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 박종웅이 지금 국회 의원회관에서 단식을 계속하고 있다. 이유는 정부의 '언론탄압'에 항의하기 위해서란다. 그러니까 자신의 관점인 '민주당 정권의 언론탄압'에 대한 투쟁인 셈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그 단식에 '투쟁'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는다. 내가 파악하고 인식하는 한 '투쟁'이라는 단어는 숭고한 뜻을 포유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정치적 사회적 약자가 최소한의 사회정의와 사회공동선을 쟁취하기 위해 벌이는 희생적이고 장엄한 행위가 바로 '투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참으로 오래 지속될 수 있는 숭고한 '생명력'을 지니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뜻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포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박종웅이 과연 정치적 사회적 약자일까? 정부의 언론사에 대한 세무 조사와 탈세 사주 구속 등 언론 개혁을 위한 일련의 조치들이 명백한 언론 탄압이라고 하는 그의 인식이 과연 저 저변으로부터의 폭넓은 사회적 함의를 지닐 수 있는 것일까?
수많은 사람들에게 각성을 안겨주고, 진정한 공감을 나눠주며, 그 의의가 오래 오래 하나의 생명력으로 지속될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는 자신의 그런 엉뚱한 행위에 대해서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는 것일까? 정말 속이 켕기는 구석이 전혀 없는 것일까?
그는 자못 비장한 마음으로 목숨을 걸고(?) 그렇게 열심히 단식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볼 때는 하나의 저급한 해프닝에 불과하다. 훗날 방송사의 코미디언들이 즐겨 코미디 소재로 써먹을 수 있는 조금은 고급스러운(?) 코미디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나라 정치판에 득시글거리는 돈 키호테들의 유치한 의식 수준을 축약해서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조악한 행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오늘 말(馬)에서 내려 무거운 갑옷을 벗고 자리를 펴고 편안히 누운 한국판 돈 키호테의 비장한 모습을 본다. 갑옷보다 더 무거운 후안무치의 철갑을 두른 그의 모습을….
그는 5공 시절 그의 정치적 아버지인 김영삼 씨가 23일 동안이나 단식 투쟁(그때는 명실공히 '투쟁'이었다)을 할 때, 그 단식 투쟁 사실이 전혀 보도 한 줄 되지 않던 그 엄혹한 언론탄압 시절에는 왜 같이 단식 투쟁을 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리고 그는 김영삼 문민정권 시절 열렬히 '언론 개혁'을 주장했으면서도, 1994년 김영삼 씨가 은밀히 언론사들에 대한 세무조사를 하고서도 그것을 발표하지 않고 족벌 언론사들과 뒷거래를 한 사실을 잘 알았으면서도, 그때는 왜 분연히 일어서서 단식 투쟁을 하지 않은 것일까? 왜 그렇게도 시기를 못 맞추는 것일까?
오늘 정부의 언론탄압에 맞서 싸운다는 명분으로 단식을 하고 있는 한나라당 국회의원 박종웅은 내가 위에 적은 의문들에 대해 명백한 해명을 해야 한다.
그 의문들에 대해 명백한 해명을 하지 못할 경우 그의 오늘의 단식은 돈 키호테식의 무모하고도 유치한 행태라는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박종웅의 자못 비장한 단식을 보며 그것을 해프닝과 코미디 수준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나는 서글프기만 하다. 이런 글을 써야 하는 내 처지에 대한 안타까움도 크다.
그러나 이왕 나선 김에 박종웅을 동정하는 내 마음도 피력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은 그를 동정하고자 하는 측은지심이 나로 하여금 오늘의 이런 글을 쓰게 했다.
나는 오늘 우습고도 부끄러운 내 어린 시절의 모습 한 가지를 반추한다. 1950년대의 풍경이다. 제3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되었던 1954년의 일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그때 만 다섯 살 어린 나이였다. 매일같이 선거운동원들의 확성기 소리를 들어야 했다. 어린 나는 그 연설들의 내용을 모르면서도, 그 열렬함과 확성기의 신기함 때문에 모든 선거운동원들의 연설들을 재미있게 귀담아들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머리가 나쁘지는 않았던 듯 그 연설들을 한번 들으면 거의 외우다시피 기억을 했던 모양이다.
