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곳에 숨어 살기

방민호의 <문화칼럼>

등록 2001.09.07 11:32수정 2001.09.07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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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갔을 때 있었던 일이다. 내몽고로 통하는 중국의 북쪽 땅은 황량했다. 그때 나는 연와(軟臥), 경와(硬臥), 연좌(軟座), 경좌(硬座) 가운데 맨 마지막에 쓴 딱딱한 의자에 중국 여자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한자로 그녀들과 필담을 나누었다. 한국산 옷을 화제로 필왕필래(筆往筆來) 웃음이 오갔다. 그녀들 가운데 생머리 뒤로 묶은 안경 쓴 여인이 물어왔다.

"당신은 자본주의가 좋으냐 사회주의가 좋으냐?"
나는 그녀가 아는 사회주의가 무엇일까 생각했다. 잠시 망설이다 무어라고 대답해 주고는 그녀에게 되물었다.
"당신은 지식인이군요?"
그러자 청춘에 문화혁명을 겪었을 연배의 그녀는 수줍게 얼굴 붉히며 고개 가로 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조인(粗人)입니다."

粗는 거칠다 성글다는 뜻이니 지식인이 아니라는 뜻이리라. 나중에 나는 사전을 보고 粗가 옛날 다섯 등급 벼슬 가운데 네 번째 등급을 가리키는 말이었음을 알았다.

그때 중국은 지금보다 훨씬 어지러웠고 언제 어떻게 위기가 찾아들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나는 자기 나라의 시국을 깊이 우려하는 그 여인으로 인해 그 粗人이라는 말이 담박에 좋아졌다. 粗人이라는 말, 私人이라는 말보다 훨씬 소박하면서도 멋스럽고 예스러운 말이 아닌가. 그때 생각했다.

'나 역시 粗人이다.'


그러자 나는 그 여인과 내가 어떤 공동의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이라도 되는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쓸쓸하고 아픈 마음 한 가운데 어떤 안도감이 찾아 들었다.

나중에 직분(職分)을 고민하면서 감히 粗人으로 살아가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있다. 그러나 粗人이란 낮은 곳에 숨어사는 사람이다. 그 粗人으로 살기란 얼마나 쉬우면서도 어려운가. 나 자신 글을 써 숨지 못하므로 粗人의 자격을 벌써 반(半)이나 잃어버린 것이다.


정녕 혼란스러운 시대이다. 시국을 우려하는 말도 많고 투쟁의 언어도 많다. 각인이 각인을 비판·비난함으로써 자기 존립의 근거를 삼는 오늘이다.

가끔 그 粗人이라는 말이 생각나곤 한다. 소박하면서도 멋스럽고 예스러워 보이는 그 말 속에 쓸쓸함과 고통과 함께 어떤 소중한 진실이 담겨 있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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