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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주일 미사를 지내고 오후에 다시 대전으로 돌아갔습니다. 대전으로 가는 내 승합차에는 또 김치통들이 실려 있었습니다. 배추김치와 파김치와 무생채 등이….
과거에도 대전에 갈 때마다 거의 매번 내 차에는 김치통들이 실려 있곤 했습니다. 그것은 내 막내동생이 대전에서 살고 있기 까닭이었습니다. 나는 이런저런 일로 서울보다 대전을 자주 가는 편인데, 내가 또 대전에 갈 일이 있다하면 어머니가 내 출타하는 날에 맞추어 잽싸게 김치를 담그시는 까닭이었습니다. 나는 먼길 출타할 일이 생길 때는, 대개는 아내도 동행을 하므로 미리 어머니께 말씀 드리고 허락을 얻곤 하였으니까요.
어머니의 김치 담그시는 공사는 비교적 잦은 편이고, 종류도 다양하고, 양도 많답니다. 우리집 먹을 김치만 담그신 적은 한 번도 없지요. 배추김치, 열무김치 알타리김치, 나박지, 깍두기, 무생채에 겨울에는 동치미까지….
어머니는 김치를 담그시면 우선적으로 성당 수녀원에 보내 드립니다. 그 심부름은 나와 아내가 하고…. 어머니는 가정을 갖지 않고 독신으로 사시는 성직자와 수도자들를 잘 봉양하는 것이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이라는 일종의 신념을 생활화하고 있는 셈이지요. 사후에 하느님 앞에 나아가면 상급을 받을 수 있는 일이라는 식으로….
사제관에도 가끔 보내 드리지만 매번 그러시지는 않습니다. 사제관에는 월급받고 일하시는 식복사가 있기에…. 음식 솜씨가 빼어나신 어머니는 당신이 손수 만드시는 특별한 음식은 더러 사제관에도 보내 드리고, 수녀원은 거의 빼놓지 않으시는데,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수녀복만 입고 생활하시는 수녀님들을 어머니는 조금 안쓰럽게 보시기도 한답니다.
아무튼 태안 성당에 오시어 생활하시는 수녀님들은 3년 동안 내 어머니의 여러 가지 김치 맛을 흠뻑 누리시다가 가시는 셈이지요. 아마도 태안 성당에 오신 수녀님들은 3년 동안 한 번도 손수 김치를 담그시는 일을 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그러다보니 수녀님들은 태안을 떠나면 어떻게 살지 모르겠다는 농담도 하시는데, 샬트르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님들 사이에서는 내 어머니에 대한 얘기가 화제가 되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어머니는 가끔 당신이 담그신 김치로 불우한 분들을 도우시기도 한답니다. 병자나 어렵게 사시는 분들 집을 방문하는 일이 어머니의 중요한 일과이기도 한데, 어떤 집에는 김치를 가지고 가시기도 하니까요.
김치를 담그는 일은 보통 공사가 아니지요. 그 일을 해 본 사람이라야 그 일의 어려움을 알 수 있지요. 살림하시는 분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일이 바로 김치 담그는 공사랍니다.
나는 어머니가 조석 시장에 가서 사신 김치거리와 양념거리들을, 전화를 받고 나가서 사거리 큰길가에다 내놓은 그것들을 차로 실어오는 일이나 하고, 어머니의 작업을 지켜보기나 하다가 뒷처리나 도와 드릴 뿐이지만, 그 공사의 절차가 꽤나 많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요. 그래서 게으른 여자들이 (웬만큼 부지런한 여자들도) 가장 하기 싫어하는 일이 그 공사라는 것도 잘 알지요.
그런 김치 담그는 공사를 내 어머니는 팔순을 바라보시는 연세에도 거의 한 달이나 달포 간격으로 손수 해 오신 겁니다. 매번 웬만한 집의 김장 규모로…. 그러다가 내가 서울이나 대전 쪽으로 출타를 한다하면 그날에 맞추어 또 공사….
그러신 어머니가 지금 대전성모병원에 입원을 하고 계십니다. 대장암 진단에 따라 수술 날짜를 받아놓고….
그런데 어머니가 집에 계시지 않는데도, 선친 묘소 벌초를 하는 일로 잠시 집에 왔다가 다시 대전으로 돌아가는 내 차에는 김치통들이 실려 있습니다. 이번 김치 역시 대전에서 사는 막내동생네 집에 들여놓아줄 것인데, 이번에는 어머니 대신 뒷동에서 사는 제수씨가 공사를 했습니다. 초등학교 교사인 내 아내는 토요일 오후 퇴근해 와서 조금 그 공사를 거들었고….
뒷동 제수씨가 이번에 큰 수고를 한 것은 나를 통한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 때문이었지요. 병원에 입원하기 전 어려 가지 검사 과정을 치르며 동생네 집에서 며칠을 묵었지요. 그때 어머니는 동생네 집의 살림 형편을 눈으로 보실 수가 있었지요. 물론 그전부터 훤히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직접 눈으로 보는 동생네의 살림 형편은 딱한 지경이었습니다. 대전에 잠자리를 두고 금산의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출근을 하는 동생 부부는 초등학교 4학년 아이에다가 젖먹이가 딸려 있고 해서 아침이면 정신없이 바빴습니다.