어느 날부터 나는 모든 정당과 무소속 후보들의 선거운동원이 되었다. 동네 '읍마당' 한켠에다 나무 토막을 놓고 그 위에 올라서서 연설을 해대기 시작했다. 선거운동원들의 연설을 거의 그대로, 목소리까지 흉내내서 열렬히 반복 연설을 하는 것이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내 연설을 들었다. 땟국물이 흐르는 배때기를 연방 내보이며 목청껏 신나게 연설을 해대는 나를 보고 어른들은 배꼽을 잡고 웃기도 했고, 옳소! 잘한다! 하며 박수를 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금세 동네의 명물이 되었다. 때로는 심심한 어른이 나를 불러내서 눈깔사탕을 주고 읍마당에다 궤짝 같은 것을 놓아주기도 했다. 나는 한 번 연단 위에 올라서면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저녁 저자를 보러 갔던 아낙네들도 머리에서 푸성귀 광주리나 갯것 바구니를 내려놓고 한참씩 내 연설을 들으며 웃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른들이 내 연설을 들으며 배꼽을 잡고 웃었던 것은 내가 여러 후보 또는 선거운동원들의 연설을 뒤섞어서 '짬봉'식으로 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자유당 유순식 후보의 연설을 하다가 느닷없이 무소속 이경진 후보의 연설을 하니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참 세월이 흐른 후 고등학생 시절이었던가, 우리집에서 내 유년 시절의 '읍마당 연설' 얘기가 화제로 오른 적이 있었다. 그때 어머니가 하신 말 한마디가 지금도 명료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연설을 기막히게 잘했지만, 지조는 없었어."
물론 우스개 말이었지만, '지조가 없었다'는 어머니의 그 말은 나의 그 '짬뽕식' 연설을 지적하시는 말이었다. 어머니는 그 말 다음에 "사람은 지조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도 하셨다.
그때부터 나는 '지조'라는 말의 뜻을 가슴에 새겼다. 그러자니 내 유년 시절의 그 짬뽕식 연설이 괜히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정말이지 나는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는 누구에게도 절대로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고 살기로 결심했고, 그러려면 지조를 잃지 말아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지조를 지키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그후에도 내 유년 시절의 '읍마당 선거 연설' 얘기는 우리집에서 종종 화제로 오르곤 했는데, 한번은 어머니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
"그때는 동네 어른들이 탄복을 하시면서, 장차 큰 인물이 될 거라고 하셨는데…."
어머니의 그 말을 상기하면 나는 너무 부끄러워진다. 큰 인물은커녕 작은 인물도 되지 못했다. 어언 오십을 넘긴 이 나이에도 나는 여전히 너무도 꾀죄죄하고 오종종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겉모양이야 어쩔 수 없이 그렇다치더라도, 내면의 품성까지도 꾀죄죄하고 오종종한 사람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생각만큼은 지금도 단단히 하고 있다. 내 나름껏 올곧게 지조와 품성을 지키며 살고 있다고 자부한다.
현실적인 이해 타산에 스스로 목을 매고 음지에서 양지로, 또는 마른 자리만을 찾아 지조고 뭐고 다 팽개치고 분별없이 짬뽕식으로 사는 인간들이 우리 주변에는 얼마나 많은가. 특히 그런 인물들이 우리 정치판에 하많은 현실을 나는 슬프게 생각한다.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 때의 풍경 한 가지도 내 기억에 선연하다. 3월 어느 날, 태안읍 시가지의 정중앙인 사거리 한복판에서 자유당 선거운동원의 연설이 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정 형편으로 중학교 진학을 일년 후로 미룬 나는 심심하기도 해서 선거 유세장을 열심히 쫓아다녔다. 그런데 그날의 자유당 선거 유세장에서는 매우 충격적인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선거운동원은 젊은 사람이었다. 그는 연설을 참 잘했다. 온몸을 흔들며 시뻘겋게 피가 끓어오르곤 하는 얼굴로, 참으로 열정적으로 연설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돌연 연설을 멈추더니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접힌 종이였다. 그는 그 종이를 연설대 위에다 펼쳐놓았다.
그러더니 그는 또 돌연 이빨로 손가락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오른손의 인지였다. 우리 어머니가 내 동생들에게 약을 먹일 때 숟가락에 담긴 약가루와 물을 살살 펴서 섞곤 하는 손가락, 인지라고 일러주신 손가락이었다.
그가 인지 끝을 몇 번 물어뜯고 나니 그의 그 손가락에서는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손을 쳐들고 손바닥으로 흐르는 피를 보여 주었다. 그러고는 그 손가락의 피로 연설대 위에 펴놓은 널따란 백지에다 글씨를 쓰는 것이었다.
