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조기 물결, 그리고 반전 콘서트

등록 2001.09.18 11:38수정 2001.09.18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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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째 계속되는 테러 관련 뉴스를 보고난 기자는 이제 TV를 꺼도 "God Bless America"의 선율이 귀에 쟁쟁할 정도다.

닷컴 백만장자가 발에 채일 정도로 많은 샌프란시스코에서 BMW, 벤츠 정도는 사거리마다 한 대씩 볼 수 있을 정도로 흔하지만 성조기를 달고 다니는 차는 아직껏 한 대도 보지 못했다. 다만 80년대에 출고된 구닥다리 시보레나 UPS 택배 트럭은 성조기를 꽤 달고 다닌다.

갑자기 수요가 몰려 성조기 재고가 바닥나자 컴퓨터로 뽑은 성조기 그림을 창가에 붙여 놓은 집들도 허다한데 퍼시픽 하이츠나 마리나같은 부촌에는 성조기가 달린 집을 한 곳도 찾아보기 힘든 한편에 중.하류층이 모여사는 선셋의 주택가에는 한집 건너 하나 꼴로 걸려 있다.

언젠가 서울의 적십자 회비 납부실적을 집계했는데 부유층이 밀집한 서초구와 강남구의 실적이 제일 낮고 중.하류층이 많은 도봉구나 관악구의 실적이 오히려 높아 사람들이 혀를 찼다는 기사가 문득 떠오른다.

국가적 재난에 직면해 불행을 당한 사람들을 돕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을 보면 어느 나라나 기층 민중이다. 한국의 금모으기 운동이나 ARS 수재민 성금을 봐도 가장 열심히 참가하는 사람들은 서민들이었다. 그만큼 남의 불행에 깊이 연민하고 앞장서 돕고자 하는 순수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순수한 서민들이 거꾸로 눈 먼 파시즘이나 맹목적 애국심의 첫번째 희생양이 되곤 했던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괴벨스의 나치즘 선동에 가장 먼저 휩쓸려간 사람들이 독일의 서민계층이었다. 이들은 히틀러의 광기가 일으킨 2차 대전의 최전선에서 총알받이로 죽어가거나 혹은 후방에서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대중의 백지같은 순수성이 깨어있는 지성에 의해 각성될 때는 역사를 견인하는 원동력으로 승화했지만 파시즘과 군국주의 선동에 휘말리면 파괴적인 힘으로 인류 전체를 불행에 빠뜨렸던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의 지성 역시 기로에 서 있다. 비극적 사건을 애도하는 미국 대중의 연민과 순수함이 명석한 지성과 깨어있는 언론의 선도로 순화된다면 이번 참사는 평화와 공존의 새로운 국제질서를 건설하는 계기가 되겠지만 공화당 매파와 군부의 맹목적 주전론에 휩쓸린다면 세계는 또다시 걷잡을 수 없는 폭력과 테러의 악순환에 빠져들 것이다.

다행히 사건 초기 90%에 이르던 주전론은 점차 힘을 잃고 있고 일부 진보적 언론의 외로운 외침에 그쳤던 평화와 반전의 목소리가 뉴욕타임스, 타임, 뉴스위크 등 주요 기성 언론으로 확산되고 있는 중이다.


어제 이곳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시민 단체를 중심으로 수백여명이 모여 이번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호소하는 반전 콘서트를 열었다. 미국의 지성이 마지막 힘을 발휘해 세계가 21세기 벽두부터 또 다시 전쟁의 참화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비극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미국은 이미 군사력과 경제력에서 초강대국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현명한 처신으로 도덕적 우위까지 겸비하게 된다면 세계가 미국의 지도력을 믿고 따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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