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감정―그 무지와 미망의 늪 ⑨

지요하의 <참된 세상 꿈꾸기>

등록 2001.09.12 07:57수정 2001.09.12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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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태안신문>에 쓴 '요즘은 홍성이 부럽습니다'라는 글은 자민련 당원이나 자민련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을 격분시켰던 것 같습니다. 우리 집에 전화를 걸어 언어 폭력을 자행하는 사람들은 대개 "그렇게도 홍성이 좋으면 당장 이사를 가라, 이사를 가면 될 게 아니냐"라는 말을 하곤 했습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법"이라는 말도 그들은 동원하곤 했지요.

그런데 나는 전화상으로만 그런 말을 들은 게 아닙니다. 같은 동네에서 종종 얼굴을 보며 사는 예닐곱 살이 위인 한 분 선배로부터도 직접 육성으로 그런 말을 들었지요.

"아직 홍성으로 이사 안 갔남? 언제 갈 껴?"
그의 비아냥거리는 음조에는 나에 대한 적의가 가득한 것 같았습니다.

군대 시절 파월 제1기로 월남전에 갔다온 것을 무슨 훈장인 양 자랑하기를 즐기고, 유신 정권 시절부터 오랜 세월 관변 단체에서 활동해 온 그는 원래부터 나와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몇 년 전에도 한번 내게 '이사' 운운의 말을 한 적이 있었지요. 그가 여러 사람들 가운데서 전라도 사람들에 대해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기에 참다못한 내가 바른 소리를 몇 마디 했더니 대뜸, "그렇게 전라도가 좋으면 글루 이사를 가면 될 거 아녀"하며 인상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태안신문>에 난 내 글을 어디서 어떻게 보았는지 이번에는 홍성으로 이사를 가라며 시비를 거니, 평소 유순한 편인 나로서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낼모레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으면 좀 즘잖을 줄 알어봐유. 나이를 그렇게나 많이 먹구서두 철이 들 들었으니, 원…."
말소리야 부드러운 편이었지만 내가 독기 어린 눈을 치뜨고 보니 그는 멋적게 웃으면서, "작가 선생님두 승질 낼 줄 아네 그려"하며 슬며시 꼬리를 내리더군요.


그는 내 소년 시절의 한가지 각별한 기억 속에 명료한 삽화로 존재하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를 보거나 이름만 들어도 자동적으로 내 뇌리에서 재생되곤 하는 그 기억의 실체를 나는 오늘 여기에 처음으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초등학교 몇 학년 시절이었는지는 기억이 분명하지 않지만 저학년 시절이었던 것만은 틀림이 없지 싶습니다.


어느 날 동네 청년 서너 명이 동네의 모든 조무래기들을 '읍마당'으로 불러모았습니다. 그러고는 한 청년이 조무래기들에게 뭔가를 열렬하게 말했습니다. 얘기 내용은 지금 상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이웃 동네(동문리)와 시비가 벌어지게 된 사연인 것 같았습니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 동문리 사람들에 대해서 마구 욕을 하는데, 비분강개하던 그 표정이 지금도 내 기억 속에 명료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오는 보름날 밤에 신작로에서 동문리 아이들과 '대나무 전쟁'을 하기로 했다면서 각자 적당한 대나무 하나씩을 준비해 가지고 보름날 저녁에 읍마당으로 다시 모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우리 동네 남문리와 이웃 동네 동문리 사이에 시비가 벌어지게 된 자세한 사정은 알 수가 없었지만, 동문리 아이들과 제대로 한판 싸움이 벌어지게 된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모두 동문리에 대한 적개심을 안고 전의를 불태우는 것 같았습니다. 학년은 같지만 거의 나보다 나이가 위인 다른 아이들의 충천하는 '의기'에 나도 휩쓸려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보름을 하루 앞둔 날 저녁 나는 몇 아이를 따라 장산리 탑골에 가서 어느 집 뒤울 밖 대나무 밭으로 살금살금 숨어 들어간 다음 몰래 대나무를 베었습니다. 그러고는 대나무를 하나씩 들고 냅다 산길을 뛰었지요. 여름철 야밤에 원두막 몰래 참외 서리를 하는 것만큼이나 스릴이 있더군요.