"혈서다, 혈서!"
"저 사람이 혈서를 다 쓰네. 증말루 대단헌 사람이구먼!"
"이승만 대통령헌티 큰 공을 세우는구먼그려."
사람들의 그런 말들이 내 귀에 들렸다.
이윽고 청년을 혈서 쓰기를 마쳤다. 그는 참으로 비장한 표정이었다. 그 청년은 내가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비장한 표정으로 혈서가 씌여진 백지를 두 손으로 높이 들어올렸다. 나는 그 백지의 혈서를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이승만 박사 만세! 이기붕 선생 만세!'
그 청년은 자신이 만든 그 백지 혈서를 두 손으로 높이 쳐든 채 여러 번 "이승만 박사 만세! 이기붕 선생 만세!"를 외쳤다. 꽤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나는 온몸이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감히 박수도 치지 못하고, 경탄의 눈으로 그 청년의 비장한 모습만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그가 연단에서 내려와 땅바닥에 그 혈서를 펴놓고 그것을 향해 큰절을 하는 모습도…. 그리고 큰절을 마치고 일어선 그에게 여러 사람이 악수를 청하고 포옹을 하는 장면도…. 그 모든 것이 내 뇌리에 명료하게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그 후로 나는 그 청년의 모습을 두어 번 더 볼 수 있었다. 그리고 3월 15일 이승만 박사가 또 다시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이기붕 씨가 새로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3·15부정선거'라는 말이 들리더니, 우리집 유선 스피커에서는 매일같이 '긴급 뉴스'를 전하는 것이었다(당시 태안읍의 거의 모든 집들은 집집마다 설치한 유선 스피커를 통해 라디오 방송을 들었다. 라디오도 귀한 물건이었다는 얘기다. 한달 스피커 청취료가 300환이었던가…).
그리고 나는 신문에서 대학생들이 이승만 박사의 동상을 넘어뜨리고 밧줄로 묶어 끌고 가는 장면도 볼 수 있었다.
4·19학생 의거는 마침내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렸다. 이기붕 씨 일가족을 자살하게 만들었고, 이승만 박사를 하와이로 망명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태안읍내 사거리에서 '이승만 박사 만세! 이기붕 선생 만세!'라는 혈서를 썼던 그 청년의 모습도 초라하게 만들고 말았다.
나는 그 후로도 태안 거리에서 그 청년의 모습을 몇 번 더 볼 수 있었다. 그는 혈서를 쓰던 때의 비장하던 모습을 완전히 잃고 있었다. 그 비장하던 모습이 도대체 다 어디로 간 것일까? 나는 그런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모습이 너무도 초라해 보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오늘 국회의원 박종웅의 엉뚱한 단식을 보면서 왠 까닭인지 내 소년 시절의 그 '혈서 청년'의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박종웅과 그 혈서 청년의 비장한 모습이 너무도 닳았기 때문일까? 그 청년의 모습을 떠올릴수록 자꾸만 박종웅의 단식 모습이 오버랩 되곤 하는 이 노릇이 도대체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내 소년 시절의 그 혈서 청년은 결코 돈 키오테가 아님을 확신한다. 4·19 이후의 그의 초라한 모습이 그것을 방증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박종웅은 끝내 그 청년 같은 모습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것 또한 잘 알고 있으며 또 확신하고 있다. 박종웅은 자신의 오늘의 엉뚱한 단식이 훗날 세상의 웃음거리로 '확정'되는 상황이 온다 해도 결코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계속적으로, 어쩌면 죽는 날까지 어깨를 펴고 목에 힘을 주고 살 것이다.
박종웅―그는 돈 키오테적 '신념의 사나이'가 아닌가. 후안무치의 대명사 김영삼 씨를 '정치적 아버지'로 삼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그리고 이 나라는 조선일보, 김영삼, 김종필, 이회창 등을 필두로 하는 거대한 '후안무치의 숲'이 뒤덮고 있는 나라가 아닌가.
그러나 이 후안무치의 나라에는 이 순간에도 그것을 깨닫고 고뇌하며 '투쟁'의 장엄한 의미를 불피워가는 사람들이 계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그리하여 나는 박종웅의 오늘의 엉뚱한 단식을 통해서도 역으로 우리의 진정한 희망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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