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살에 박힌 문학자의 위선

방민호의 <문화칼럼>

등록 2001.09.06 01:24수정 2001.09.06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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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쓸 수 없는 밤이다. 이 반도의 땅에 살아가는 문제들을 생각하고 싶지 않은 밤이다. 오늘 서울의 밤은 교교하다. 휘동그란 형광등 빛 달이 구름에 묻힐 듯 하늘 정심(正心)에 떠 있다. 나는 늦도록 만나야 하는 사람을 만나고 돌아온 길이다. 서로 주고받은 이야기들이 생각나지 않는다.


노래만 생각난다. 나는 혹시 그 노래가 있느냐고 말했다. 누가 빌려갔는데 조금 있으면 가져올 거라고 했다. 오현란이다. 요즘의 대중가요는 비트가 강하거나 미끄러지는 게 많은 데 그 여자의 가늘고 강한 목소리는 구겨진다. 나는 노래가 광목 천처럼 구겨지는 사람을 예전에 알았다.

나는 만나야 할 사람과 만나면서 들었던 오현란의 노래를 생각한다. 술집 주인도 내 마음 알았는지 한 가지 노래만 끝없이 반복해서 들려주고 나는 끝없이 그 노래만 들었다.

'사랑이 머물 수 없도록 사랑이 살 수 없도록 가슴이 죽었으면 한다.' 나는 사랑을 주지 못하고 받지도 못하면서 사랑에 대해 생각만 한다. 글을 쓴다는 행위는 얼마나 위선적인가.

언젠가 잘 알려진 소설가를 만났던 기억이 난다. 이모(李某)라는 그 대작가가 많이 취했다. 취한 척 했는지도 모른다. 그가 느닷없이 술잔을 집어던지기 시작했는데 그 잔이 공교롭게도 평소에 그와 교분이 없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로만 향했다. 나는 글을 쓴다는 사람의 위선이 경멸스러웠다. 문학한다면서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옛날에 지애라는 여자가수의 노래가 좋아 밤이나 낮이나 가리지 않고 듣고 혼자 쓰던 시에도 그런 이야기를 해놓았다. 그 다음에는 고병희가 좋았다. 그녀의 애타는 목소리는 오현란이 닮았다.

벌써 가을이다. 늦은 밤이다. 달빛만 아름답다. 사랑이 머물 수 없도록 사랑이 살 수 없도록 가슴이 죽었으면 한다.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을 수 없는데 글만 쓴다는 것은 위선적이다. 내 살에 박힌 문학자의 위선이 나를 괴롭히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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