한번은 아침에 밥상 형편을 보신 어머니와 제수씨 사이에 이런 말이 오가더군요.
"저번에 담아다 준 김치는 다 떨어진 게로구나? 김치 담글 새두 읎을 것 같은디…."
"걱정 마세요, 어머님. 정 안되면 사서 먹어두 돼요."
"사서 먹는 김치가 제맛이간…."
그날 어머니는 병원에서 내게 단단히 부탁하셨습니다. 태안의 내 아내와 제수씨에게 미리 전화해서 김치를 좀 담그게 하라고…. 어머니가 태안의 며느리들에게 직접 부탁을 하지 않고 나를 통해 하신 것은 미안한 마음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역시 직장에 매인 몸인 데다가 살림을 도와 주시던 어머니가 계시지 않아 더럭 바빠진 내 아내와 뒷동 제수씨는 젖먹이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막내 제수씨보다는 조건이 좋은 편이었습니다. 내 아내와 뒷동 제수씨는 흔쾌히 승낙을 해 주었지요.
우선은 뒷동 제수씨가 거의 하루종일 공사를 한 덕에 나는 또다시 대전에 가는 길에 세 가지 김치통을 차에 싣고 갈 수가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나는 자식들을 고루 사랑하고 생각해 주시는 어머니의 그 마음이 참으로 깊고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고마운 마음도 한량없었습니다.
평생 동안 한 순간도 변함이 없었던 어머니의 그런 마음을 생각하자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러자니 지난해 말에 또 한번 대전에 갈 때도 어머니 생각에 돌연 눈물이 핑 돌았었던 일이 바로 어제 일처럼 떠올랐습니다. 그때의 그 상념과 심정을 나는 한 편의 시로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시를 대전권의 시전문 동인지 <시도> 79집과 <태안문학> 6집에 발표하였습니다.
그 시를 오늘 여기에 소개해 보고 싶군요.
동생 집에 가며
해마다 좀 늦다 싶게 김장을 담갔는데
올해는 일찍
12월 초에 김장을 담갔다
대전에 막내 동생이 사는 탓이고
내가 대전에 갈 일에 맞춘 탓이다
여기저기
손쓸 데가 많아서
배추를 무려 150포기나 담그고도
깍두기, 파김치에 게꾹지까지 담그느라
팔순을 바라보시는 어머니는
또 한해 김장철
대공사를 하셨다
내가 승합차를 가진 덕에
여러 가지 김장 김치와 동치미 외로도
말린 조기며 망둥이며 김이며
열 가지도 넘는 식품들을 싣고
마음부터 풍성하고 흐벅진 채로
대전엘 간다
도중에 공주 처가를 들러
거기에도 내려 드릴 것들이 있는 탓에
두 집 물건이 서로 바뀌지 않도록 신경 쓰는 일도
내가 떠맡은 몫이다
조금은 피곤하고
번거롭기도 한 심정이다
때로는 약간 짜증이 나기도 한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다
갑자기 슬퍼지고 눈물이 난다
노인네의 노고와 정성이 너무
갸륵하게 느껴지기 때문이 아니다
오늘 내가 이럴 수 있는 것이 다
어머니가 살아 계시기 때문 아닌가
이 귀찮음도 수고스러움도
동생 부부의 놀람도 반가움도
장인 장모님의 고마움도
다 내 어머니 살아 계신 덕이 아닌가
그런데 이 세월이 얼마나 갈까
이럴 수 있는 세월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
갑자기 솟구친 눈물로
운전하기가 어려워져서
길가에 차를 세운다
내 어머니 돌아가시면
이 모든 일도 다 끝나는 게 아닌가
지레 슬퍼지고 적막해져서
먼 하늘 쳐다보며 눈물을 닦는다
지나는 차량 운전기사의
궁금한 시선을 느끼며….
(2000년 12월)
나는 그 시의 내용을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그 시를 떠올리자 나는 더욱 비감에 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돌연 이상한 불안감에 빠져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지난해 말에 그 시를 지은 것은 일종의 '방정맞은 행위'가 아닐까? 그 시 안에 예시된 사항들이 마침내 오늘 현실이 되는 것이 아닐까?
팔순을 바라보시는 어머니가 과연 암세포가 자라고 있는 대장의 일부를 절제하는 그 대수술을 견뎌 내실 수 있을까? 혹 어떤 불상사가 생기는 것은 아닐까? 그 암세포의 진행 상태는 과연 어느 정도일까? 확실한 진행 상태도 모르면서 섣불리 수술을 결정한 것은 아닐까?
갖가지 의문들이 내 뇌리에 무성해지는 것은 큰 수술을 받으실 어머니에게 아무 불상사도 일어나지 않기를, 어머니가 수술을 잘 이겨 내시고 무사히 쾌차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나는 눈물 어린 눈으로 운전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그리고 작게 소리내어 하느님께 기도를 하였습니다. 내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은 오로지 하느님 뿐임을 새삼스럽게 절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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