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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촌의 가을. 가을이 깊어진 청촌의 단풍나무입니다. 아득하기만 하던 가을이 이제 가려합니다. ⓒ 전고필 |
가을의 대지는 밝다. 노란 은행잎과 옻나무의 선연한 핏빛과 두런거리며 손짓하는 억새들의 향연이 이 가을을 더욱 밝게 한다.
하지만 살아 있는 이 공간은 너무나 어둡다. 텔레비전을 보면 들려오는 싸움질 소리가 이제는 신물을 넘어 아예 심한 구토와 두통까지 안겨준다. 무슨 쇼라도 벌이는 양 불량국가가 벌이는 전장을 보여주는 뉴스도 이젠 저물 무렵 대문 틈에 꽂힌 노란 부고장을 보는 것 같이 철렁 가슴 내려앉고 불길하다.
이런 세상을 위해 청춘을 불살랐던 사람들은 지금 또 어디에서 무슨 생각을 하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지 안부를 묻고 싶다. 동시대를 살아온 나는 어차피 그쪽의 세계는 원래 그런 쓸개 빠진 욕망의 포로들 몫이라 여기고 별 볼일 없는 주머니 살짝 흔들어서 가을로 몸을 맡기러 나와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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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안산보에서 바라본 안산과 평양다리쪽. 모정이 있는 안산보에서 바라본 평양다리와 안산 그리고 출렁이는 섬진강의 모습입니다. 가을이 거기 흐르고 있습니다. ⓒ 전고필 |
광주에서 담양 소쇄원 방면을 지나 유둔재를 넘으면 좌측으로 대덕 가는 길이라는 표지판이 나타난다.지도에도 등장하지 않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마을 청촌(전남 담양군 남면)은 바로 대덕 가는 길로 조금 들어가면 자리잡고 있다.
사실 이 마을은 내가 어린 시절 대부분을 보냈던 곳이다.
옻나무 껍질을 만지다 옻에 옮아서 퉁퉁 부은 날이라든가, 증조할머니의 담뱃대로 벌통을 건드리다 한꺼번에 벌에 쏘여 꿈쩍 없이 방에 누워 온 외가 식구들이 생쌀을 입으로 으깨어 얼굴에 발라주었던 것이라든지, 꽁꽁 언 강의 얼음이 약간 가늘어지면 서로의 용기를 확인하는 구름다리 건너기 시합을 하다가 물에 빠져 젖은 옷을 말리다 옷과 신발에 불구멍을 가지고 가 야단을 맞은 날들. 그런 기억들이 내 살고 있는 고향보다 더 많은 곳이다.
이 마을을 새삼 찾은 이유는 환경운동연합의 생태와 문화가 결합한 여행코스 개발을 목적으로 한 답사 후보지였기 때문이었다.
유둔재를 넘어서는 순간 강은 영산에서 두꺼비의 강으로 바뀌게 된다. 그 재가 왜 유둔재 혹은 유등재로 불리게 된지 모르지만 분명 그 재의 이름에도 한나절을 얘기하고도 남을 만한 사연들이 있을 것이다.
중학교 다니던 무렵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외가에 왔다가 일요일 막차를 기다렸는데 차는 이미 만원이 되어 내 손짓을 무시하고 가고 말았다. 다음날 학교를 가야할 처지라서 씩씩거리며 욕을 해 댔다. "가다가 빵구나 나 부러라."
그러고 나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걸어서 집으로 가는 방법말고는 없었다. 16킬로미터 정도 되는 길을 터벅대며 걸어가는 데 그 당시로선 참 호쾌한 일이 발생했다. 그 막차가 정말 재를 다 못 올라가서 펑크가 난 것이다. 지금은 좀 미안스러운 맘이 있지만 그땐 얼마나 고소했던지.
