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에서 연옥을 사신 내 어머니

어머니의 병상을 지키며 ①

등록 2001.10.03 20:51수정 2001.10.04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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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추석은 참 특별한 상황 속에서 특별한 형태로 지냈습니다. 대전에서 사는 막내 동생네 집과 대전성모병원을 오가며 지냈으니까요.

올해 연세 78세이신 내 노모님의 병환 때문에 빚어진 일이었습니다. 내 노모께서 대장암이라는 중병을 얻어 지난 9월 18일 입원한 후 25일 4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받았고, 지금도 병원 생활을 하고 계시지요.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맏아들인 데다가 직장에 얽매이지 않은 처지라서, 어머니를 간병해 드리는 일은 당연히 내 몫이었습니다. 그 바람에 글쓰는 일도 휴업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전과 태안을 오가며 여러 날에 걸쳐 겨우 겨우 쓴 「파이프오르간의 선율 속에서 조화의 세계를 꿈꾸며」를 지난 9월 22일 선친 묘소의 벌초를 위해 잠시 집에 왔을 때 인터넷 세상에 올린 이후로는 계속 방학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혹 내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까 하고 궁금해 하시는 분들도 계시리라 여겨집니다.

부부가 중학교와 고등학교 교사인 막내동생네가 대전에서 살기는 하지만, 병상의 어머니를 병원에 남겨둔 채 집에 와서 추석을 쇤다는 게 영 마음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궁리 끝에 올 추석은 대전에서 쇠기로 하고, 가족들을 데리러 추석 이틀 전 날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9월 30일 주일 아침에 해미 성지의 물을 길어다가 14가정에 나누어주는 공사를 하고 미사에 참례한 다음 오후 일찍 내 12승 승합차에 우리 가족과 뒷동에서 사는 동생네 가족을 태우고 대전으로 향했지요. 내 아내와 뒷동 제수씨가 장만한 여러 가지 추석 음식들을 싣고….

시골에서 도시로, 그리고 장자인 내가 출가해서 사는 막내 동생네 집으로 추석을 쇠러 간다는 게 딱 집어 말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을 갖게 하는 것 같았습니다. 매년 명절 때마다 교통 체증 속의 먼길을 오가느라 고생을 했던 막내 동생네 가족은 올해는 어머니 덕분에 추석을 편하게 지내게 된 셈이었습니다.

나는 동생네 집에서도 추석날 아침에 정식으로 차례를 지냈습니다. 병상의 어머니는 성당에서 '조상을 위한 미사'를 지내니 올해는 번거롭게 차례를 지내지 말라고 하셨지만, 어머니가 집에 계시지 않는다고 해서 차례를 생략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우리의 전통 명절인 추석과 설을 쇠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도 의미로운 일은 차례와 성묘가 아닐까요? 차례와 성묘를 빼면 우리의 명절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과거에는 매년 명절마다 큰댁에 가서 차례를 지내곤 했습니다. 성묘까지 마치고, 종교가 없는 사촌들과는 달리 11시 미사 시간 안에 성당에 가려면, 차를 가지고 있지 않던 시절에는 내 발걸음이 되우 바쁘곤 했지요.

내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이후에도 한동안은 큰댁에 가서 차례를 지냈지요. 내 아버님 차례상은 동생들에게 맡기고…. 그러나 내 아이들과 조카들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내 아버지 갈래 중에서는 맏이인 내가 명절 아침에 집을 비운다는 것이 여러 모로 옳지 않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사촌형님들께 정중히 말씀을 드리고, 몇 년 전부터는 우리집에서 별도로 차례를 지내며 모든 행사를 주관하게 되었지요.


나는 동생네 집 32평 아파트의 넓은 거실 한쪽에 차례상을 차리고 아내와 제수씨들이 정성들여 준비한 음식들을 격식에 맞게 진설하였습니다.

차례를 지내는데는 우리집 나름의 방식으로 진행을 합니다. 나는 제사법이나 차례법이 어느 집이나 일정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집의 차례나 제사에는 여자들도 참례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맨먼저 온 가족이 합배를 한 다음 삼형제 가족이 순서대로 차례상에 술잔을 올리고 절을 합니다. 삼형제 가족 별로 아비가 든 술잔에 아이들로 하여금 술을 따르게 하고 그 술잔을 올린 다음 절을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모두 앉아서 '위령 성가'를 부르고, '위령 기도'를 합니다. 위령 성가를 하나 더 부르고, 모두 일어서서 한 번 더 합배를 하는 것으로 차례를 끝내고 이어서 음복―. 그러니까 전통적인 차례법과 천주교의 기도 예절을 혼합한 것이지요.

나는 우리의 차례나 제사를 결코 '미신'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허례허식으로 보지 않습니다. 돌아가신 내 아버지를 신으로 떠받드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정성들여 차린 차례상에 내 아버지의 혼령이 오셔서 잡수시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내 아버지를 기리기 위한 내 마음의 정성과 효심의 표현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나는 그것을 우리 민족이 꽃피워온 전통 문화의 한 실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아름다운 풍습이라고 생각하는 거지요.

나는 우리의 제사 문화와 나의 제사 행위가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내리신 '십계명' 중의 4계명인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말씀과 잘 부합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릇 제사란 부모(또는 조상)에 대한 효(孝)의 명확하고도 구체적인 증표라고 보는 거지요.

나는 내 아버지께서 살아계실 때 효도한 만큼(또는 효도하지 못한 만큼) 제사를 잘 지내려 하고, 그 제사에 정성을 들이는 만큼 살아계신 어머니께 효도를 다하려고 합니다. 돌아가신 이에 대한 효도도 참으로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며, 돌아가신 이에 대한 효도가 살아계신 이에 대한 효도를 잘 촉진시키고 유지시키는 구실도 한다는 것을 생각하곤 합니다.

