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에서 연옥을 사신 내 어머니②

지요하의 <참된 세상 꿈꾸기> 어머니의 병상을 지키며

등록 2001.10.04 06:41수정 2001.10.08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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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성모병원에 입원하신 어머니가 수술 준비를 하고 계시던 지난 9월 22일, 나는 선친 묘소 벌초를 하기 위해 잠시 집에 올 수 있었습니다.

토요일 오후에 동생과 함께 태안천주교회의 공동묘지로 갔습니다. 내 아버지의 묘동 하나만을 벌초한다면 굳이 동생과 함께 올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낫으로 하는 재래식 작업이지만, 나 혼자서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지요.

하지만 해마다 우리의 추석 전 벌초 작업은 꽤나 거창한 공사랍니다. 임자 없는 묘들과 자손들이 잘 돌보지 않는 묘들까지 도합 여섯 동의 묘를 벌초하는 일이니까요.

내 아버지의 묘 바로 한 옆에는 끝내 아들을 얻지 못하고 사시다가 돌아가신 분의 묘가 있는데, 외동따님도 신앙 생활이 충실치 못한 데다가 사윗님도 별로 성실치를 못한 듯 묘를 돌보지 않는 표가 너무도 완연해서, 내가 대신 벌초를 해주지 않을 수가 없지요.

다른 한 옆에는 내 어머니의 일찍이 예약된 자리 너머로 두 기의 임자 없는 묘가 있지요. 1980년대 중반 묘역을 닦는 공사를 할 때 옛날 묘들이 두 기 발굴되었는데, 임자 없는 옛날 묘들이라고 해서 함부로 파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지요. 몇 개 남지 않은 유골이나마 잘 수습하여 자리를 옮겨 다시 모셨는데, 그 자리가 하필 내 아버지의 묘 옆이어서 그 묘들을 벌초하고 관리하는 일은 내 몫이 될 수밖에 없었지요.

내가 해마다 벌초를 해주는 또 하나의 묘는 우리 태안교회 공동묘지에 최초로 자리하게 된 묘랍니다. 1982년 우리 집 근처의 한 집에 세들어 살게 된 중년의 병든 여인이 알고 보니 내 어머니의 고향인 전주에서 흘러온 사람인 데다가 천주교 신자여서, 내 어머니가 거의 매일같이 다니며 돌보아주었지요. 그리고 마침내 그이가 임종을 했을 때는 모든 장례를 우리 신자들이 도맡아주었지요. 아직 묘역 닦는 공사도 하지 않은 우리 교회의 야산에다가 일단 묻고 보자고 해서 묘자리까지 써주게 되었고….

당시 그 과택에게는 초등학교 2학년인 어린 딸과 외지에서 살고 있는 스무 살을 바라보는 아들과 딸이 있었는데, 모두 잘 성장하였다는 풍문이 들려오는데도 어쩐 일인지 아무도 어머니 묘소를 돌보지 않는 듯해서, 해마다 그 묘를 벌초해 주는 일도 내 몫이 되고 말았지요.


마지막 또 하나의 묘는 우리 동네에서 자식도 없이 외롭게 살다가 돌아가신 노인 부부의 묘인데, 먼데 조카들이 먼길을 다니며 벌초를 해 줄 리도 없고, 내 어머니가 그 노인 부부를 천주교로 이끌었던 책임도 있고 해서 그 묘를 돌보는 일 역시 내 몫이 되고 말았지요.

나는 동생과 함께 도합 여섯 동 묘의 벌초 작업을 하면서 내내 대전성모병원의 병실에 계신 어머니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머니와 함께 벌초 작업을 하곤 했던 지난날들을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동생과 함께 벌초 작업을 하는 것은 서너 해 전부터의 일이지요. 그전에는 매년 어머니가 거들어주시곤 했지요.

막내 동생은 외지에 나가 살고 있으니 아예 처음부터 열외인 셈이었고, 바로 뒷동에서 살고 있는 용접 기술자인 가운데 동생은 가을 한철에는 쉬는 날마다 망둥이 낚시질을 하러 가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어서, 동생의 그 낙(樂)을 살펴 주시느라고 어머니가 해마다 대신 낫을 들고 벌초 공사에 나섰던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여러 동의 남의 묘들 벌초까지 도맡게 된 것은 내 어머니의 극성(?) 때문이기도 하답니다. 노인네가 스스로 낫을 들고 앞서서 그런 봉사를 하시니 난들 어쩔 수가 없었지요.

그러나 그렇게 부지런하고 몸을 아끼시지 않던 내 어머니도 연세가 70대 중반을 지나시게 된 때부터는 벌초 작업에 신경 쓰시지 말라는 내 만류를 받아들이시더군요. 그리고 올해는 큰 병원의 병실에 누워 계시는 처지가 되셨고….

작업을 모두 마친 나는 동생과 함께 아버지의 묘에 절을 올리고 막걸리 한 잔을 부어드린 다음 바로 옆 오래 전에 예약된 어머니의 묘자리에 몸을 앉혔습니다. 그리고 아이스박스에서 꺼낸 시원한 막걸리로 목을 축이는데도, 대장암 수술을 받게 되신 어머니가 과연 그 큰 수술을 잘 이겨내실지―. 더 큰 불행을 맞게 되는 것은 아닐지 불안과 걱정으로 갈증이 더욱 심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평생을 참으로 기구하게 살아오신 내 어머니의 또 한번의 그 말년 고통이 너무도 안쓰러워 목이 메이는 심정이었습니다.

내가 지금 앉아 있는 이 자리에 어머니가 곧 눕게 되시는 건 아닐까! 그런 방정맞은 생각도 자꾸만 내 뇌리에 얼씬거렸습니다. 그러자니 어머니의 예약된 묘자리에 앉아 술을 마시는 일이 왠지 불길한 느낌이랄까, 이상한 기분을 갖게 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어머니의 이 묘자리가 지금처럼 이렇게, 앞으로 십년은 더 빈자리로 남아 있었으면 좋겄네."
나는 이렇게 동생에게 애끓는 듯한 소리로 중얼거리기도 했습니다.

그런 간절한 심정이면서도, 나는 앉은 걸음으로 몸을 옮기며 어머니 묘자리의 잡풀들을 손으로 뽑곤 했습니다. 나의 그런 행동이 나 자신에게 돌연 이상한 느낌을 갖게 하기도 했지만, 나는 그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십년 이상, 아니 다만 몇 년만이라도 어머니의 이 묘자리가 그냥 빈자리로 남아 있게 하기 위해서는 잡풀들이 범접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묘한 생각도 절로 드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묘를 돌보는 정성만큼 어머니의 예약된 묘자리도 잘 돌보고 싶었습니다.

나로서는 그런 묘자리가 이미 필요 없는 처지였습니다. 수년 전에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에 시신 기증을 해놓은 처지라서 나와 아내는 죽은 이가 차지하고 눕는 두세 평의 땅도 필요 없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렇더라도, 어머니의 묘자리는 잘 가꾸며 보존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그 '빈자리'의 시간이 좀더 오래 연장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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