하여튼 내게도 이런 사연이 있듯 그 먼 옛날부터 많은 얘기들이 돌멩이 하나 나무 한그루에 함께 깃들여 있을 것 같은 길이 바로 유둔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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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쟁이의 변한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이 숲을 만들면서 낙원을 이곳에 만들고자 했을 것입니다. 거친 병마도 없고 다툼도 없는 도원의 세계 말입니다. 하지만 그 숲은 한 사람의 그릇됨으로 인해 하나씩 잘리고 팔려 나갔습니다. 그것을 제 손으로 해야 했던 사람들은 자식을 묻고 돌아오는 심정 그대로 였을 것입니다. 그 얘기를 들을 때 눈사위가 편치 못하더군요. ⓒ 전고필 |
그 재를 넘으면 산은 양갈래로 갈려서 기나긴 협곡을 만들고 있다. 물론 그 중앙에는 물의 길이 열려 있다. 그리고 언저리에 그다지 넓지 않는 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데 지금은 텅빈 들녘의 황량함이 다시 돌아올 봄날을 대비하고 있다.
기나긴 협곡처럼 생긴 이 지역을 외남면이라고 불렀던 시절이 있었다.
남면의 중심부는 소쇄원과 식영정, 독수정이 있었던 지역이니 그곳을 내남면이라고 하고 상대적으로 높은 재가 가로 막아 다른 강을 만들고 있는 이 변방을 외남면이라고 한 것이다.
그런 탓인지 사는 사람들의 생활도 내남과 외남은 차이가 있다. 내남면의 사람들은 뜨락이 넓어 논농사에 의탁하는데 외남은 담배, 고추, 콩 등의 밭작물 재배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또한 내남 사람들의 고기잡이는 쪽대나 투망을 이용해서 잡는 방식이 대부분인데 외남 사람들은 마을 앞 보를 틈으로서 한꺼번에 많은 양의 고기를 잡기도 하고, 쑤기를 놓거나, 크낙한 바위에 위장물을 만들어 고기들이 모여들면 주변을 막고 품어서 잡는 방식을 택한다.
특히 이런 바위들은 저마다 이름을 가지고 있고, 그 바위에는 반드시 임자가 있다. 섬진강 하면 떠올리게 되는 순창, 임실 등이 그렇듯이 말이다.
그런 바위들은 대개 바위 하나로만 소유권을 지닌 것이 아니라 바위 곁의 논과 더불어 공동 운명을 지닌다. 그래서 조개바위가 있다면 그 곁의 논의 매매와 함께 소유권이 오가는 것이다.
그 바위들과 보와 뜨락에 얽힌 내 추억의 편린을 더듬어 보며 그 길을 찾으며, 결국 그 때를 확인해 본다.
조개 바위는 우리 외가집 한사리뜰 논에 소속된 바위이다. 그 바위에서 우리는 매년 한 두 번씩 주변을 막고 품어서 고기를 잡았다. 주로 잡히는 고기들의 종류는 "동자개, 미꾸라지, 메기, 자가사리, 기름종개, 피리, 꽃가래, 붕어, 돌고기"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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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표처럼 강물에 붙어 있는 단풍 강물에 착 달라붙은 단풍잎의 선연한 색감이 편지를 쓰고 싶다는 어느 시인의 싯귀를 떠 올리게 합니다. 저렇듯 사람의 마음을 실고 어디론가 배달을 해 주겠지요. ⓒ 전고필 |
오늘처럼 찬바람이 불면 고기들은 슬슬 따뜻한 곳으로 모여드는데 그들을 유인하기 위해 바위의 틈새에 풀을 베어다가 담궈 놓는다. 고기들은 바위의 좁은 공간을 엄폐물을 통하여 충분히 활용하려고 모여드는 것이다.
우리는 한 달 정도 기다렸다 햇살 맑은 날 그곳을 퍼내는 것이다. 틈새틈새 숨어 있는 고기들이 나타날 때면 탄성이 질러지고 외할머니는 고구마를 쪄 내오고 소주도 한순배 돌면서 조그만 파티가 조개바위에서 열리는 것이다.
지금은 그런 연중 행사도 잘 열리지 않지만 내 이십대 후반까지 이런 행사는 매우 의례적인 일이었다. 덕분에 가끔은 초장에 피리를 날 것으로 찍어 먹기도 했지만 몇 해전 병원에서 디스토마 검사를 통해 균이 있다고 하여 따끔한 주사를 두 번 맞은 후로는 그림의 떡이 되고 말았다.
