대신에 다만 생각했다. 그 표정은 그녀를 바라보고 서 있던 타인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홀로 남은 그녀 자신을 위한 것이리라고.


다른 사람 모두 곁에 없고 자기만 홀로 남은 것 같을 때 사람들은 외로움과 함께 어떤 만족을 느낀다. 그것은 자기가 홀로 있을 수 있음을 대견해 하는, 자기를 향한 사랑이다. 그것은 외로움을 기꺼이 견디겠노라는 자기 승인이다. 외로움의 향유이다.

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는 자기의 눈을 사람들의 시선 여유롭게 피하며 몸 아래로 내리깔았던 듯하다. 하얀 블라우스 위에 하얀 얼굴에 검은 눈썹이 짙었다. 나는 그 외로운 인내가 보기 좋았다.

그러나 모를 일이다. 그녀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어떤 포즈를 상상하고 있었는지도. 그렇다면 바로 그것이 작가이다. 그렇다 해도 그 순간 그녀는 강해 보였다.

더 오래 더 홀로 있을 수 있는 이는 더 강한 사람이리라. 인생을 자기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그러려고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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