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소사의 이른 아침 가을 풍경

소쇄한 기운이 감도는 새벽 산사에 가보신 적 있나요

등록 2001.11.13 11:37수정 2001.11.13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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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소사의 전나무 숲길. 우뚝 솟아 푸른 비늘을 하고 있는 모습과 바람을 타고 흘러오는 솔잎향이 너무나 그윽하여 벌써 다른 세상에 들어왔음을 느끼게 합니다. ⓒ 전고필


가을은 우리가 생명을 기대고 있는 누런 들판에서 먼저 시작하여 콤바인의 소리를 타고 점점 산으로 향하고 이내 수많은 색의 향연들이 산자락에 깊게 파고 들었다.


멋 모르고 바쁜 도회지 사람들도 갑작스레 창문 사이로 직사광선을 막아주었던 나뭇잎이 하나씩 줄기를 드러낼 때 잊었던 내가 생각나고 가뭇거리던 옛 생각도 나곤하면서 시골 사람보다 더욱 짙게 가을을 타게 된다.

그럴 때 가을은 반경을 넓혀 안개를 낳는다. 안개가 혼돈스럽게 느껴지고 호흡을 곤란하게 해서 천식을 만든다는 걱정 따위를 이 가을에 아무리 강조해도 가을 타는 사람에게는 죽은 말이 된다.

그런 탓에 가을 여행은 안개낀 새벽이 오히려 더 장엄하다.

▲전나무 숲 건너 단풍터널. 길다랗지는 않아도 선연한 붉은 단풍길이 정한 어리게 합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단풍을 보며 세월을 얘기합니다.
ⓒ 전고필

여러 가지로 일들이 겹쳐 답사를 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 상황이었지만 지난 일요일 대학시절을 함께 누볐던 친구의 결혼식 참가를 위해 고창에 갔다가 그 장엄함을 또 느껴 보았다.

하루 전날 고창에 당도하여 몇잔의 술을 마시고 여관방에서 먼저 술에 취한 후배와 잠이 들었다. 평소와는 달리 편한 잠에 취하지 못하고 일어나 보니 새벽 3시쯤 되어 텔레비전을 보니 노팅힐이라는 영화를 상영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갖는 일상성이 영상이라든가 매체에 의해 신비화되어 어떤 특정한 집단은 나와 다를 것이다 라는 생각이 지배하고 이로 인해 서로가 접근하지 못하는 어두운 현대사회의 채널을 사랑이라는 화법으로 풀어준 영화였다.

더 또렷해진 눈으로 후배와 선운사를 향해 나섰다. 차는 고창 시가지를 벗어나 선운사의 이정표를 찾아가는데 안개와 고속질주하는 차량이 아직 운전에 익숙하지 않은 후배를 곤혹스럽게 했다.


어느 순간 이정표를 보니 우리가 와 있는 곳은 선운사에서 한참 멀어진 변산 가는 길이었다. 줄포와 곰소의 이정표가 보이는 것이다.

▲사천왕문과 변산. 산에도 단풍이 뚝뚝 물들어 있습니다. 회색 바위벽에 붉은 물감을 뿌려 놓은 듯 말입니다. ⓒ 전고필
여행에서는 이 또한 운이 좋은 일이다. 어딜 가야 하는 것이 숙제가 되었다면 머리 아파 오는 일이지만 내가 선운사에 가서 딱히 해야 할 일이 없으니 무슨 대순가.

그저 이런 안개가 주는 잘못된 길 찾기도 행운을 불러주는 일일지도 모르기에 서로를 기대하며 내소사로 향했다. 아직은 바다와 산 모두가 안개에 쌓여 있는 시각이었지만 차창을 파고드는 상쾌한 비릿내음이 오히려 건강하게 느껴졌다.

내소사 주차장에 들어갈때면 나는 항상 초라한 광부가 된 느낌이든다. 차량 한 대가 들어오는데 근 5000원의 주차료를 받으니 그야말로 노다지를 캐서 상납하는 곳 아닌가 싶어져 우울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른 새벽에는 그 멋진 유니폼을 입은 공단의 아저씨들도 주무시기 때문에 차를 저 안쪽으로 가져다 놓았다.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내소사의 참 맛은 여러 곳에서 느껴 볼 수 있다. 절집 초입에서 만나는 우뚝 솟은 전나무 숲이 주는 터널과 같은 경관과 그 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기가 그윽해서 일품이다.

너무나 오래 되어 더 이상 위로 자라지 못하고 몸뚱이에 가득 힘을 모으다 결국 잎사귀에 기운을 줘 버린 채 지긋이 서 있는 고목의 자태 또한 처연하게 아름답고, 청림사라는 절이 없어지면서 땅속에 묻어 두었던 고려시대의 구리 종을 찾아내어 절 집 어귀에 보관한 범종각의 모습과 오묘한 부처님의 뜻을 세상에 내뿜으려 동종을 달고 있는 포뢰라는 용을 보면 한껏 소리 질러 보고 싶어진다.

푸른 전나무 숲을 지나 만나게 되는 가을 잎의 단풍은 또 얼마나 붉은지 눈시울이 따가울 정도로 정한이 든다.

▲고목의 가을. 절집에 있는 커다란 나무에도 가을은 비껴가지 않았습니다. 자꾸 바라보니 젊은 나도 세월에 대해 말할수 있을 것 같아서 서러워집니다. ⓒ 전고필
대호선사가 그리다 말고 돌아간 대웅보전의 단청을 보는 것이나 문살에 새겨진 연꽃과 국화를 보는 것도 내소사가 수많은 대중들의 한없는 사랑으로 태어났음을 알려주어 정겹다.

게다가 전나무 숲이 끝나는 곳에서 바라보았던 변산의 우람한 바위와 그 사이 울긋불긋 피어난 단풍의 자태는 그 침잠된 정화의 세계를 말없이 보여주는 듯하다. 욕심 많았던 절 앞의 풍경과 달리 그 절 안에 서면 모든 것이 또한 부질없음이 가을 새벽 산사에서 느껴진다.

모처럼만에 나는 친구로부터 아름다운 여행 선물을 받았던 것이다. 친구의 행복을 기원해 보며 다시 고창으로 돌아왔다. 내소사의 뚝뚝 물든 가을을 가슴에 새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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