그리고 나는 효의 한가지 증표인 우리의 제사 풍습이 하느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베풀어주신 '지혜'의 소산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제사 풍습이 오히려 하느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임을 확신합니다.

또한 절대자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부모와 조상을 기리는 제사 행위에 대해서 노여워하실 만큼 작고 쩨쩨하신 분은 아니시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명절날 아침의 차례 행위가 하느님의 마음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될 수 있도록 참으로 차례 지내는 일에 열과 성을 다합니다. 우리 집안의 모든 아이들이 제사의 의미를 바로 알며, 그것을 통해 효의 가치를 잘 헤아리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차례상 앞에 절을 하는 것은 바로 내 아버지께 절을 드리는 것이고, 돌아가신 아버지께 하는 절은 그분이 살아계실 때 드렸던 절의 연장이며, 아이들로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할아버지께 절을 드릴 수 있는 참으로 다행스런 기회임을 일깨워주곤 합니다.

나는 돌아가신 부모나 조상님들을 기림에 있어 효의 규범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살았던 그분들이 몸소 발전시키고 계승하며 살았던 전통적 제례를 무시하지 않는 것도 좀더 효에 부합할 수 있는 미덕이 되리라고 생각하는 거지요.

차례를 마치고 즐겁게 음복을 한 우리는 서둘러 대전성모병원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병실 안의 어머니를 모시고 같은 9층 (외과 병동) 안에 있는 경당으로 갔습니다. 미사 준비를 하시는 수녀님께 조상을 위한 위령미사 예물과 어머니를 위한 축복미사 예물―두 개의 예물 봉투를 드렸습니다. 삼형제가 2만원씩 모아서 3만원씩 나누어 넣은 예물이었습니다.

천주교의 '미사 예물'은 초기 교회의 풍습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지요. 초기 교회 신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리기 위한 교회 예절에 참석할 때는 빵이나 먹을 것을 가지고 갔답니다. 예수님의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최후의 만찬'을 재현하며 '빵의 나눔'을 행하곤 했던 거지요. 그것이 교회 예절의 전통으로 굳어지면서 '성체성사'로 정착하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비용' 문제도 발생하게 되어 마침내는 그 비용을 전담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게 되었던 거지요.

그런 전통이 오늘날의 미사예물로 발전, 정착하게 되었는데, 천주교회에서는 신자들이 특별 지향의 미사를 청원하며 바치는 미사예물의 적정 금액을 따로 정해 놓지는 않았으나 생활에 부담이 되지 않도록 권장을 하며, 그에 따라 대개는 2, 3만원 정도 넣는답니다.

그리고 교회는 모든 미사 예물의 금액을 교구, 해당 교회, 미사집전 사제에게 삼등분한답니다. 어쨌든 천주교회의 미사예물은 초기 교회로부터 유래하는 '나눔'의 정신에 기초하는 것이지요.

우리 가족이 추석날에 두 가지 지향의 예물을 드리고 미사를 드리기는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전국의 모든 성당들에서 조상을 의한 미사를 지내는 날에 우리 가족은 대전성모병원 경당에서 살아계신 어머니를 위한 축복미사도 봉헌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삼형제 가족이 대전성모병원 경당에 모두 모여 어머니와 함께 미사를 지낸 것은 참으로 특기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어느 누구도 상상해 보지도 않은 일이었으니….

대장암 수술을 받으시고, 5일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추석날 아침에서야 겨우 미음을 드시기 시작한 어머니의 그 고통과 고생을 생각하니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이제 미음을 드실 만큼 회복이 되신 것을 생각하면 천만 다행으로 여겨지면서도….

앞으로 퇴원을 하시게 되면 걱정 없는 마음과 다시는 빈혈이 생기지 않는 건강하신 몸으로 말년을 편안하게 사시기를 간절히 빌고 또 빌었습니다.

나는 추석 연휴를 맞은 막내 동생에게 어머니의 병상을 맡기고 어제 가족과 함께 태안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어제서야 8대조부모님의 효열정문(孝烈旌門)과 선산이며, 교회 공동묘지에 있는 선친의 묘소를 찾아 성묘를 했습니다. 네 살짜리 조카 꼬마까지 온 가족이 함께 성묘를 하는 것은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일이지요.

아버님의 묘소에는 생전에 즐겨하신 막걸리를 따라 드리고, 묘소 옆에 자리 펴고 앉아 동생과 함께 음복을 하면서 내 불효를 한탄하기도 했습니다. 너무도 가난하여 간경화를 앓으시는 아버지를 한 번도 큰 병원에 모시고 가지 못했던 불효가 15년이 지난 지금에 생각해도 그저 한스럽기만 합니다.

그런 아버지를 생각하면 지금 살아계신 어머니께라도 더 잘해 드려야 한다는 생각이 솟고라지고….

나는 내일 다시 대전성모병원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며칠 동안은 더 어머니의 병상을 지켜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경과가 좋으신 어머니께서 벌써부터 당신 혼자 있어도 된다는 말을 하시지만….

어머니께서 퇴원하신 후에 나는 다시 본격적으로 글을 쓸 생각입니다. 어머니의 병상을 지켜 드리면서 떠올린 내 어머니에 관한 글도 쓰고, 지난번의 글 「파이프오르간의 선율 속에서 조화의 세계를 꿈꾸며」에 대한 몇 분 예의 바르신 독자님들의 뜻 깊은 질문들에 대한 답변도 쓸 계획입니다.

한동안 글을 쓰지 못한 저의 신상에 대해 궁금한 마음을 가지셨던 분들과 저의 '참된 세상 꿈꾸기'를 성원해 주시는 모든 분들께 고마운 마음을 표하면서 길이 건강한 생활 영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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