드디어 보름날 밤이 되었습니다.
동네 조무래기들은 대나무 하나씩을 들고 읍마당에 모였습니다. 나도 아버지 몰래 집 앞 채마밭의 고랑 사이에다 숨겨두었던 대나무를 찾아들고 읍마당으로 갔습니다. 야릇한 흥분과 긴장감이 내 온 가슴을 옥죄는 것 같았습니다.

청년 한 사람이 다시 한번 조무래기들에게 뭔가를 열렬하게 말했습니다. 오늘 밤 동문리 잔당들을 깨끗이 물리쳐서 우리 남문리의 본때를 보여 주자는 소리인 것 같았습니다. 불끈 쥔 주먹으로 허공을 치는 그는 좀더 비분강개한 표정이었습니다. 다른 청년들이 옳소! 하며 박수를 칠 때마다 아이들도 모두 복창을 하며 박수를 치곤 했습니다.

그런데 청년들은 아무도 대나무를 들고 있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청년들이 무섭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했습니다. 그 청년들은 그냥 맨주먹으로 싸우려는가보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자니 야릇한 경이감 같은 것이 가슴으로 파고드는 것 같았습니다.

이윽고 조무래기들은 청년들의 지시에 따라 신작로로 이동을 했습니다. 동문리 아이들보다 먼저 신작로에 도착해서 빽빽하게 진을 쳤습니다. 그 시절에는 자동차라는 게 참으로 귀한 물건이어서, 더군다나 밤에 신작로를 지나는 차를 구경한다는 것은 가뭄에 콩 싹을 보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잠시 후에 동문리의 조무래기들도 신작로로 몰려와서 쫍쫍하게 늘어섰습니다. 양편 수많은 아이들의 머리 위로 치솟은 대나무들은 그야말로 기치창검이 숲을 이룬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잠시 후 누군가가 손가락을 입에 넣고 부는 강한 휘파람 소리에 따라, 그것을 신호로 드디어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양편의 아이들은 일제히 대나무를 휘두르기 시작했습니다. 대나무끼리 부딪치는 소리, 대나무들이 신작로 바닥 맨땅을 두들기는 소리들이 참으로 요란스럽게 울려 퍼졌습니다.
휘영청 밝은 보름달빛 아래, 신작로 길바닥에서 뿌옇게 흙먼지가 피어올랐습니다.

나는 전쟁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대나무 휘두르는 동작을 반복하는데, 자칫했다간 눈알이 빠질 것만 같고, 사정없이 오금이 떨렸습니다. 한 발짝도 전진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붙박힌 채로 그저 팔만 움직일 뿐이었습니다. 모든 아이들이 마찬가지인 것 같았습니다.

청년들은 여전히 맨손인데, 내 예상과는 달리 맨손으로 육박전을 벌이는 게 아니었습니다. 조무래기들의 뒤를 돌면서 독려를 하는데, 이놈 저놈의 등을 사정없이 떠밀기도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청년이 내 등도 힘껏 떠밀어서 나는 하마터면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습니다. 만약 앞으로 고꾸라졌다면 나는 상대편의 대나무 세례로 온몸이 녹초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청년들이 아이들의 등을 미는 것은 상대편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습니다. 앞으로 한 걸음 튕기듯 나왔던 아이가 얼른 뒷걸음을 치는 장면이 연출되곤 했습니다.

서로 전진을 못하는 상황에서도 처음에는 우리 편이 우세한 것 같았습니다. 그건 순전히 강덕이의 공이었습니다. 키가 크고 힘이 센 강덕이는 누구보다도 긴 대나무를 들었는데, 대나무를 여기저기로 계속 휘둘러대는 품이 참으로 돋보이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곧 지쳤는지 팔 동작이 느슨해지는 것과 동시에 상대편 대나무로부터 손을 맞은 모양이었습니다. 아얏! 소리와 함께 대나무를 떨어뜨렸습니다. 뿐인가, 손을 싸쥐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긴 대나무를 가졌던 강덕이가 무너지니, 그때부터 우리 편은 뒤로 밀리기 시작했고, 잠시 후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제히 등을 돌리고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대나무를 버리고 정신 없이 달아나는데, 동문리의 아이들이 있는 목청껏 함성을 지르며 쫓아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타고난 운동 신경에 달음박질 소질이 있어서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계속 달아난 끝에 수리조합 모퉁이 담벼락 밑에 납작 엎드려서 가까스로 동문리 아이들의 손찌검을 피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오로지 얻어맞지 않기 위한 일념뿐이었고 아무 정신이 없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되우 창피한 노릇이었습니다. 수리조합 모퉁이 담벼락 밑에 납작 엎드려서 여치 소리를 들으며 오래 꼼짝도 않고 숨죽이며 있었던 내 꼬락서니라니…. 밝은 보름달빛은 또 나를 얼마나 무안스럽게 하던지….