하여튼 이런 바위를 막고 품는 방식이나, 커다란 보를 한꺼번에 터서 물을 빼고 온 동네 사람들이 다 함께 고기를 잡는 것은 농한기에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간혹 예외가 있다면 집에 난데 없는 손님이 왔을 때 별 수 없이 몇 마리 없을 것을 알면서도 바위를 푸는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바쁜 농사철에도 물고기는 참 귀중한 역할을 한다. 저 먼 창평장까지 갈 엄두도 내지 못하는 입장에서 일하러 온 놉(서로의 농경지에서 일을 도와주는 품앗이하는 사람을 부르는 용어)에게 가장 귀중한 반찬이 바로 천어인 것이다. 그래서 부지런한 집은 봇물이 논으로 향해 있는 또랑(조그만 수로)을 따라 쑤기를 놓고 매일 아침 소꼴을 베어오면서 고기를 건져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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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사래를 하는 억새. 억새가 사람에게 인사를 합니다. 상모꾼이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듯이 말입니다. 가을 가져가세요. 복 받으세요 라고 말입니다. ⓒ 전고필 |
진흙을 비롯해 유기질이 풍부한 바닥 때문에 미꾸라지들이 많은 곳이고 가끔은 길을 잘못 들은 피리들이 떼로 쑤기에 갇혀 있는 횡재를 만나기도 한다. 하여튼 이렇게 잡은 것을 무를 숭숭 썰어서 푹 지져서 내놓으면 정말 훌륭한 반찬을 준 것으로 모두들 환호한다.
이런 원초적인 삶의 모습이 살아있는 마을을 둘러보며, 농사를 짓고 계신 외삼촌과 말씀을 나누고, 각 보에 얽힌 얘기와 마을 안산, 솟대, 입석, 평양다리 등을 살펴보고, 미리 약속을 해서 바위를 막고 물을 퍼내서 고기를 잡아 보는 것이 농경사회와 생태를 동시에 결합할 수 있는 좋은 생태체험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이 마을을 대상지로 선정했던 것이다.
이곳 저곳을 외할머니와 들러보며 변화된 많은 것들을 느껴 본다.
각 보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지만 늦가을 보를 틀 수 있는 곳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것은 평양다리가 있는 중찬보 바로 곁에 벽암정이라는 정자를 짓더니만 카페를 만든 이 마을 출신 오전무라는 사람이 비단 잉어를 관상용으로 보에 넣었는데 그 잉어들이 그 윗 보인 한사리보와 안산보까지 올라와 잉어가 죽는다고 물을 못 트게 하기 때문이었다.
함께 간 친구는 잉어의 배설물이 오히려 이 강을 오염시키는 주범인데 보기 좋은 것만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그 양반이 마을에 여러모로 좋은 일을 했던 터이라 연로하신 분들은 그분의 말씀을 지켜주시는 것이 도리라고 여긴다고 말씀하신다.
카페가 들어서면서 마을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보기 흉측한 꼴도 많이 보인다고 한다. 특히 불편한 것은 평양다리쪽에 카페가 들어서서 그 안쪽이 여름이면 천렵하기가 좋은 곳이었는데 카페 손님들 몫이 되었다는 점이다.
마을 안산의 남쪽 자락에 있는 평양다리에는 참 재미있는 얘기가 있다. 화순 적벽이 유명하다는 말을 듣고 평양감사가 구경을 나섰다. 전직 평양감사인지 현직 평양감사인지 모르지만 하여튼 그랬단다.
그 양반이 이동할 때 그냥 제 발로 걸었을리는 만무하고 말을 타거나 가마를 탔겠지만 이 마을에서는 가마라고 얘길 한다. 가마를 든 가마꾼들의 고충이란 것이 어디 몇마디 말로 할 수 있겠는가.
갑자기 단풍이 든 붉은 바위벼랑이 나타났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적벽의 모습과 유사했던 것이다. 아래로는 출렁이는 물이 있고, 깎아지른 벼랑과 단풍이 흩날리는 모습에 꾀많은 가마꾼 하나가 "감사 나으리, 여기가 적벽인뎁쇼"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평양감사가 언제 적벽을 보기나 했겠는가. 그 말을 곧이 믿고 다리에서 적벽 구경 잘하고 갔다고 해서 "평양다리"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얘기이다.
지금 평양다리에는 불이 붙어 있다. 붉은 단풍과 오랫동안 마을 안산으로 화재 한번 거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숲이 단풍을 달고 있기도 하고 벗어 던지고 있기도 하다.