그런데 그 다음날인가 이틀 훈가, 학교에 가던 나는 구시장 골목의 한 귀퉁이에서 이상한 장면을 목격하였습니다. 우리 동네 청년들과 나로서는 알지 못하는 청년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는 것이었습니다. 나로서는 낯모르는 사람들이지만, 그 청년들은 아무래도 이웃 동네인 동문리 향교말 청년들인 것 같았습니다.

나는 그들이 왜 한 자리에 모여 있는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몸을 숨기고 그들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들은 서로 정다운 모습으로 담배도 나누어 피우고 했습니다. 그러더니 우리 동네 청년 한 사람이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향교말 청년 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눈을 크게 뜨고 보니 그것은 돈이었습니다. 얼마인지는 모르나, 돈이 분명했습니다. 보름날 밤 신작로에서의 그 위험한 전쟁놀이에서 진 우리 동네 청년들이 승리를 차지한 동문리 향교말 청년들에게 돈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그 장면을 유심히 보면서도 어린애답게 별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생각을 해 보니, 그들은 아무래도 내기를 한 것 같았습니다. 자기들의 내기에 동네의 수많은 조무래기들을 동원한 것이었고, 대나무 서리를 하도록 했던 것이었고, 밤에 신작로 복판에서 그토록 위험한 전쟁놀이를 벌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내기 전쟁놀이를 벌이기 위해서 동네의 모든 아이들에게 이웃 동네에 대한 비방을 늘어놓고 적개심을 갖도록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때 내기 돈을 주고받던 그 자리의 여러 청년들의 모습 중에서도 돈을 받아서 호주머니에 넣으며 씨익 웃음 짓던 향교말 청년의 모습이 가장 명료하게 기억에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다른 청년들의 모습은 세월과 함께 잘 떠오르지 않게 되었는데도, 내기 돈을 받아 챙겨 넣던 그 청년의 그 날의 그 모습은 조금도 잊혀지지가 않는 것이지요.
청년이라고 쓰긴 했지만 17, 8세쯤이었을 그의 그 날의 그 모습이….

그때로부터 4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난 1996년 초여름 어느 날, <태안신문>에 난 '요즘은 홍성이 부럽습니다'란 내 글과 관련하여 내게 아직 홍성으로 이사가지 않았느냐고 했던 그 선배에게 나는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40년 전 그 보름날 밤에 신작로에서 벌어졌던 동·남문리 아이들의 위험 천만했던 대나무 전쟁 이야기를 들려 준 다음, 아무것도 모르는 동네 아이들을 동원한 그 내기 전쟁놀이에서 이겨 받아 챙긴 돈이 얼마였느냐고…. 그 돈을 어디에 어떻게 썼느냐고….

그랬더니 그는 전혀 기억이 없다고 하더군요. 아예 그 전쟁놀이 자체를 모른다고 하더군요. 내가 그의 기억을 재생시켜 주기 위해서 애써 상세하게 내 기억력을 동원해도, 작가의 상상력은 알아줘야 한다고만 하더군요.

그가 정말 40년 전의 그 일을 전혀 기억을 못하는 건지, 잘 기억하면서도 모른다고 시치미를 떼는 것인지, 나로서는 정말 종잡을 수가 없군요.
나는 그저 씁쓸할 뿐입니다. 그의 저능아적인 기억력이…. 또는 자신의 과거에 대한 기억마저 용인치 않으려는 그 무책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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