그 나뭇잎이 또 보에 떨어져 물 위를 미끄러지듯이 항해한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 이만저만한 생각이 다 거쳐간다.
복숭아나무의 복사꽃이 물위에 지는 모습을 보면서 우표를 생각하고 양면괘지에 장문의 편지를 쓰겠다는 안도현의 시도 함께 떠오른다.
가을, 가을은 웬지 편지를 써야 할 것 같은데 어디 내 편지 받아 줄 사람 없을까 하는 속절없는 생각도 거쳐간다.
그렇게 평양다리와 벼랑을 바라보고 그 맞은편의 일렬로 된 나무들이 논의 경계에 세워진 것을 바라보면 이것이 인공의 숲이란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남쪽으로 뻥하니 뚫려 있는 마을의 지세를 방어하기 위하여 그렇게 숲을 만들었다는 것과 지금은 그 숲이 관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숲쟁이라고 불리는 곳인데 이곳에도 아픔이 있다. 전쟁이 끝난후 마을 이장을 맡았던 임아무개가 마을 돈을 부도를 냈다고 한다. 그래 그 부도를 막기 위해 귀목나무 등을 뿌리 채 캐고 자르고 해서 마을의 부도를 막으면서 숲이 파괴되었다는 것이다.
철강제련에 쓰이던 싸이나라는 것이 시장에서 암암리에 팔리던 시절에 겨울이 되면 우리는 노란콩에 구멍을 팠다. 밤을 세워 파낸 그 구멍에다 하얀 무엇인가를 넣고 눈이 녹을 시간이 되면 작고 반반한 돌을 가지고 그 숲 앞에 갔다.
양지녘인 그 뜰에는 눈이 빨리 녹고 항상 짚단들이 거칠게 놓여져 있었다. 마치 배고픈 꿩과 비둘기들의 먹이터라도 제공하는 마냥 말이다. 우리는 그 곳에 이미 몇 마리 날아든 새들을 무시하고 사뿐히 돌 하나에 약 넣은 콩 하나를 놓았다.
그리고 모두들 돌아가고 나만 홀로 안산에 올라 그 콩을 놓은 자리를 감시했다. 놀라 날아갔던 꿩과 비둘기가 곧 모여들고 눈에 금새 들어오는 콩은 녀석들의 입으로 술술 들어가 잠시후 날아가다가 논 바닥에 추락하는 지점을 망보는 것이 내 임무였던 것이다.
환경의 중요성이란 언급조차 되지 않았던 시절의 얘기지만 잡아도 또 날아들던 그 많던 꿩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싶은 숲쟁이이다. 숲쟁이의 뒤편 마을로 가다보면 전봇대의 곁에 최근에 세워진 솟대가 있고 들 가운데에는 오래된 입석이 있다.
몇해전 마을에 교통사고가 빈번하고 젊은 친구들이 변고가 많아지자 동리의 회의를 거쳐서 자발적으로 세운 것이다.
마을에 들어오는 악한 기운을 막고 방어하는 솟대를 세우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자주 있는 것이라는 어른들의 충고를 4∼50대의 청년(?)들이 받아들인 것이다. 신비하게도 그 후론 이렇다할 큰 사건이 없다는 얘기를 이미 전해 들었던 바이다.
푸른 마을 청촌은 그렇게 유둔재를 넘어 후미진 곳에 있지만 논과 밭과 강에 기대어 사는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건강한 곳이다.
나는 이 마을에 내 고장을 찾는 사람들과 함께 찾아가서 내 할머니의 얘기와 이웃집 아저씨의 얘기를 다 듣고 싶다. 그리고 이런 영토들이 제대로 지켜질 때 이 땅 또한 저먼 미래의 주인에게 안전하게 전달 될 수 있다는 것을 함께 얘기하고 싶었다.
덧붙이는 글 | 순결한 사람들이 사는 전남 담양군 남면 가암리 청촌 마을.
그런 마을은 이땅 어디에든 또 남아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찾아 내지 못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가을이 깊어갑니다. 싸늘한 기운이 가을을 몰아내고 있습니다.
부디 가까운 마을에 막걸리 한되라도 받아가지고 가 보시면서
그 마을의 뜨락과 강물 같은 삶의 얘기를 길어 보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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